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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새 (The Birds,1963, Alfred Hitchcock) (Film -> Short Novel) (A4: 43 pages) (3고)

by 김곧글 Kim Godgul 2017. 10. 4. 16:33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The Birds, 1963)'를 단편소설처럼 써봤다. 몇 달 전부터 짬짬이 써왔는데 최근에 이곳에 포스팅할 정도로 완성한 것이다. 여전히 수정할 곳이 존재하지만 한도 끝도 없이 지연되고 말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이 있기는 하다. '데프니 듀 모리에' 여류작가의 소설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모티프를 제공했을 뿐 실제 내용과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일단 나의 작품을 쓰고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비슷한 작업으로 이전에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1977)'를 만들어봤었다. 그때보다 좀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분량도 긴 편이다.


관련글: 토요일 밤의 열기 (Saturday Night Fever, 1977) (A4: 12 pages)



이 영화는 단지 새가 인간을 공격하는 특이한 재난 영화는 아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그렇지만 그 속에 인간들의 이야기는 흔히 블록버스터에 사용되는 전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조차 명확히 보이지 않는 편이고 몇 번 보고 관련 영화전문서적을 읽고 봐야 처음 볼 때는 몰랐던 부분들이 보여지는 작품이다.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영화를 단편소설로 써보는 작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뭔가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 울림이 있는 영화여야 고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10월 4일 김곧글(Kim Godgul)

2018년 1월 20일 2고 올림

2018년 3월 18일 3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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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The Birds, 1963)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기반으로 단편소설로 씀. 원작소설과 시나리오는 참고 안했음)

(분량: '아래한글'에서 10pt로 A4용지 43페이지)



새 (The Birds)


이 도시의 공기는 매캐하고 습하다. 로마에 다녀온 지 몇 달이나 지났건만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리움이 맴돈다. 스쳐 지나친 수많은 관광객들이 아니라 건조한 햇살과 이국적인 풍경이 뭉게구름처럼 기억의 저편으로 떠내려간다. 고대의 신화세계에 살았던 고래가 그녀를 집어삼켜서 깊고 푸른 대서양을 건너는 것도 모자라 오로라가 춤추는 극지방을 경유하여 태평양에 접한 샌프란시스코 도시에 내뱉어 놓았으리라. 어떤 미지의 힘의 작용에 의해서.


굳이 지금 이 도시에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는데. 지루하고 따분해. 아버지의 눈치를 적당히 살폈다가... 다음엔 어느 도시로 가볼까? 파리, 런던, 베니스, 취리히,... 그냥 로마에 다시 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 창피한 가십기사 따위만 아니었어도 지금도 여전히 로마에 머물렀을 텐데... 이젠 나만 의식하지 않으면 굳이 누가 들춰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일어난 특이한 사건들은 그녀를 로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데려온 것을 포함하여 어떤 미지의 힘이 의도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작용한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녀를 완전히 흡수하는 것이다.



한 여인이 신호등을 건너는 수많은 관광객스러운 인파를 가로지른다. 발걸음이 가볍고 상쾌한데 우아한 분위기가 덧붙여져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한층 돋보인다. 인도를 따라 걷는데 마천루 저편 어딘가에서 “휘이익!” 하는 소리가 그녀의 관심을 휘어잡는다. 그녀가 돌아봤더니, 어린 소년이 그녀의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휘파람을 날렸던 것이다. 그녀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미소로 화답해준다. 그녀가 유명한 셀러브리티는 아니지만 이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이런 일이 훨씬 잦았었다.


그런데 먼 곳에서 또 다른 “휘이익!” 하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귓전으로 달려든다. 좀더 깊고 강한 울림이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지만 시가행진 따위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사방을 훑어보다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유니온 광장의 열린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범인을 알겠다. 수많은 새 떼가 구름 한 점 없는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밀집해서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떼창이었다. 전혀 없는 일도 아니지만 흔히 보는 장면도 아니다.


뭐지? 그녀는 가던 길을 재촉하더니 애완동물상점으로 들어간다. 다양한 애완동물을 취급하는 제법 이 도시에서 손꼽을 수 있는 규모와 명성의 상점이다. 그녀는 출입문에서 배 나온 작달막한 아저씨가 애완견 두 마리를 앞세워 돌진해 나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이봐요! 숙녀가 입장하는 거 안 보여요? 무례하군요. 배살을 허리에 둘러맨 아저씨는 고대 쌍두마차를 몰 듯이 거리 저편으로 사라지고, 그녀는 상점 내에 진열된 다양한 애완동물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는 울음의 파노라마를 자신을 알아보는 찬양의 노래로 생각하지만 애써 무덤덤한 태도로 가로지른다. 개, 고양이, 원숭이, 토끼 등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은 새들 전용 매장이다.


연로한 점원 아줌마는 그녀의 주문을 잘 기억하고 있다. “멜라니 다니엘스 양, 예약주문하신 구관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네요. 오후에나 도착할 것 같아요.” 거래처가 있는 인도에서 새끼를 부화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다는 둥 결코 구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며 행여라도 주문을 취소하지 않도록 애쓴다.


멜라니는 자신이 주문했던 것은 새끼가 아니라 다 큰 어미이고 게다가 인간의 말을 잘 흉내낼 수 있는 새가 확실하냐고 재확인한다. 당연히 연습만 잘 시키면 인간의 말을 잘 따라한다고 점원 아줌마는 설명한다. 멜라니는 집으로 배달해달라며 테이블에 있는 노란색 싸구려 연필을 접어서 비치된 이면지에 집주소를 적는다. 점원 아줌마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배송업체에 미리 연락해놔야겠다며 카운터를 비운다. 새 전용 매장의 수많은 종류의 새들은 멜라니를 향해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지만, 그녀는 정적 속에 홀로 남겨져 있는 것처럼 느낄 뿐이다.


그때 1층 출입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온다. 말끔한 그러나 어두운 색상의 양복차림에 양손을 번갈아가며 중절모를 만지작거리면서 중년 여인들로 북적거리는 익숙지 않은 상점에서 쑥스러움을 달래며 걷는다. 상점 내부 전체를 쓱 훑어본다. 1층에는 찾는 애완동물이 없는가 보다. 2층을 올려다보더니 곧바로 계단으로 올라온다. 발걸음은 시원스럽고 행동은 거침이 없다.


남자는 2층에 올라오자마자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 봤을 때 예상된 것보다 훨씬 젊은 나이다. 이때 그는 여느 귀족 가문 저택의 복도에 흔히 걸려있는 18세기 풍 초상화 한 점을 연상시킨다. 그의 왼쪽에는 왕관 모양이 장식된 커다란 새장이 있고 그 속에는 검은 깃털의 새가 있다. 등 뒤로는 고풍스런 미니어처 궁궐 장식품이 빛나고 있다. 비록 우연이지만 이들 배경은 옛날 귀족들의 초상화가 그랬듯이 그의 능력을 상징하는 듯이 배치된 것처럼 느껴진다.


남자의 시선은 하이힐이 떠받드는 미끈한 각선미의 종아리를 타고 올라가 검은 옷을 입고 싸구려 연필을 끄적거리는 멜라니의 얼굴을 쳐다본다. 우아하고 고급스럽고 이지적인 외모. 저 여자가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보겠다. 그러나 솔직히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다.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타입이라서가 아니라 자칫 자신의 속마음이 들어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돌려 휙 나가버리는 것은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전혀 그답지 못한 행동이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멜라니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마치 점원으로 알아본 것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다. “잉꼬 좀 볼 수 있을까요? 여동생한테 생일선물로 사 줄 건데요. 얘가 11살이라서 가능하면 잉꼬의 성격이 너무 노골적이거나 무미건조하지 않은 적당히 애정 표현을 잘 하는 잉꼬 한 쌍이면 좋겠습니다.”


젠틀하고 준수한 외모의 젊은 신사가 자신을 점원으로 생각하는 것에 멜라니는 ‘어딜 봐서 내가?’ 라고 발끈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왠지 이 상황을 재밌게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남자의 첫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의 외모에 홀려서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에게 해명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베테랑 점원처럼 연기한다. 새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행동하면서 그럴 것 같다고 생각되는 새를 가리키며 잉꼬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새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들통 나고 만다.


남자는 새에 관해 잼병은 아니었다. 카나리아와 잉꼬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가 대뜸 멜라니에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요?”


멜라니는 눈꺼풀이 커지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혹시 내가 점원이 아니란 것을 벌써 알아챈 걸까?


“아무런 잘못도 없는 새들이 영문도 모른 채 새장에 갇혀서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영 기분이 나쁠 것 같은데요.” 남자는 새장 속의 새들에 관해서 물은 것이다.


멜라니는 인위적인 미소를 짓는다. “그렇다고 수많은 새들이 가게 안을 마음대로 날아다니게 풀어 줄 수도 없잖아요.”


남자는 같은 종만을 같은 새장에 넣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묻고 멜라니는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상식적인 수준의 질의문답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털갈이할 때는 특히 더 그래야겠네요?” 그녀는 간결하게 대답하려고 애쓴다. “특별히 예민해지는 시기라 각별히 신경써줍니다.”


“혹시, 털갈이하는 시기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죠?”
“새들의 표정이 유난히 창백해지고 처량해집니다.”


이 짧은 대화의 순간 멜라니는 자신도 납득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을 느낀다. 단지 새들의 털갈이에 관하여 얘기했을 뿐인데 그가 그녀의 옷을 벗기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단지 털갈이하는 시기가 오면 새들의 표정이 창백해지고 처량해진다고 얘기했을 뿐인데 마치 그가 그녀의 알몸을 음미하며 순백의 침대로 이끌어가면서 종족 보존의 욕망으로 가득 찬 그의 눈빛과 표정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다.


“잉꼬 대신 카나리아로 선물하면 어떨까요?”


무의식을 떨쳐내면서 멜라니는 화제를 전환한다. 남자는 잠깐 생각해보더니 한 가지를 요구한다. 멜라니는 전혀 예상치 못 했다. 그가 새를 꺼내서 보여 달라고 한 것이다. 그녀는 원래 새를 판매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일단 왼손에 쥐고 있던 연필을 귓바퀴에 꽂는데 하마터면 머릿결에 가려진 속살을 찌를 뻔 한다. 피가 흘러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다. 그녀는 새장을 열고 카나리아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녀로서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생각만큼 쉽게 잡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서 베테랑 점원이 아니라는 것을 들통나기는 싫다. 몇 번 허둥대며 실패한 후에 가까스로 새를 잡아서 새장에서 꺼내는데 필사의 몸부림에 놀라 손의 힘을 늦추었더니, 카나리아는 그녀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날아가 상점 천장의 이곳저곳을 마음껏 날아다닌다. 마침 볼 일을 보고 나타난 점원 아줌마와 멜라니는 상점 천장을 휘저으며 날아다니는 카나리아를 올려다보며 안절부절 못 한다.


