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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화장 (Revivre, 2015)

by 김곧글 Kim Godgul 2015. 5. 1. 10:37



먼 옛날에 종로 단성사 극장에서 '서편제'를 봤던 때가 몇 년 전 같은데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아무튼 임권택 감독의 영화 하면 얼핏 떠오르는 영화가 '서편제'이다. 그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있으니까 그런지 몰라도 '취화선'이 떠오른다. 지금 필모그라피를 살펴보니까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자각하지 못 했던 옛날에 동시상영 3류 극장에서 '티켓'을 본 것도 생각난다. 그 외에 '태백산맥', '장군의 아들' 등이 생각난다. 아무튼, 토속적이고 민속적이고 전통적인 소재와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지만 말이다. 

  

영화 '화장'은 초반에 다소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몰입해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끝까지 가서 괜찮은 감상이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중년 남자가 아내를 돌아오지 못 하는 강으로 떠나보내는 동시에 새 여자에게 설레이는 감정을 느끼는 심리를 심도있게 잔잔하게 느릿느릿 잘 표현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임권택 감독이 기존의 자신만의 한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색깔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비록 굉장히 놀랄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흥행성에 대해서 따져보자면, 아무래도 남자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주요 핵심 요소인데, 그것도 중년 남자의 것인데, 아직 한국 사회에서 중년 남자가 이런 정도로 일상적이고 사적이고 에너지를 외부로 발산하지 않는 내용을 영화로 즐길만큼 문화의 다양성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예로 들자면, 텔레비젼에서 인기 있었던 사극 드라마가 주로 어떤 내용인가를 살펴보면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대개 어떤 내용의 영상물 픽션을 보고 싶어하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실상 자신의 처지는 그렇게 영웅적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아애 술을 진창으로 마시고 노래방이나 술집에서 여인들과 실컷 춤추고 노래해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고 다음날 고단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런 고급스런 예술작품을(이런 영화 또는 이 영화 속에서 현대무용 같은 것) 감상하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뜻이다. 

  

이 영화에는 중년 여자의 심리는 많지 않은 편이고, 젊은 여자의 심리는 표면적이다. 나름 신선하고 희소성이 있는 좋은 영화이지만 현시대 중년남자 관객층이 아직까지는 이런 고급스러움을 즐길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일부 관객들은 남주인공 오정석(안성기 분)과 추은주(김규리 분)의 육체적으로 깊은 연애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유교적인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본능에 의한 상상만으로 그친다. 심리적인 장면들이 좋았지만 어쨌든 다소 심심하게 영화가 끝나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단지 연애 수준만을 따지자면 이런 정도의 연애 영화는 예전에도 많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절제미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영화의 어떤 의미에서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도 있는 장면, 추은주가 중국 지사로 떠나기 전에 자차를 몰고 오정석의 별장에 찾아왔는데, 오정석은 만남을 거부하고 몰래 빠져나와 동네 길을 천천히 걷고, 추은주는 그런 그를 모른채하고 그냥 지나쳐 떠나는 장면이 있는데, 혹시 어떤 젊은 관객은 오정석이 왜 굳이 추은주와의 만남을 거부했을까? 라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또는 영화를 보고나서 떡볶이나 순대를 먹으면서 나름대로 추측해볼 것이다. 굳이 왜 그랬을까?

  

원작 소설을 안 읽어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오정석도 추은주에게 본능적인 마음이 끌려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왜 거부했을까?


일단 가장 크게 보여지는 것은 오정석이 아내의 추억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내는 죽기 전에 병실에서 오정석이 소주 대신에 와인을 마시는 것을 보고 새 여인이 생겼을거라고 직감하며 울분을 쏟아냈고 심지어 죽고나서 그의 별장에 와인이 배달되도록 만들어놓기까지 했다. 오정석은 추은주가 별장으로 온다고 하니까 본능적인 욕망에 이끌려 거실 테이블에 와인과 안주를 준비해놓지만 차마 아내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추은주를 품을 수는 없다고 결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 다른 이유를 추론해볼 수 있다. 두번째는, 사회적인 이목 즉 같은 직장의 여직원과 부적절한 만남이 알려질 위험성이 두려웠다. 즉, 부사장으로 승진될 거라고 소문까지 퍼진 상태인데 이런 스캔들을 감수할 정도로 무분별하거나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다. (그는 협력업체 간부가 제공해서 숙소로 찾아온 업소녀를 거부하고 돌려보냈을 정도로 사회적 분별성과 조심성이 있는 성격이다) 세번째로, 비뇨기과에 다니며 치료 중에 있는 상태인데 그것으로 인한 불편함이나 남자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굳이 이 순간에 추은주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었다. 네번째로, (다소 문학적이기도 하고 젊은 남자와 차별되는 중년 남자의 특징이기도 한 것인데(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중년남자가 이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정석이 판단하기에 추은주가 지금 자신의 품으로 찾아오는 것은 그녀가 원했던 중국으로 발령되도록 추천서를 써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더불어 그때까지 조금씩 쌓여진 알듯말듯한 서로 간의 로맨틱한 감정을 육체적으로 표현해주고 싶어한 것인데, 오정석이라는 인물의 특징상 그는 추은주와 훨씬 깊은 감정으로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지 (즉, 정신적으로 더 많이 공감하고 교감하고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고 싶은데) 이런 식으로의 만남은 그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별장에서의 만남을 거부한 것이다. 즉, 추은주가 싫은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은 추후의 만남까지 고려했을 때 만나기 좋은 순간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오정석이 스마트폰 문자로라도 추은주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써서 보내지 않은 행동을 봐서도 그가 추은주와의 만남을 내심 갈망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당연히 영화가 열린 결말 비슷하게 끝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어떤 것은 크게 어떤 것은 작게 작용했다고 각자 관객이 나름대로 해석해 볼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어떤 중년남자의 (당연히 영화니까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어떤 삶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삶은 결국 인간의 삶의 한 측면이기도 하니까 의미가 있을 것이다.



2015년 5월 1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