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감상글(Movie)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 1951)

by 김곧글 Kim Godgul 2017. 9. 3. 15:57




아마도 영화사를 다루는 책이나 다큐 또는 교양프로에서 거의 필수로 언급되는 작품일 것이다. 워낙에 고전명작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라고 하는데 필자는 최근에 감상했다.


80, 90년대에 젊은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영화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대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될 때도 대대적으로 홍보하곤 했던 작품이었으니까 말이다. 영화 대부에서 주인공 ‘돈 비토 콜레오네’역을 했던 ‘마론 브란도’라는 배우가 파릇파릇한 젊은 시절 무명에서 톱스타 영화배우로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던 작품이 이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다.


한편 이 작품은 유명한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오리지널 대본으로도 유명하다. 아무튼 1950년대 초반 흥행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라고 한다. 또한 전 세계 곳곳에서 연극으로 많이 공연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단지 대단한 흥행성적 때문에 이 영화가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아닐 것이다. 테네시 윌리엄스라는 걸출한 작가의 시나리오와 엘리야 카잔이라는 당대 최고 감독의 연출로 탄생한 작품성이 큰 몫을 했겠지만, 영화하면 무엇보다 캐릭터가 핵심이라는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즉 인물들의 새로운 연기 때문에 오래도록 회자된다고 한다. 요즘시대에도 가끔 언급되곤 하는 ‘메소드 연기’가 세상에 (미국에) 널리 알려지는데 일등공신을 한 것이다. 참고로, '메소드 연기'라는 것은 이 즈음(1950년대 초)에 미국 뉴욕시에 있는 '액터스 스튜디오'라는 연기학원에서 '리 스트라스버그'라는 감독이 주도적으로 활용한 연기법이라고 한다.


주인공 스탠리를 연기한 마론 브란도의 폭발적인 메소드 연기는 ‘제임스 딘’이 반짝하는 청춘스타에 머물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마론 브란도의 스탠리를 보면 단지 흔한 마초 남성상과는 차별되는 독창적이고 강렬한 매혹이 있다. 그냥 어떤 벼락 스타의 매력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무엇이다.


미국 문화사에는 소위 온화하고 정돈되고 보수적인 주류문화와 이에 어떤 식으로 거스르는 에너지를 내뿜는 반문화라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다고 한다. 이 둘은 현재도 미국 문화라는 쌍두마차를 이끄는 두 말이다. 전후세대 또는 비트세대로 대변되고 나중에 히피문화로 이어지는 반문화가 태동한 것도 이 영화가 상영된 즈음, 1950대이다. 이 영화에서 스탠리의 거칠고 투박하고 교양을 의식하지 않는 성격 그러나 자신의 부인을 본인 스타일로 사랑해주는 남성적 이미지는 반문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추종을 받았다고 한다.


매우 유명한 영화이고 줄거리도 어렵지 않게 찾아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장르적으로 여성관객을 위한 드라마라고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시골의 몰락한 지주 집안의 두 자매 블랑세와 스텔라가 얼마동안 떨어져 살다가 뉴 올리언스라는 대도시의 빈민가에서 상봉한 가족사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작은 가족사 속에 시대를 넘나드는 깊고 넓은 울림이 있다. 어떻게 보면 마론 브란도의 스탠리는 여성 관객이 타겟인 드라마에 일종의 조연인데 (아마도 작가나 감독이 전혀 예상 못 했을 텐데) 남성 관객들은 두 자매의 사연보다 새롭고 신선하고 추종할만한 스탠리라는 남성상에 열광한 형국에 작가와 감독은 당혹해 했을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작가는 이 드라마의 제목을 왜 하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라고 지었을까가 궁금했다. (예전에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에 제목만을 보고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라고 착각했었다. 전차가 ‘tank’의 번역인 줄 착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정답은 영화에서도 잠깐 언급되기도 하지만 국내에도 번역된 책(연극대본으로 됨, 얼마 전에 헌책방에서 구입함)을 읽어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는 그 부분을 발취한 것이다. 참고로 블랑세와 스텔라라는 두 자매가 각자의 사랑과 삶에 관한 가치관을 주장하며 논쟁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는 이 자리에는 없다.