두 여인이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허둥대는 모습이 줄에 매달린 공을 잡으려고 두 발로 일어서며 발버둥치는 귀여운 고양이들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재밌는 상황이 즐겁기도 하거니와 난공불략의 성을 함락할 전략이 유효적절했다는 전갈을 받은 장수처럼 남자는 활짝 그러나 애써 소리는 내지 않으며 웃는다.


천장을 신나게 날아다니던 카나리아가 밖으로 통하는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테이블 위에 영수증과 메모지가 쌓여있는 재떨이에 내려앉는다. 남자는 소리 없이 다가가 들고 있던 중절모로 순식간에 재떨이를 덮는다. 그가 새에게 가한 일사불란한 행동은 새의 속성과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는 혹은 새를 지배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두 여인은 그의 행동에 감탄하면서 거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자에게 보내는 환희의 찬사와 미소를 그에게 보낸다.


“황금 새장으로 들어가렴. 멜라니 다니엘스 양!”


남자는 중절모 안에서 카나리아를 꺼내 본래 있던 새장에 넣으면서 멜라니의 귀에도 잘 들리도록 또렷하게 말한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멜라니는 왼쪽 귓바퀴에 꽂았던 연필을 빼 든다. 무의식적으로 연필의 뾰족한 부분을 창으로 착각해서 그를 찌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죠?”


멜라니의 목소리는 날카롭다. 이에 반해 남자는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날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법정인데.”


멜라니는 심적으로 뜨끔했지만 일단 전혀 모르는 내용이라는 듯이 태연하게 행동한다.


남자는 멜라니가 그저 장난을 치다가 어떤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상점의 커다란 판유리를 깨먹어서 그 사람에게 큰 손해를 끼쳤는데도 법정 판사는 적절한 처벌로서 그녀를 감방에 보내지 않은 재판에 관하여 상세히 기억해내서 논리정연하게 들려준다.


멜라니는 그의 말에서 반박할 만한 허점을 발견하지 못 한다. 대신, 그가 뭐 하는 사람인지, 처음부터 자신이 이 상점의 점원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장난을 친 이유가 뭔지 따위를 따져 묻는 것으로 화제를 전환한다.


“제가 이렇게 한 이유는... 장난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어떤지 그쪽한테 실제로 체험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남기고 남자는 서둘러 2층 매장을 내려와 곧바로 상점 출입문을 빠져나간다. 멜라니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쌍욕으로 남자의 뒤통수에 내던지고 싶었지만 인내심과 자제심을 발휘한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한 저 남자의 정체가 뭘까? 여동생에게 줄 잉꼬를 사러왔다고? 혹시 처음부터 작정하고 내 뒤를 염탐하다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이곳에 쫓아 들어온 것은 아닐까? 그냥 이대로 잊어버리기에는 뭔가 께름칙하다.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멜라니는 황급히 달려 2층 매장을 내려간다. 1층 출입문을 열어 남자의 행적을 찾아본다. 그는 상점 앞 도로변에 주차했던 자신의 포드 갤럭시 승용차에 올라타서 출발한다. 그녀는 재빨리 차량넘버를 확인하고 상점 출입문 옆 계산대에 있는 전단지에 머릿속에서 증발해버리기 전에 적어놓는다.


점원 아줌마는 멜라니가 주문한 구관조가 걱정인가보다. 멜라니는 집으로 배달해달라는 주문을 재확인해주고, 전화기 좀 쓰겠다는 허락을 받아 싸구려 연필의 꽁무니로 익숙하게 다이얼을 돌린다. 연필을 쥔 손으로 수화기에 연결된 꼬인 선을 요염하게 조몰락거리는 멜라니의 모습은 영락없이 여러 남자를 쥐락펴락 해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이다. 통화상대는 데일리 뉴스 신문사 사회부에 근무하는 찰리이다. 그는 단박에 눈치를 까고 무조건 끊을 태세다. 멜라니는 전혀 부담이 되는 부탁은 아니라고 미리 선수를 치며 안심시킨다. 차량관리부에 차량번호 하나만 신원조회 해달라고 부탁한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형식적인 안부인사로 아버지와 통화하겠냐고 묻지만 멜라니는 지금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온갖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아버지는 다음에 만나러 가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해달라고 말하고 끊는다.

멜라니는 점원 아줌마에게 추가주문을 한다. 잉꼬 한 쌍. 지금 상점에는 없고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준비할 수 있다고 점원 아줌마가 확인해주자 멜라니는 구입의사를 확실히 전달하고 자신의 마음의 거울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다.



다음 날 토요일 아침, 온화하고 화창해서 주말에 여가를 즐기고 나들이 떠나기 좋은 날씨다. 멜라니는 연초록 투피스 위에 고급스런 밍크코트를 걸치고 은빛 스카프를 어깨에서 가슴 아래로 늘어뜨린 스타일로 그녀만의 고급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애완동물상점에서 어제 예약주문했던 잉꼬를 구입해서 미첼 브레너라는 남자가 사는 아파트로 향한다. 미첼 브레너는 어제 애완동물상점에서 그녀에게 굴욕감을 주었던 남자이다. 아버지 신문사의 찰리에게 부탁해서 알아낸 신원정보로 그의 실명과 거주지를 알아낸 것이다.


멜라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동승한 대머리 꺽다리 아저씨가 그녀와 잉꼬를 힐끔 힐끔 쳐다본다. 화려하고 고급스런 의상 차림의 낯선 여인과 잉꼬 한 쌍이라니, 호기심이 시선을 잠재울 수 없었나보다. 하필 내리는 층도 같을 게 모람. 걷는 복도의 방향까지도 같다. 멜라니는 아저씨가 혹시 치한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한다. 인상착의는 범죄성향과는 동떨어져 보이지만 요즘 시대에 외모만으로 인격을 판단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다행히도 아저씨는 미첼 브레너 집의 맞은편에 사는 이웃이었다. 멜라니가 미첼 브레너의 현관 앞에 잉꼬를 내려놓고 편지를 그 위에 올려놓고 가려는 순간이다. 아저씨는 자신의 집 현관 앞에서 멜라니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녀에게 말한다.


“미첼 브레너 씨를 찾아왔나 봐요? 주말에는 집에 없거든요.”



드넓은 푸른 초원이 하늘과 맞닿는 먼 곳으로 뻗는다. 크고 작은 언덕들로 인하여 구불구불한 지평선이 펼쳐진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다가와 꽃내음을 흩날리고 내륙으로 달아난다. 언덕들 사이로 요리조리 휘청거리는 아스팔트 도로. 선 굵은 엔진 굉음과 거친 타이어 마찰음이 일궈내는 앙상블의 화음을 포효하며 질주하는 애스턴마틴 컨버터블 스포츠카. 조수석에는 잉꼬 한 쌍이 커브 길 마다 좌우 방향으로 쏠리는 현상을 즐기며 운전하는 멜라니와 일심동체가 된다.


멜라니는 오랜만에 상쾌한 전원 공기를 마시며 드라이브를 즐긴다. 번잡한 대도시에서는 불가능한 경험이다. 아마도 로마에서 돌아와서 도시 외곽을 달려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래 살았지만 이런 교외지역은 난생 처음 와본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특별히 와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조금 전 미첼 브레너의 이웃 집 대머리 꺽다리 아저씨가 주말이면 으레 미첼 브레너가 머무는 곳을 알려줬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100km 달리면 나올 겁니다. 대략 한두 시간 걸릴 거요.”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뻗은 도로를 1시간 넘게 달리는 중이다. 구불구불하게 뻗은 한적한 시골 도로를 자유자제로 운전하는 특별한 재미와 맛을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좋은 그녀는 앞으로 닥쳐올 일도 그러하리라 기대한다.



머지않아 멜라니의 명품 오픈카가 도착한 곳은 ‘보데가 베이’라는 소도시이다. 농부와 어부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작은 농어촌이다. 조용하고 건전한 휴양지로도 알려져 휴가철에는 외지인들이 다소 방문하기도 하지만 잠깐 뿐이고 그 외에 대부분의 나날은 한산한 편이다.

멜라니는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잡화점 앞에 정차한다. 그녀의 고급스런 복장과 스포츠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또는 당연하다는 듯 또는 즐기는 듯 전혀 개의치 않는다.


멜라니가 잡화점을 찾은 이유는 작은 마을에서는 잡화점에서도 우편업무도 같이 봐주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금태안경을 써서 그런지 몰라도 사무적인 성격일 것 같아 보인 잡화점 주인아저씨는 멜라니의 질문에 손수 문밖에까지 나가서 정확하게 알려준다. “저기. 보데가 만을 건너 거대한 두 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하얀 집 보이죠? 거기가 브레너 가족이 사는 집입니다.” 잠깐, 브레너 가족이라고? 멜라니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브레너 가족이라면 브레너 부부 말인가요?” “아뇨. 브레너 씨는 몇 년 전에 죽었고 지금은 리디아와 자식 둘이 살아요.” “자식이 둘이나 있어요?” “미첼이라는 젊은이와 꼬마 여동생이 있어요.” 피식... 멜라니는 속마음이 들키지 않을 만큼만 활짝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깜짝 놀래켜주려고 하는데 브레너 씨 저택의 뒷문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냐고 멜라니가 묻자 잡화점 주인은 보트를 타고 보데가 만을 가로질러 가는 방법 밖에 없다고 알려준다. 그녀는 보트를 빌리겠다고 예약주문을 한다.


“혹시 미첼의 여동생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생일선물을 주려고 하거든요.”


애니의 질문에 잡화점 주인은 ‘앨리스’일거라 하고 구석에서 코를 처박고 일하던 다른 점원은 ‘로이스’일거라고 알려준다. 일거라가 아니라 확실한 이름을 알 수 없겠냐고 애니가 되묻자 잡화점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라며 소개한다.


“호텔을 지나서 쭉 가다보면 학교가 나오고 그 옆에는 정글짐이 있는 놀이터가 있고 그 옆에 빨간 우체통이 서 있는 아담한 주택이 나와요. 그 집에 학교 선생 애니 헤이워스가 살아요. 그 선생은 미첼의 여동생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거요.”



멜라니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살면서 이런 타입의 아저씨를 수도 없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 천절에 대해 감사를 표현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왕이 열심히 일한 평민에게 하사하듯 90할의 의연함과 10할의 다정함을 섞은 환한 미소를 띄워주고 잡화점을 나온다. 잡화점 주인은 멜라니가 가게를 나가는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기 드문 아름다움에 푹 빠진 듯한 미소를 지우지 못한다.



한적하고 전원적인 시골길과 많이 어울리지 않는 컨버터블 스포츠카가 우렁차게 달린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지나자 보데가 베이 학교가 나온다. 얼핏 보기에 교회 건물을 닮았다. 애초에 교회로 지었는데 교민들이 너무 줄어서 주중에는 초등학교로 주말에는 교회로 사용되는 지도 모른다. 초등학생들이 많지 않아서 이 건물 하나만으로도 충분한가 보다. 이 마을에 있는 유일한 학교일 것이다. 고학년으로 오르면 이곳을 떠나 좀더 큰 도시의 학교로 전학 갈 것이다. 그래도 아직 이런 초등학교가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삶의 터전을 두고 열심히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이 적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학교를 지나쳐 조금 더 가니까 잡화점 주인 말대로 빨간 우체통이 세워진 아담한 단독주택이 보인다.


멜라니는 집 앞에 정차하고 현관으로 걸어가 초인종을 누른다.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에요?” 멜라니는 얼떨결에 대답한다. “저에요.” 그런데 목소리는 집안에서가 아니라 집주변 어딘가에서 들려온다. “저가 누구죠?” 주택의 우측에 마련된 화단에서 젊은 여성이 수건으로 뺨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걸어온다. 붉은 상의가 햇볕을 받아 핏빛처럼 농도가 짙다.


‘애니 헤이워스’구나. 멜라니는 여인에게 다가간다.


“실레합니다. 시내 우체국에서 알려줘서 왔어요. 브레너 씨의 따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애니는 순식간에 멜라니를 훑어보고 덤덤하게 대답한다. “캐시에요.”


“시내 우체국에선 앨리스 아니면 로이스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 우편물이 제대로 배달되는 일이 없죠.”


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어렴풋이 뺨에 묻는 화단의 흙부스러기를 훔치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멜라니에게 권하고 불을 붙여준다. 멜라니는 바랬던 바는 아니지만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 두 여인은 휴식을 취하는 군인들처럼 맞담배를 태우며 뿌연 연기를 휘날리며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상대방을 탐색한다.


마주보고 서 있는 두 여인 사이에 맴도는 적막을 깨는 질문을 애니가 던진다.


“캐시한테 볼 일이 있나 봐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애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의 방향을 틀어 시선을 먼 곳으로 향한다. 미묘하게 냉랭한 기운이 담배 두 개비의 연기에 섞여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애니는 담배연기를 깊게 빨았다가 내뿜는다.


“미치와는 잘 아는 사인가봐요?”

“미첼 씨를 말하는 거죠? 조금 안다고 볼 수 있는 사이에요.”


멜라니의 대답에 애니의 얼굴에는 미묘한 화색이 돋는다. 몰을 돌려 시선을 멜라니로 향한다.


“방금 전까지 화단을 손보고 있다가 담배 생각이 간절했는데 마침 잘 왔어요. 그 참에 요긴하게 필 수 있어 좋네요. 이 마을에 오래 머물 건가요?”

“아뇨. 몇 시간 정도 있을 것 같아요.”

“캐시만 보고 떠나겠군요?”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멜라니는 뭔가 성의 없이 대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덧붙인다.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모호하게 대답했네요.”

“괜찮아요. 어차피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닌걸요.”


애니는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고 다 핀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린다. 담뱃불을 즈려밟고 멜라니를 배웅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왔겠군요. 살기 좋은 도시죠. 거기서 미치를 처음 만났겠네요?”

“그런 셈이죠.”

“다들 거기서 미치를 만나나 봐요.”


멜라니는 담배꽁초를 버리고 차문을 열다가 멈춰서 애니를 바라본다.


“헤이워스 양. 이번에는 그쪽이 모호하게 말하는군요.”


애니는 소탈하고 멋쩍게 웃어넘긴다.


“다른 뜻은 전혀 없어요. 제가 좀 돌려서 말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멜라니는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건다. 애니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수석에 놓인 새장 속 잉꼬 한 쌍이 경쾌하게 지저귀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 귀여워라. 무슨 새에요?”

“잉꼬에요.”


애니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새로 알게 된 사람처럼 멜라니를 빤히 바라본다.


“아하! 그렇군요. 잘 되길 바랄게요. 멜라니 양.”


애니는 굵은 저음의 엔진음을 포효하며 멀러져가는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을 묵묵히 바라본다.



다시 잡화점에 들른 멜라니는 애스턴마틴 후드 위에 카드가 든 봉투를 놓고 고급 금속 재질의 만년필로 글자를 적는다. ‘캐시에게’. 그리고 차를 몰고 선착장 전용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주차한다.


멜라니는 잉꼬 한 쌍이 든 새장을 들고 크고 작은 보트들이 정박해 있는 곳으로 가서 예약한 보트를 찾는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비릿내가 코를 꼬집고, 여러 명의 어부들이 낯선 젊은 미녀의 등장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뿜어대지만 멜라니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한 어부가 그녀에게 다가와 보트를 예약했는지 확인한다. 어부가 안내하는 소형 1인승 모터보트에 멜라니가 승선한다. 그녀가 원한 대로 어부는 단지 모터의 시동을 걸어주고 보트에서 내린다. 그녀는 이런 기종의 소형 보트를 운전해본 적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 소유의 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법 규모가 있는 호수가 있는데 그곳에 비슷한 모터보트가 있었고 그녀는 가끔 홀로 운전하며 호수를 쏴돌아다니곤 했었다.


홀로 승선한 멜라니는 능숙하게 보트의 방향을 틀어서 보데가 만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잡화점 주인이 알려준 지점을 향해서 항해한다. 미치 가족의 저택이 있는 그곳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이라 그리 멀지 않다. 모터보트는 조용하게 잠들어 있는 해수면의 보데가 만을 깨우며 가로지른다.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바닷물의 수면 위에 피라밋 형태의 꼬리를 그리며 브레너 가족의 저택으로 유유히 이동한다. 바다위에서 보데가 베이 선착장과 시가지를 바라보니까 전원적인 정취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아름다움에 취하는 듯하다. 이 지역 거주자들에게야 익숙한 풍경이어서 더 이상 별다른 감흥을 주는 풍경은 아닐지 몰라도 멜라니에게는 미지의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런 낯선 풍경 속에서 혼자 모터보트를 몰고 바다를 항해하여 한번 대면했을 뿐 잘 알지도 못 하는 어떤 남자의 집으로 이동하는 자신의 모습이 여간 낯설고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내가 뭐하는 건지? 예전의 나와 많이 다른 현재의 나는 어디서 어떻게 등장한 존재일까? 머지않아 예전의 나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낯선 새로운 나로 살아가게 될 것인가?



거의 도착할 무렵에 멈춰서, 멜라니는 모터를 끄고 전방을 탐색한다. 마치 상륙할 지점을 탐색해보는 그리스 전사 같다. 그렇다면 새장에 든 잉꼬는 트로이 목마일 것이다. 브레너 가족의 저택 주변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그들은 바다 쪽을 애써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이상 멜라니를 발견하지 못할 거리에 있다.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와 여동생 캐시가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가버린다. 홀로 남겨진 미치는 헛간으로 들어간다. 이제 저택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멜라니는 모터를 끄고 카누용 노를 저어 보트를 선착장으로 이동시킨다. 그녀에겐 힘든 육체적 노동이지만 이 순간은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서프라이즈를 위한 잠입 상륙 작전은 일단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통나무로 구색을 갖추는데 급급한 작은 선착장에는 아무도 없고 기러기 몇 마리만 날아다닌다. 멜라니는 새장을 들고 민첩하게 보트를 내려서 브레너 저택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혹시나 미치가 나타날까봐 헛간 쪽을 바라보며 저택의 현관문에 다다른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하마터면 무의식적으로 초인종을 누를 뻔 한다. 그런 자신을 향해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실수하지 않고 은밀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잠입하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긴장되는 스릴이 온몸을 감싸고 그 느낌이 짜릿하다. 현관문에서 좁고 짧은 복도를 지나자 넓은 거실이 펼쳐진다. 저택의 실내는 3명이 살기에 크기도 작지도 않다. 다소 고풍스럽고 낡은 가구를 제외하면 여느 중산층 가정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현재 살고 있는 멜라니의 웅장한 저택과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이런 정도의 규모와 분위기의 저택에서 잠깐 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러나 집과 더불어 어머니가 떠오르려고 하자 멜라니는 어린 시절 기억을 떨쳐내 버리고 현실에 집중한다.


거실에는 벽난로를 중심으로 푹신한 소파가 둘러싸고 있다. 맞은편 벽에는 작은 피아노가 있는데 광택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장식용은 아닌 것 같다.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듯한 입구에는 고풍스런 은빛 장식물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크롬으로 도금된 철제품이지만 오랜 세월에 의해 반사광은 약해진 듯하다. 식탁 옆 선반에는 은빛 촛대 2개가 근엄하게 우뚝 버티고 서서 멜라니의 잠입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며 경계한다. 각 촛대는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데 고대 그리스 신화에 바다의 신으로 명명된 포세이돈의 삼지창이 떠오르면서 얼핏 멜라니 자신에게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좀더 살펴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집안의 요모조모를 감상하기 위해서 잠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장을 어디에 놓는 것이 가장 좋을지 잠깐 고민하던 멜라니는 벽난로 앞 소파에 내려놓는다. 최적의 장소는 아니겠지만 집주인이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 애초에 샌프란시스코의 브레너 집에 놓으려했던 카드는 찢어버리고 캐시 앞으로 새로 쓴 카드를 새장 위에 내려놓는다. 이것으로 임무는 완료된 셈이다. 멜라니는 창문으로 가서 커튼을 살짝 열어본다. 문이 활짝 개방된 붉은 외벽의 헛간이 보인다. 아직 그 안에서 미치가 일을 보고 있을 것이다.