블랑세(여주인공):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만났을 때 그 사람은 장교로서 군복을 입고 있었고, 만난 장소도 이런 곳(필자주, 현재 스탠리 부부가 사는 허름한 집구석)이 아니라!


스텔라: 만난 장소 때문에 일이 달라졌겠어요?


블랑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신비스러운 전기 같은 것이 있다는 소리는 꺼내지 마라. 그 따위 소리를 꺼내면 네 앞에서 웃어주겠어.


스텔라: 이젠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어요.


블랑세: 좋아. 그럼 하지 말아.


스텔라: 그렇지만 어둠 속에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생기는 일이 있어요...... 거기에 비하면 다른 일은 모두... 별로 대수롭지 않아요.


블랑세: 네가 말하는 건 짐승의 욕망...... 단지 욕망에 지나지 않아. 이 구역을 덜커덕거리며 굴러다니는 저 낡아빠진 전차(streetcar)의 이름이야...... 오래된 좁은 골목을 올라왔다가 다시 다른 골목으로 내려가는......


스텔라: 언니는 그 전차를 타 본 적 있어요?


블랑세: 그걸 타고 여기로 오지 않았니...... 반가와해주지도 않고, 있기도 창피한 곳에......


스텔라: 그렇다면 언니의 거만한 태도가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블랑세: 스텔라, 나는 조금도 거만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고 있지는 않아. 제발 내 말을 믿어다오. 그게 아니고 네 생각은...... 저런 남자는(필자주,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를 가리킴) 마음 속에 바람이나 들면 한 번...... 두 번...... 세 번쯤 같이 어울려 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야. 그렇지만 같이 살고! 어린아이를 낳고!


스텔라: 사랑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맨 처음에 여주인공 블랑세는 동생 스텔라의 집으로 오는 길에 기차역에서 '욕망(desire)'이라는 이름이 써진 전차(streetcar)를 타고 온다. 그 전차는 스텔라가 거주하는 일종의 달동네의 골목 이곳저곳을 이동한다.


이 작품에서 욕망은 블랑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원초적인 원시적인 동물적인 성적인 욕망을 말한다. 전차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 것이고, 달동네의 좁은 골목은 여자의 성기를 상징한 것이다. 전차가 달동네의 이곳저곳을 이동하는 것은 마치 스탠리 같은 마초적이고 원시적이고 교양 없는 그러나 흔히 볼 수 있지 않은 매력을 갖춘 남자가 이 여자 저 여자와 성적인 욕망을 품고 쫓아다니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블랑세가 생각하는 스탠리처럼 생긴 남자에 대한 상상 이미지이고, 실제로 스탠리가 이런 식으로 바람둥이라는 내용은 없다. 다만, 스탠리는 결혼을 한 상태에서 성적 욕망이 충족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금전에 대한 욕망을 갈망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아이러니컬하게도 블랑세가 스탠리를 폄하하며 비유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이미지는 블랑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이것은 수많은 현대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도덕과 윤리와 관습과 사회적 관계와 생계 때문에 절제하거나 고의적으로 잠재우고 살아가는 무의식적 욕망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특별한 인격의 (이 작품에서는 원초적이고 원시적이고 성적 매력이 강한) 남자에게 어떤 여자(블랑세)는 거부감과 경계심을, 어떤 여자(스텔라)는 강한 끌림과 매혹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영역이다. 그러나 작품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듯이 블랑세도 대상의 겉모습만 다를 뿐이지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어떤 대상에게 향하고 있다. 두 자매가 각각 끌리는 서로 다른 남성성의 무엇은 관객의 판단에 맞기고 작가는 단지 제시할 뿐이다.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판단해서 결론을 짓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고전명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두 가지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1951년 미국과 2017년 한국 또는 전 세계 어느 지역은 매우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자와 여자가 어울려 사는 인간 세상에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가정사가 그 중에 하나다. 그런 관점에서 현시대에도 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2017년 9월 3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