멜라니는 브레너 저택을 빠져나온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를 이뤘다는 성취감이 온몸의 깊은 곳에서 밖으로 뿜어져 나와 시원하고 개운하게 메아리친다. 선착장으로 가서 타고 온 보트에 승선한다. 발을 내디딜 때 무게중심을 제대로 옮기지 못 해 갑자기 보트가 이리저리 휘청거리지만 그녀는 어렵지 않게 중심을 잡아낸다. 카노를 젓는 노로 뱃머리를 돌려 보데가 베이 중심가 선착장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갖추는데, 문득, 고개를 푹 숙이고 브레너 주택 주변의 동태를 살핀다. 미치가 헛간을 나와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은 아주 흥미진진하고 스릴 넘치고 재밌어 죽겠다.


미치가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온다. 벽난로 앞 소파에 놓인 잉꼬를 발견한 것이다. 미치는 거리를 염두하지 않고 사방을 휘둘러본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포착하고 싶은 것이다. 집주변에는 전혀 없다고 판단한다. 더 먼 곳, 혹시나 보데가 만 해수면을 따라 수평선까지 쭉 훑어보는데 낯선 보트를 발견한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어떤 사람이 승선하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없다. 미치는 저택으로 달려 들어간다.


멜라니는 모터에 시동을 건다. 그러나 잘 걸리지 않는다. 재차 시도한다.


다시 미치가 집밖으로 뛰쳐나온다. 그의 손에는 군인들에게 지급되었을 법한 쌍안경이 쥐어있다. 미치가 쌍안경으로 보트를 살펴보니, 밍크코트를 입은 웬 여인이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시동을 걸고 있다. 여인의 얼굴이 낯익다. 많이 본 얼굴은 아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니다. 한두 번 봤음직하다. 마침내 그는 보트에 승선하고 있는 여인이 누군지 기억이 나자 놀라면서 얼굴 전체에 환한 미소가 울려 퍼진다.


멜라니의 보트 주변에는 갈매기 몇 마리가 지저귀며 저공비행하여 맴돌고 있다. 특별히 물고기 떼가 몰려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멜라니가 모터에 시동을 거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닐 터인데 다소 기이한 현상이다.


대여섯 번 시도된 후 마침내 멜라니의 보트는 시동이 걸리고 보데가 베이 선착장으로 귀환하는 짧은 항해를 시작한다. 그녀는 중대한 업적의 미션을 완수한 장수처럼 위풍당당하게 보트에 앉아 있다. 보트의 속도는 그녀의 애스턴마틴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엔진소리 만큼은 그런대로 위엄이 살아있어 그녀의 자아가 생각하는 체면을 지켜준다.


보트가 떠나는 것을 알아본 미치는 자신의 포드 갤럭시 승용차에 올라타더니 저택을 쏜살같이 빠져나가 간선도로를 질주한다. 갤럭시는 보데가 베이 선착장을 향해 최대한 속도를 높인다. 본의 아니게, 미치와 멜라니는 경주에 돌입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먼저 도착할 것인가? 관심은 많지 않지만 지켜보는 관객은 오로지 갈매기 떼뿐이다. 승자에게는 승리의 월계관이 수여될 것인가? 부상으로는 사랑의 지배권이 첨부될 것인가?


보데가 베이 도시가 그리 크지 않고 고전영화 벤허의 전차경주처럼 여러 바퀴를 도는 것도 아니어서 경주는 금방 종료된다. 특별히 교통이 막힐 일이 없는 도로를 과속으로 질주한 미치의 승용차가 보데가 베이 선착장에 먼저 도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치의 표정과 행동은 영락없이 먼 옛날 험난한 먼 길을 생고생하며 찾아온 신부를 온몸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신랑의 들뜬 모습과 다르지 않다.


윽고 멜라니의 보트도 선착장에 정박하려고 유유히 서행한다. 선착장 위에서 미치가 기다리는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흡족케 한다.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결말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의젓하게 내려서 미치와 여운을 남기는 짤막한 안부 정도의 인사를 나누고 이 촌구석을 떠나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 순간이다. 멜라니와 미치는 물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아마도 이 사건은 멜라니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이 자신에게 발생하게 된 일련 중에 첫 번째일 것이다. 어제 미치를 만난 이후에 자신의 삶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 분기점이다.


만약 이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멜라니와 미치는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누는 것을 끝으로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을 테고 멜라니는 예전과 같은 자신의 삶의 운행이 별의 운행처럼 순조롭게 지속됐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미치가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멜라니가 보트를 정박하고 내리려는 즈음에 난데없이 날카로운 송곳 같은 것이 그녀의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를 강타한다. 선착장 주변을 맴돌던 갈매기 한 마리가 멜라니에게 달려들어 딱딱한 부리로 그녀의 머리를 쏜 것이다. 새가 인간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이토록 기이한 일이 왜 하필 오늘 이 순간 멜라니에게 벌어졌는지는 전지전능한 미지의 존재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멜라니의 반듯한 금발머리는 흐트러지고 만다. 그녀는 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검지로 만져본다. 애완동물상점에 있던 싸구려 연필을 귓바퀴에 꽂은 쪽의 반대편이다. 그 연필이 단지 갈매기 부리와 같이 노란색이었다는 우연의 일치만으로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마녀의 지팡이이고 주술적인 힘이 발휘되어 갈매기를 마치게 해서 그녀를 공격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상상력의 날개일 것이다.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멜라니의 이마에서 차가운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그녀의 안색은 자신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흩어지며 일그러진다. 그냥 머리가 아픈 것과 머리가 아프면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아픔과 공포와 당혹스러움이 그녀의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지금 멜라니의 얼굴은 한참 물이 오를 대로 올라있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조의 컨디션이라고 볼 수 있고 그런 상태로 미치라는 남자의 존재감을 무의식적으로 압도하고 싶었는데 난데없이 미친 갈매기의 공격으로 산통이 다 깨진 것이나 다름없다. 왜 하필 미치라는 남자를 가까이서 대면하기 일보직전이어야 했는지, 다른 장소에서 혼자 있을 때 또는 무릇 지인들과 동행하고 있을 때 같은 일을 당했었더라면 지금처럼 마음 속 깊이 당혹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숲속을 걷다가 뱀에게 물린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멜라니의 마음은 육체적 아픔과는 별도로 매우 당혹스럽지만 애써 잠재우고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한다.


선착장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미치는 너무 놀라고 당혹스러워한다. 이제껏 갈매기가 인간을 공격했던 일이 있었던가? 이 지역에 오래 살았지만 이런 일은 생전 처음 겪는다. 왜 하필 오늘 이 순간에 미쳐버린 새가 미치 자신을 찾아온 여인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할만한 어떠한 해명도 떠오르지 않는다.


미치는 좀더 바닷물에 가까운 곳으로 뛰어 내려가 대기한다. 멜라니가 탄 보트가 접근하자 서둘러 능숙하게 정박시킨다. 멜라니의 손을 붙잡고 보트에서 내리는 것을 이끌어준다. “괜찮아요?” 멜라니는 애써 덤덤한 척 처신한다. “그런 거 같아요. 근데, 갈매기가 왜 저러죠?” “저도 이런 건 처음 봐요.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 같은데요. (멜라니의 얼굴을 살펴보고) 이런! 피가 흘러요. 빨리 치료해야겠어요.” 미치는 얼굴에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멜라니를 귀부인처럼 에스코트하며 선착장을 빠져나간다. 두 사람은 공중전화박스를 지나서 타이즈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들어간다.


타이즈 식당은 보데가 베이 마을을 대표하는 식당이다. 선착장 앞 중심가 사거리 명당자리에 위치했고 커다란 유리창으로 광장과 시가지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전망도 좋은 편이다. 식사 시간만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것은 아니다. 식사 외에도 커피, 음료수, 와인, 맥주, 위스키, 담배, 아이들을 위한 피자, 햄버거, 파이 등등 다양한 메뉴를 구비하고 있어서 온종일 거의 손님들이 끊이질 않는다.


미치가 멜라니를 호위하며 자리를 잡는데, 많은 손님들이 멜라니를 쳐다본다. 외지에서 온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여자는 이곳에선 좀처럼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치는 식당주인에게 응급치료약을 빌려서 멜라니의 상처부위에 하얀 솜으로 과산화수소수를 발라준다. 소독하고 응급처치하는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멜라니가 몇 달 전 로마로 여행갈 때 파상풍 예방접종을 받은 적이 있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대도시의 전문병원으로 달려가야 할 만큼 위급상황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와중에 식당주인은 멜라니가 혹시 식당 전용 주차장이나 식당 주변에서 다친 것은 아닌지 확실히 해두고자 한다. 지난번에 어떤 사람이 주차장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을 식당 주인에게 소송을 건 일이 있었다고 덧붙인다. 미치는 멜라니의 상처부위를 치료하면서 식당주인의 냉정한 시선을 차분하게 받아준다. “걱정 말아요. 보트를 타다가 다쳤기 때문에 이곳에 소송을 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식당주인은 미치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신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만족해한다.


두 사람의 짧은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된 멜라니는 막연하게 추측했던 미치의 직업이 변호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미치 씨, 법을 어기서나 장난치는 사람을 교도소에 보내는 일을 하는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미치는 앉아있는 멜라니의 옆에 똑바로 서서 내려다보며 그녀의 이마의 상처부위를 소독한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나요?” “잉꼬를 봤을 텐데요?” “아하... 그걸 주려고 여기까지 와준 거군요?” “여동생이 생일이라고 했던 걸로 기억해요. 마침 다른 볼 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이런 한적한 어촌에 무슨 볼 일이요?”

무심코 내던진 거짓말을 물고 늘어질 줄 예상하지 못했던 멜라니는 일순간의 당혹감을 잠재운다. 자신한테 굴욕감을 준 남자가 어떻게 사는 인간인지 구경하러 왔다고 시원하게 말해주고 싶지만 굳이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찬물을 끼얹듯이 진실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친구를 만나러 왔어요. 애니 헤이워스라고 이 지역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죠.”


이제 오히려 미치가 당혹해한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애니 헤이워스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죠?” 멜라니의 대답은 거침없다. “학교 동창이에요.” 미치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린다. 그는 자신의 직관적인 느낌에 이끌려 직업의 특성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을 몇 가지 더 하고 싶다. 백프로 확신은 못하지만 그녀의 말이 어딘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써 참아낸다. 지금 업무 중도 아닌데 이 시점에서 좀더 파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기에 얼마나 머물 거죠?” “글쎄요. 아직 특별히...” 미치는 멜라니에게 상처부위에 소독이 잘 되었다며 안심시켜준다.


만약 앉아서 머리 꼭대기를 보여주는 멜라니가 여왕의 발현이라고 한다면, 선 채로 그녀의 머리를 조몰락거리는 미치의 모습은 영락없이 왕관을 씌워주는 교황의 발현이다. 사회적으로 풍요로운 상류층의 멜라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미치가 그녀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권위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치료를 마친 미치는 의자를 끌어서 멜라니를 마주보고 앉아 빤히 쳐다보며 활짝 웃는다. “솔직히 말해볼래요. 날 만나러 왔죠?” 멜라니는 당혹스러워한다. “생사람 잡으시네.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당신을 만나러 왔다고 장담하죠?” “나에 대해 알아보는데 고생 좀 했겠는걸요?” “글쎄요. 아버지 신문사에 전화 한 통화했을 뿐인데 고생까지는 아니죠.” “솔직히 말해봐요. 나한테 관심 있죠?” “에? 뭐가 오해를 하고 있군요. 미안하지만 당신은 제 취향이 아니에요. 오히려 싫어하는 타입에 속해요. 무례하고 오만하고 잘난 체 하는 남자는 딱 질색이거든요. 당신 동네 갈매기도 진저리가 나고요.” 멜라니의 얼굴은 홍조를 띄며 굳어진다. 미치는 무덤덤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고 중년여성이 들어온다. 카키색 오버코트 차림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지만 얼굴의 주름살은 짙지도 많지도 않다. 그녀는 앉아있는 뒷모습만을 보고도 한눈에 알아봤다는 듯이 곧장 미치에게 다가온다. 식당 전용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미치의 자동차를 발견하고 들르는 것이리다.


미치는 중년여성을 반갑게 맞이한다. 중년여성은 미치의 곁에 앉아있는 세련된 옷차림의 젊은 여성 멜라니를 바라본다. 미치는 두 여성에게 서로를 소개한다. “어머니, 이쪽은 멜라니 다니엘스에요. (멜라니를 향해) 말라니 양, 저의 어머니 리디아에요.” 두 여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지만 미치의 어머니가 좀더 탐색하는 시선으로 상대를 살펴보며 무미건조하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다.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가장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탐색하려는 듯이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멜라니를 살펴본다. 결코 일상적인 에티켓으로서의 환대하는 시선도 다정한 눈길도 아니다.


이제껏 멜라니를 의젓하게 지배하는데 몰두했던 미치의 기세는 왠지 모르게 두 여인들의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기운에 눌려 위축되어 버린다. 미치는 빠른 판단력을 발휘하여 껄끄러운 분위기를 전환한다. 그의 지배권을 활용하여 멜라니의 거짓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를 그의 울타리에서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이미 신비한 능력의 마법의 밧줄로 그녀를 포획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것이나 매한가지다.


“어머니. 멜라니 양이 캐시에게 새를 전달해주려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왔어요. 귀여운 잉꼬 한 쌍이에요. 그래서... 오늘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미치는 멜라니의 의견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저녁식사 약속을 잡아버린다.


그런데 멜라니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강력하게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무표정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이성적으로 ‘내가 왜 그랬지?’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 한다. 비록 사소한 거짓말이 포함되긴 했지만 내심 그의 리드를 뿌리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는 주말에 소중한 시간을 쪼개서 몇 시간 달려와 잉꼬를 선물하는 고생을 했는데 그 정도 저녁응대쯤이야 받아들여줘도 나쁘지 않겠지. 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이리라. 어쩌면 미치가 영험한 힘을 지닌 보이지 않는 마법의 밧줄로 그녀를 꽁꽁 묶고 마음대로 조종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멜라니의 입장에서는 미치의 용병 갈매기에게 왕관을 파괴당해버리고 본연의 권위가 실추되었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미치의 지배력에 의해 사로잡힌 포로가 된 셈이다. 그녀를 공격한 갈매기에게 평정심을 빼앗긴 그녀의 무의식은 일단 상황을 관망하며 정상으로 복귀되기를 바라며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자신을 미치에게 떠맡기는 전략을 따른다.



멜라니는 애스턴마틴을 몰고 바람을 가른다. 도로는 한산하고 상쾌한 바람은 헤어를 흩날린다. 갈매기가 공격한 머리는 미치의 응급치료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제 특별히 성처부위에 신경이 쓰이지 안을 정도로 괜찮다. 미치 집에서 저녁 7시에 식사약속이 잡혔으니 오늘은 부득이하게 이 마을에서 1박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애니 집으로 향하는 중이다. 처음 애니 집에 방문했을 때 창문에 써 붙여진 ‘월세방 있음’ 광고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멜라니는 애니 집 현관문 앞에서 오른손으로 초인종을 누른다. 왼손에는 핸드백 외에 누런 봉지가 들려있다. 오는 길에 잡화점에 들러 잠옷을 구입한 것이다.


낮과는 달리 짙은 카키색 옷을 입은 애니가 나온다. 단지 온몸에 밀착시킨 의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멜라니의 시선이 무심결에 애니의 가슴을 흘끔 지나친다. 애니의 가슴이 불룩해서 육감적인 매력이 뿜어져 나온다. 애니는 같은 여자 입장에서 본능적으로 멜라니에게 경쟁의식이 있을 것이고 여성적인 육체로만 따진다면 자신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하다. 단지 도외지에 사는 여자가 대도시에 사는 여자에게 느끼는 충동적이고 무분별한 열등감과는 전혀 상관없다. 애니도 얼마 전까지는 대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도시 출신 여자에 대해 막연히 시기하고 동경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품는 시골여자는 아니다.

멜라니는 그런 애니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회피한다. 애니의 불룩한 젖무덤과 경쟁의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혹시, 괜찮다면, 하룻밤만 묵어갈 수 있을까요?”


애니는 여자의 직감으로 멜라니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음을 간파한다. 그녀가 멜라니를 특별히 문전박대할 만큼 경계할 이유도 없고 본래 성격이 매몰차거나 결벽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오래 머물지는 않고 하룻밤이라니까 흔쾌히 멜라니의 요청을 수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애니의 마음 한 켠에서는 멜라니와 미치 사이에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하룻밤 숙식은 애니 쪽에서 요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어디선가 새들의 지저귐이 애니의 귓가를 진동시킨다. 애니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수많은 철새 무리들이 제 나름의 포맷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딱히 꼬집어낼 수 없지만 예사롭지 않은 무언가 느껴진다. 수년 동안 이 지방에 거주하면서 봐왔던 새들의 이동 모습과 어딘가 상이하다. 그녀는 무심결에 내뱉는다. “언제까지 이동하려는 거지?”


집안으로 들어가려다 발걸음을 멈춘 멜라니는 혹시 자신에게 한 말인 줄 알고 움찔한다. 그러나 애니의 시선은 하늘의 새들에게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철새 무리가 이동하는 게 뭔 잘못이람. 지들 본능이라 그런 건데.” 애니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새들에게 지껄이는 것 같아 살짝 민망한 느낌이 든다. 새들이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겠어. 멜라니라는 여자가 미치 집을 찾아와서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을 철새들이 이동하는 모습에 투영시킨 애니는 멜라니가 미치에게서 하루속히 떠나버리기를 바라며 새들의 이동을 바라본다.


어느 덧 보데가 만 주변 경관은 땅거미가 물러나며 어두컴컴해진다. 미치 저택의 앞마당에 적막을 깨뜨리는 기계음이 울려 퍼진다.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이 먼지를 날리며 정차한다. 차가운 밤공기가 눈을 부비며 깨어나 뜨거운 엔진을 식혀준다. 멜라니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메이크업을 점검하고 마치 집 현관문으로 향한다.



하얀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밖으로 실내등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 어쩐 일인지 멜라니에겐 그 불빛이 따뜻한 온기로 느껴진다. 현관문 앞에 선 멜라니는 초인종을 누른다. 그러나 집안에선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집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헛간 또는 양계장 쪽에서 세 명의 사람이 멜라니에게 다가온다. 멜라니는 그들이 자신을 잘 알아볼 수 있게 조금 걸어 나가서 인사를 건넨다. 세 사람 중에 어린 아이가 멜라니를 발견하고 폴짝폴짝 뛰어온다. 미치의 여동생 캐시이다. 활기차고 발랄하게 멜라니를 반겨준다.


캐시 뒤에 걸어오는 키 큰 남자는 미치이고 손을 높이 치켜들어 반가움을 표현한다. 반면, 옆에서 나란히 걸어오는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는 무표정하고 건조하고 냉정하게 멜라니를 맞이한다. 어머니의 굳은 표정을 자칫 멜라니가 오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미치는 멜라니에게 먼저 말한다. “양계장의 닭들이 모이를 전혀 먹지 않아서 살펴보고 오는 길입니다. 어머님이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멜라니는 미치의 설명을 들으며 마음 한 켠 서먹한 마음을 누그러트린다.


디아는 아들의 태도에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는다. 비록 미치는 다 큰 아들이라지만, 어떤 여자를 만나는지 조목조목 관심을 두고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미치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통념상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고 어느 순간 선을 그어줘야 하는데 좀처럼 그럴 기회가 없던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리디아는 지금 모이를 먹지 않는 닭들 때문에 그리고 아들이 초대한 사치스러운 상류층 여자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거라고 생각한 미치는 멜라니가 혹시라도 불편한 심기를 느끼지 않도록 평소의 다른 손님을 대할 때보다 의도적으로 친근감 있고 다정하게 대화를 만들어 가고 분위기를 이끌어 가려고 애쓴다. 멜라니는 뭔가 어색하고 불편한 듯 또는 특별한 것 없이 편안한 듯 이중의 감정을 중복해서 혼탁하게 느낀다.


멜라니는 미치의 리드에 의지하여 저택 실내로 들어간다. 아담하고 푸근한 거실, 이미 이곳은 멜라니에게 완전히 낯설지는 않다. 몇 시간 전에 잉꼬를 몰래 가져다 놓을 때 넌지시 둘러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찬찬히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비록 리디아가 살갑거나 다정한 성격도 아니고 집안을 그렇게 매력적이거나 인상적으로 꾸민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분위기를 충실히 따르는 온화하고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인테리어를 구성했다고 멜라니는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쩌면 리디아의 본래 성격은 지금처럼 냉정하고 무뚝뚝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해본다.


미치는 멜라니의 밍크코트와 스카프를 받아주며 젠틀하고 다정하게 손님 접대를 제대로 해준다. 반면, 리디아는 다짜고짜 거실 한 켠에 비치된 전화기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고 다급하게 다이얼을 돌린다. 닭 모이를 구입한 상점의 주인 ‘프레드’한테 전화를 걸어 닭들이 전혀 아프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모이를 전혀 먹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프레드는 다른 손님한테도 똑같은 모이를 많이 팔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모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며 반박한다. 다만, 다른 회사에서 만든 모이를 구입한 ‘댄 포셋’ 씨의 닭들도 오후부터 모이를 전혀 안 먹는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댄 포셋 씨는 미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이웃사촌이다. 리디아는 조만간 댄 포셋 씨의 집을 방문해서 닭 모이에 관해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아픈 데도 없는 닭들이 모이를 전혀 먹지 않는 일은 이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매우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리디아의 온 정신은 사료를 먹지 않는 닭들에게 쏠려있는 듯하다. 멜라니는 그런 리디아가 이해는 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섭섭함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고 떨쳐버리려 하며 미치의 소탈하고 다정한 친절에 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한편, 평일 동안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업으로 변호사 일을 하느라 바쁜 미치가 홀몸으로 농사일을 하며 생활하는 어머니 리디아의 마음을 속 깊게 헤아리지는 못할 것이다. 미치는 닭들이 하루 이틀 그러다 정상으로 되돌아오겠거니 예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단지 습관적으로 바람직한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을 뿐인데 자칫 무사태평한 안일주의로 폄하될 수도 있는 성격이지만, 멜라니는 미치의 그런 면을 좋게 생각하며 매료되고 있는 편이다. 그녀는 평소 비관적인 것보다 낙관적인 사고를 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편이다.


미치의 일방적인 의지에 의한 초대와 멜라니의 묵비권적인 수용으로 이뤄진, 멜라니가 초대된 미치 가족의 저녁식사는 오붓하고 즐겁고 행복했다. 리디아의 요리 솜씨는 냉랭하고 근엄한 표정과는 정반대로 두 말할 필요 없이 훌륭했기에 멜라니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식사 후 벽난로의 장작불로 온기 가득한 거실에는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멜로디가 채워진다. 멜라니가 피아노 소품을 연주하는 중이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이란 곡이다. 그녀가 이런 고상한 클래식 음악을 전문적으로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자신을 우아하고 지적이게 치장할 유용한 음악을 몇 개 정도 구비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요긴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이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으며 오늘도 자신의 사소한 준비성에 만족한다. 피아노 건반 위를 움직이는 멜라니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그녀의 담배 연기를 타고 거실을 넘어 집안 곳곳으로 이동하며 흩어진다. 담배 연기처럼 그녀의 실체는 본의 아니게 이 집안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피아노가 놓은 벽 위에는 마치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미치의 아버지 초상화가 걸려 있다. 비록 육신은 떠났지만 여전히 이 집안을 항상 지켜보면서 동고동락하고 있으니 허튼수작 말라는 수호신의 눈빛을 하고 있다. 몇 시간 전 멜라니가 몰래 침입해서 잉꼬를 놓고 갔을 때 미치의 아버지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을 것이다. 멜라니는 적어도 눈빛만으로는 자신의 연주를 주의깊에 경청하는 미치의 아버지 면전에서 더욱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피아노 선율에 담아서 연주한다. 미치의 아버지는 멜라니를 며느리로서 흡족해한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띠며 감상에 젖는다.


미치의 여동생 캐시는 피아노 옆에 서서 멜라니의 말벗이 되어준다. 문뜩 미치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는 일에 관하여 거침없이 풀어낸다. 미치가 변호했던 피의자 신분의 어떤 남편이 아내의 머리에 총으로 여섯 발이나 쏴서 죽였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아내가 남편이 야구경기를 보고 있던 텔레비전 채널을 바꿨기 때문이었다는 반인륜적인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듯이 들려준다. 멜라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캐시의 이야기에 애들의 눈높이로 반응해준다. 캐시는 멜라니를 마음에 들어 한다. 아름답고 이지적이고 도시적인 외모, 자신에게 살갑고 다정하게 대화해준다. 어머니 리디아나 오빠 미치에게서 받아보지 못했던 진하고 달콤한 애정이다. 그래서 캐시는 내일 낮에 친구를 위한 서프라이즈 생일파티를 하는데 멜라니에게 참석해달라고 영특하게 애원한다. 멜라니는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가야 한다며 미안하다고 대답한다.


멜라니의 피아노 연주와 캐시의 법률 사건 이야기가 뒤섞여 꽃을 피우는 동안 리디아와 미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어머니는 기회를 보다가 마침내 아들에게 멜라니를 알게 된 경위를 묻는다. 아들은 애완동물상점의 에피소드를 많은 부분 생략하고 짧게 줄인 핵심만을 말한다. 어머니는 좀더 캐내려 노력하지만 아들은 어머니가 기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만류한다. 어머니는 신문지상을 통해 멜라니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풀어놓는다. 아들도 멜라니가 유력한 샌프란시스코 신문사 공동대표의 딸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멜라니가 지난여름에 로마로 여행 갔을 때 알몸으로 유서 깊은 분수대에 뛰어든 가십기사를 얘기하며 내심 아들이 멜라니에게 홀딱 반해서 분별력과 판단력을 그르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심사숙고해서 현명하게 판단하라고 충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아들은 어머니의 의중을 눈치 채고 있으나 자신의 여자는 자신이 알아서 잘 선택하겠다고 단언하고 어머니의 볼에 다정하게 키스를 건넨다. 어머니는 아들의 의중을 헤아려서 더 이상 멜라니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수많은 별들이 깊이 잠든 캄캄한 밤을 헤집고 나와 반짝반짝 춤출 때, 멜라니는 미치의 저택을 나선다. 미치가 멜라니의 애스턴마틴까지 다정하게 배웅한다. 멜라니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고 할 때 미치가 말한다. “조만간 다시 만나서 수영이나 같이 하면 어떨까요?”


멜라니가 미치의 뜬금없는 수영 얘기가 무슨 의미인지를 간파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멜라니는 마음을 추스르고 미소를 잃지 않는다. “지난여름 로마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가십기사는 사실과 많이 달라요. 저는 단지 누군가에게 떠밀려 분수대에 빠졌을 뿐이죠. 그래서 실제로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버지 신문사와 경쟁하고 있던 신문사가 알못이었다고 거짓기사를 발표한 겁니다.”


미치는 변호사 직업에서 우러나오는 몇 마디 질문을 던지고 멜라니는 마치 거짓말을 한 사람이라도 된 듯이 궁지에 몰려버린다. 멜라니는 속이 끓어 올랐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미치의 감정과 표정은 별다른 변화 없이 차분하고 다정하다. 비록 내심은 아닐지 몰라도 겉으로는 들어내지 않는다. “다시 또 만날 날이 기대됩니다.”

그러나 멜라니의 시선은 그를 외면하고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속도가 붙어있다. “글쎄요. 그날이 올 거라 단정 짓지는 말아요.” 멜라니는 힘차게 운전대를 돌려 미치의 집을 떠난다.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멀리 사라지는 멜라니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면 미치는 대뜸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다. 길게 늘어선 전봇대의 전선 위에 수많은 까마귀들이 촘촘히 줄을 지어 앉아있는 것이다. 이런 기괴한 광경은 처음 본다. 불과 두세 시간 전에 양계장에 들렀다 나올 때만 해도 전혀 이렇지 않았었기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미치는 당장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심란했던 생각을 떨쳐버리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멜라니는 애니의 집으로 돌아온다. 애니는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애니의 거실 겸 서재는 혼자 사는 여자답게 소박하고 아담하면서 곳곳에 세련미가 돋보인다. 눈에 띄는 점은 유명한 현대 화가들의 복사본 그림들이 심심찮게 걸려 있다는 점이다. 모딜리아니의 창백하고 일그러진 인물화는 애니의 삶이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내적으로 평탄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듯하다.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의 갓등과 컬러풀한 색상에 현대적인 디자인의 책표지가 즐비하게 정렬해 있는 책장과 책상은 그녀가 원래 이 시골마을의 토박이가 아니라 대도시에서 이주했음을 시사한다.


멜라니의 기운은 다소 침체되어 있다. 오늘 하루 내내 평생에 한 번 겪을까말까 한 굵직한 일들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금 전 미치와 말다툼을 벌이고 헤어진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기 때문이다. 좀더 냉정하고 차분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맴돈다.


애니가 브랜디를 가져와 기진맥진한 멜라니에게 따라주고 자신의 잔에도 리필한다. 애니가 미치와 그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꺼내려 하자 멜라니는 다른 얘기를 했으면 하는 내색을 비춘다. 브랜디를 음미하듯 들이킨 애니는 자신에 관한 소사를 솔직하게 들려준다. 그중 멜라니에게 중요하게 인지된 내용은, 애니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 보데가 베이 마을까지 굳이 이주해서 살고 있는 이유는 예전 남자친구였던 미치의 곁에 머물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4년 전, 애니와 미치는 연인사이였다.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미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심적으로 외적으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리디아는 이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나 다름없는 아들 미치에게 기대하고 의지하고 바라는 것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애니와 미치가 열정적이고 순수하게 사랑에 빠져서 현실의 시간과 별개로 사는 것이 아무래도 순탄하게 진행될 리가 없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는 연인관계가 청산된 사이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사이로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애니는 겉보기에 강인하고 자립적인 여인상과는 반대로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미치와 다시 연인사이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해피엔딩으로 완성되지 못한 애니의 러브스토리를 들은 멜라니는 같은 여자로서 그녀의 선택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존중하지만 자신이라면 결코 애니처럼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두 여자의 수다가 브랜디의 취기를 머금고 실타래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애니의 책상에 놓여있는 전화기의 벨이 울린다. 애니가 받아보니 미치한테서 걸려온 통화였다. 애니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멜라니와 통화하고 싶어서였다. 애니는 같은 지역주민이고 캐시의 담임교사 입장에서 공적인 어조로 미치와 짧게 통화하고 멜라니를 바꿔준다.


멜라니는 미치가 무슨 이유로 무슨 할 말이 있길래 밤늦게 전화를 했을 지 몹시 궁금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수화기 저편으로 귀 기울인다. 미치는 멜라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좀 전에 있었던 언쟁에 관하여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한다. 그리고 내일 캐시와 친구들이 미치의 집 뒷마당에서 서프라이즈 생일파티를 하는데 꼭 참석해주길 바란다며 초대한다.


원래대로라면 멜라니는 내일 아침 곧장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방금 애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알게 모르게 애니와 경쟁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미치를 놓고 애니와 자신이 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그냥 이대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다면 미치와의 어색한 관계가 풀어지지 못해서 다시 만나기 껄끄러워질 것이고 잉꼬를 들고 먼 곳까지 찾아와 방문한 의미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진득하게 미치의 사랑이 복귀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니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하루 정도 더 머물면서 미치와 좀더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하고 내일 캐시의 서프라이즈 생일파티 초대를 수락한다.


멜라니는 캐시의 파티에 참석하는 것과 관련하여 리디아의 허락을 받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애니의 의견을 구한다. 애니는 쿨하게 자신의 생각을 내놓는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리디아는 상관하지 말고 미치를 만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제가 만약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러겠어요.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멜라니는 비록 애니와 짧은 시간 동안의 만남이지만 오붓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친절하고 괜찮은 여자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애니를 놓친 미치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만약 미치였다면 어떻게든 애니를 잡았을텐데...' 라고 애니는 생각하며 동시에 ‘어쩌면 나와 연결되기 위한 부득이한 과정일 뿐이었을 지도 몰라.’ 라는 생각도 이어졌다. 더불어, 오늘 굳이 시간을 내서 미치 가족을 방문한 것이 헛된 시간낭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뿌듯하다는 스스로의 만족을 느낀다.


멜라니는 잡화점에서 구입한 잠옷을 애니에게 보여주고 두 여자는 평범한 여자들이 일상적으로 그러듯이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품평을 나눈다. 왈가닥 소녀처럼 또는 요조숙녀처럼 또는 억척스런 아줌마처럼 두 여인은 연적이라는 관계를 떠나 일상적인 잡담을 나누며 깔깔대며 웃음을 주고받는다. 이 순간 두 여자가 여고생 단짝처럼 좀더 친근해지는 분위기로 변화된 것은 미치와의 전화통화가 적잖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그때 느닷없이 현관문을 강하게 때리는 파열음이 들린다. 누가 늦은 밤에 문을 두드리는 걸까? 초인종을 못 본 것일까?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전혀 없는데. 애니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어본다. 아무도 없다. 그런데 바닥에 새 한 마리가 쓰러져 죽어 있다. 살펴보니 새는 현관문에 강하게 부딪쳐 죽은 것이다. 어두운 밤이지만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어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새들은 단지 시각에만 의존해서 비행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 왜 이 새는 현관문에 충돌해서 죽었을까?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곁에 있던 멜라니도 뒤숭숭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리디아의 양계장의 닭들이 모이를 전혀 먹지 않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머리를 부리로 공격한 갈매기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새들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애니와 멜라니는 현관문에 부딪쳐 죽은 새 앞에서 물끄러미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는다.



다음날, 캐시와 친구들의 서프라이즈 생일파티가 미치의 집 뒷마당에서 성황리에 열린다. 파티장 주변에는 언뜻 보면 남자의 성기가 연상되는 길쭉하고 둥글둥글한 풍선이 알록달록하게 매달려 있다. 파티장에는 여러 명의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참석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다. 애니는 학생들을 이끌고 재밌는 게임을 진행한다. 리디아는 음료수와 케이크와 다과를 날라주며 분주하게 파티장을 오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애니와 리디아는 흘끔흘끔 미치와 멜라니의 동태를 관심있게 살펴본다.


아이들의 생기발랄하고 활기찬 웃음으로 왁자지껄한 파티장을 뒤로 한 채 미치는 마티니 한 병과 유리잔을 두 개 들고 멜라니를 동행하여 동산의 언덕 위로 올라간다. 그곳은 보데가 만을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명당이다. 미치는 멜라니에게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뒷마당의 리디아와 애니는 언덕 위에서 다정하게 마주보며 대화하고 있는 미치와 멜라니를 각자 자신만의 사념이 개입된 시선으로 관찰하곤 한다.


미치는 멜라니에게 투명한 마티니를 따라준다. 두 사람은 건배하고 홀짝이며 입술을 달콤하게 적신다. 촉촉하게 녹아든 두 사람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미치는 금수저인 멜라니의 일상이란 마냥 한가롭게 유흥이나 즐기며 무료한 나날을 어떻게 하면 덜 지루하게 보낼 지를 고민하는 삶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의외였다. 적어도 멜라니의 말에 의하면 그런 미치의 예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멜라니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나름 의미와 목표가 있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여행자를 돕는 일을 하고, 대학교에서 언어론 관련 강의를 듣고, 한국인 학생의 장학금 마련도 돕는다.


한편, 멜라니가 엊그제 애완동물센터에서 구관조를 구입한 것은 고지식하고 엄격한 고모를 골탕먹이기 위해서였다. 구관조에게 모욕적인 말이나 쌍욕을 가르쳐서 고모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붉으락푸르락 당혹스러워하는 고모의 얼굴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짜릿한 쾌감이 몰려온다. 멜라니는 11살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한 맺힌 불만을 고모에게 화풀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누군가 그것을 지적해준다고 해서 멜라니가 곧바로 마음을 돌려 고모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대할지는 확실치 않다. 멜라니는 돌연히, 어머니가 기억됨으로 해서 감정적으로 우울해지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상황을 모면하려고 언덕을 내려와 파티장으로 향한다. 미치는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뒤따라 언덕을 내려간다. 나란히 전망 좋은 언덕을 내려오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의지의 시선으로 애니와 리디아가 흘끔 살펴본다.



애니의 지도 하에 캐시와 아이들은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 수건으로 두 눈을 꽁꽁 가린 캐시는 두 팔로 사방을 휘저으며 엉금엉금 걷고 있고 아이들은 깔깔대며 주변을 맴돌면서 회피한다. 아이들의 화기애애한 즐거움과 행복의 웃음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상공을 날던 갈매기 한 마리가 쏜살같이 곤두박질쳐서 눈을 가린 채 허우적대는 캐시의 머리를 때리고 다시 하늘로 치솟는다. 캐시는 전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 중 누군가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웃음을 잃지 않고 계속 양팔을 휘저으며 엉거주춤 걷는다. 좀 전의 그 갈매기인지 다른 갈매기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다시 활강해서 다른 남자 아이를 공격한다. 다행히 남자 아이는 운동신경이 있었던지 본능적으로 민첩하게 고개를 푹 숙여서 다치지는 않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마리의 갈매기들이 일제히 아이들을 향해 활강하여 공격한다. 아이들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애니는 가장 먼저 캐시의 허리를 끌어안고 넘어뜨려서 새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 순식간에 파티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학부모들은 뛰쳐나가 아이들을 끌어안고 집안으로 대피시킨다. 언덕을 내려와 파티장에 다다른 애니와 리디아도 공격하는 갈매기를 피하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을 집안으로 피신시킨다. 미치와 멜라니도 아이들을 구조해서 집안으로 데려간다.


다행히 전원 무사하다. 찰과상 정도로 다친 아이는 있지만 당장 병원으로 이송해야할 정도로 심하게 다친 아이는 없다. 사람들은 이런 기이한 사건은 생전 처음 겪는다며 당혹스러워 한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의 새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한 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여러 학부모들은 각자 자신의 자녀가 무사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다.

미치는 잠시 후 샌프란시스코로 떠날 예정이었던 멜라니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마음이 진정되었을 때 출발하라고 당부한다. 멜라니는 특별히 반대할 이유를 떠올리지 못하고 그렇게 하기로 한다.


학부모들은 각자의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미치 가족도 멜라니를 동행하여 집안으로 들어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간단히 저녁을 차려 먹는다. 캐시는 잉꼬가 유난히 카랑카랑하게 울어대는 게 이상하다며 걱정한다. 그러나 미치와 리디아와 멜라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의도치 않게 말을 아끼고 음식을 입에 넣는 둥 마는 둥 형식적으로 저녁을 먹는다.


식욕과 입맛을 망각한 듯이 음식을 씹던 멜라니는 문뜩 벽난로에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한다. 아직 불이 지펴지지 않은 장작더미 앞에 참새 같은 새 한 마리가 두리번거리며 서성이고 있다. 멜라니가 미치에게 말해주려는 순간 찢어질 듯한 요란한 굉음이 집안에 울려 퍼진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벽난로의 굴뚝을 타고 수많은 새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미치의 집안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이번에는 몇 시간 전에 아이들을 공격했던 갈매기들이 아니다. 참새나 메추리인 것 같고 다른 새들도 섞여있다. 수많은 새 떼가 굴뚝을 통해서 미치 집안으로 들어와 미치 가족과 멜라니를 공격하고 집안을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는다. 미친 갈매기들의 공격을 피신해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저녁을 먹고 쉬려고 했건만 난데없이 침입한 새들에게 저녁식사 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인다.


멜라니는 소파에서 캐시를 꼭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공포에 질린 리디아는 구석진 곳에서 고개를 숙이고 양팔로 머리 위를 휘젓는다. 미치는 현명하게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을 처리한다. 작은 테이블을 끌어서 벽난로를 막아놓는다. 더 이상 새들이 유입되는 것을 막아놓은 것이다. 다음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서 새들을 밖으로 쫓아낸다. 다소 새들이 줄어들자 멜라니는 리디아와 캐시를 이끌고 옆방으로 들어가 새 떼의 공격을 피한다.


미치의 기민하고 현명한 대처로 오래지 않아 난폭한 새들은 모두 집밖으로 날아가 버리고 사태는 진정된다. 집안 여지저기에 집기류들이 부서져서 널브러져 있어서 난장판과 쑥대밭이 따로 없다.



미치는 밤이 한참 깊었지만 보안관을 불러서 직접 집안을 살펴보게 한다. 그러나 보안관은 새들이 공격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의 오랜 경력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사건을 신고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눈치다. 밝혀지지 않은 다른 뭔가가 있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지 다각도로 추리해볼 뿐이다. 미치는 고사하고 멜라니, 리디아, 캐시가 아무리 사실 그대로를 증언해도 보안관은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으려 하지 않는다.


리디아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진 찻잔을 수거하며 비통한 감정을 추스른다. 비뚤어진 남편 초상화를 똑바로 정돈하는데 죽은 새가 떨어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멜라니는 캐시를 재워주겠다며 자리를 뜬다. 그리고 밤이 너무 깊었으니 내일 출발하겠다고 한다. 미치는 스쳐지나가듯이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멜라니는 이층 방에서 난생 처음 겪은 공포의 여운 때문인지 또는 타인의 집이라서인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에야 겨우 눈을 붙였고 점심에 가까운 아침에 깨어난다.


자신의 얼굴보다 조금 큰 원형 벽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고 있을 때 창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리디아가 미치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 있다. “캐시를 등교시키고 올게.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닭이 모이를 먹지 않는다고 했던 댄 포셋 씨 집에 들렀다 올게.” 멜라니가 아직 화장을 끝내지 않은 얼굴로 창문을 열어보니 리디아가 캐시를 트럭에 태우고 마을을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 앞마당에서 좀 떨어진 공터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곳에서 미치가 무언가를 불태우고 있다. 아마도 생활 쓰레기와 어제 파손된 집기류들 그리고 새들의 시체일 것이다. 지금 이 저택에는 미치만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멜라니는 서둘러 화장을 한다.



캐시를 학교에 등교시켜준 리디아는 곧바로 댄 포셋의 농가로 향한다. 모이를 먹지 않는 닭들의 실태에 대해서 매우 궁금하다. 리디아의 트럭은 한가로운 전원풍경을 가로지른 지평선과 평행으로 달린다. 비포장도로라 차체가 심하게 덜컹거리고 먼지가 많이 날리는 편이지만 리디아에겐 너무 익숙하고 친숙하다. 댄 포셋 씨와는 어려울 때 돕고 사는 이웃사촌이라 종종 방문하기 때문에 평탄하지 않은 도로라도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리디아의 트럭은 댄 포셋 집의 널널한 앞마당에 대충 정차한다. 마침 인부가 농기계를 점검하고 작업준비를 하고 있길래 댄 포셋 씨가 집에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오늘 아침에는 아직 못 봤지만 아마도 집안에 있지 않겠냐고 대답한다.


리디아는 댄 포셋 집으로 걸어간다. 아담하고 소박한 규모의 주택이다. 미치의 저택과 비교하자면 단층이고 면적도 좁지만 혼자 사는 댄 포셋에게는 충분히 넉넉하다. 리디아의 입장에서 그는 이웃사촌이면서 동시에 혼자 사는 노인네라서 같이 늙어가는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친구처럼 말벗이 되어주고 농사일을 상의하며 지낸다. 무엇보다 댄 포셋은 남편을 사별한 리디아가 부득이하게 육체노동이 필요한 경우에 가장 먼저 찾고 의지하는 남자이다. 리디아에겐 건장한 아들 미치가 있지만 그는 주중에는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고 주말에만 방문할 뿐이라 평일에는 미치의 육체노동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리디아가 현관문을 노크해보지만 응답하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그녀는 그냥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이웃이다. 집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댄! 집에 있어요? 저에요. 리디아.” 그러나 집안 어느 구석에서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 리디아는 거실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서 발걸음을 멈춘다. 거실의 선반에 걸려 있던 커피잔 여러 개가 모두 깨져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다. 혹시 새들이... 리디아는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며 떨쳐내려 애쓴다. 그렇다고 정오가 가까운 이 시간에 댄 포셋 씨가 아직도 늦잠을 자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가 게으르거나 나태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리디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리디아는 거실을 지나서 방들이 있는 복도를 걷는다. 서너 개의 방문들이 보인다. 어느 방이 댄 포셋 씨의 침실일까? 리디아도 그것까지는 잘 모른다. 종종 방문했지만 거실과 부엌에서 대화를 나눌 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침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마침 문이 조금 열려 있는 방이 있어서 리디아는 들어가 본다. 홀애비 독거노인이라 어쩔 수 없는지 쾌쾌한 냄새가 나는 아담한 침실이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그런데 방바닥 여지저기 온갖 집기들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다. 화창한 햇살이 비추는 창문은 깨지고 갈라져있는데 갈매기 한 마리가 비집고 침입하려고 애쓰다가 유리에 낀 채로 죽었다. 벽에는 파손된 그림들이 비뚤비뚤 걸려 있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어야 할 책들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여기저기 새들의 시체와 깃털들이 흩어져 있다. 침대 위는 헝클어져 있고 누워있는 사람은 없다.


리디아는 사방을 좀더 자세히 둘러보다가 침대 옆으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잠옷 차림인데 여기저기 찢어지고 할퀸 자국이 있고 그 틈으로 붉은 피가 흘러나와서 검붉게 굳어있다. 리디아는 솟아오르는 놀라움과 공포를 억누르며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살펴본다. 댄 포셋이다. 그의 얼굴은 할퀸 자국으로 흉측한 몰골이 되었다. 게다가 두 눈은 검붉고 가운데는 시커멓다. 끝이 보이지 않는 칠흑의 우물 같다. 우물 속에 블랙홀이 숨어 있어 호시탐탐 리디아를 빨아들일 기회를 엿보는 것 같다. 새들이 댄 포셋의 두 눈동자를 파먹었고 그 자리에는 암흑이 들어차 있다.


리디아는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 한다. 숨을 헐떡이며 비틀비틀 참혹한 현장을 빠져나온다. 복도를 지날 때 핸드백을 떨어뜨린 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다. 앞마당에서 일할 준비를 하고 있던 인부에게도 아무런 말을 못 한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자신의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있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댄 포셋 농가의 한가로운 전원풍경을 깨부수는 우레와 같은 기계음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진다. 리디아가 운전하는 트럭의 엔진 굉음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비포장도로의 먼지구름 속에 천둥처럼 메아리친다.



리디아의 트럭이 집에 도착할 쯤 미치와 멜라니는 앞마당에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리디아는 트럭을 급박하게 정차하고 차문을 열고 휘청거리며 내린다. 미치와 멜라니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을 직감하고 굳은 표정이 되어 리디아에게 달려간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리디아는 여전히 일시적인 실어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한다. 호기심과 걱정으로 가득 찬 미치와 멜라니를 뿌리치고 흐느껴 울며 허겁지겁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곧바로 침대에 눕는다. 미치와 멜라니는 리디아를 뒤따라간다.



멜라니는 몸져누운 리디아를 위로하기 위해 따뜻한 홍차를 끓이며 부엌을 서성인다. 미치가 다가와 보안관이 댓 포셋 집으로 와달라고 해서 가봐야겠다고 한다. 멜라니는 다정한 시선으로 미치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자신이 잘 보살피고 있겠다고 안심시킨다. 어느덧 미치와 멜라니 사이에 고난과 역경을 함께 극복한 전우애가 흐르는 듯하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이로 발전하려는 기미가 엿보인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가 주도했다고 판정할 수 없이 멜라니와 미치는 안부의 키스를 주고받는다. 진한 애정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처음으로 나눈 키스라서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즉흥적으로 솔직한 감정에서 우러나왔지만 각자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더 깊게 빠져들어서는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인지하고 있다. 어렴풋이 짧은 어색함이 맴돌기 시작하는데 미치가 먼저 나서서 활기찬 동작으로 밖으로 나간다. 멜라니는 따뜻한 홍차를 조심스럽게 티트레이에 옮겨놓으며 그녀 측에서 생성된 작은 어색함을 떨쳐낸다. 평소의 호흡으로 되돌아온 멜라니는 티트레이를 들고 리디아의 방으로 향한다.



리디아는 자신의 침대에 올라가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멜라니가 마련해준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아간다. 이제 멜라니가 이전과는 다르게 보인다. 언론에 보도된 로마의 관광지역 어떤 분수대에서 무분별하게 행동했던 부유층 2세라는 선입견이 기억의 안개 속 저편으로 멀어져 보일 듯 말 듯하다. 과거에 어쨌거나 현재는 아들과 교제를 진행하고 있으니 색안경을 쓰고 미리 판단할 것이 아니라 좀더 여러 가지를 지켜보자고 마음을 새롭게 다지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홍차를 달콤하게 홀짝인다.


요사이 안 좋은 일들이 연이어 닥쳐왔고 오늘은 큰 충격을 당해서 그런지 몰라도 문뜩 4년 전에 사별한 남편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사사껀껀 의지되었던 그이가 죽고 나 혼자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가끔씩 편하게 쉴 수 있는 여유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만 한답니다.” 리디아는 지긋이 눈꺼풀을 내리다가 다시 활짝 뜬다. “캐시! 캐시가 괜찮을까요?” 곁에 있던 멜라니는 침착하고 다정하게 리디아를 대한다. “애니가 있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괜찮을 거예요.” 리디아의 표정은 다소 온화해진다.


멜라니가 방안을 둘러보는데 벽쪽에 세워져 있는 작은 사진들이 시선을 붙든다. 세 명의 아이들의 사진들이다. 그런 멜라니를 본 리디아는 또 다른 회상에 잠긴다. “아직 아기였던 프랭크가 죽었을 때, 그이는 남아있는 애들의 마음을 잘 헤아렸어요. 애들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재능이 그때부터 생겼거든요. 그건 아주 특별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도 그이처럼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오늘따라 그이가 그립네요.” 리디아는 홍차를 마시며 먼 곳에 시선의 초점을 맞춘 듯 멍한 눈빛이 된다. “요즘도 가끔 아침에 깨어나자 마자 ‘프랭크가 먹을 아침을 만들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다가 현실을 깨달아요... 그이랑 대화하던 순간들이 아련하게 떠오르는군요. 지금은, 캐시는 아직 애이고 미치는 다 커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바쁘죠. 그래도 오늘 미치가 집에 같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오.”

멜라니는 리디아가 덮고 있는 담요를 고르게 만져준다. “이제 좀 푹 쉬세요.” 리디아는 멜라니의 시선을 붙잡는다. “아니. 아직이요. 아가씨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요.” 멜라니가 왜 그런지 묻자 리디아는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대답한다. “아들이 아가씨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아직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아가씨가 좋은지 싫은지조차 잘 모르겠어요.”


멜라니는 침대 곁에서 창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제가 좋은지 싫은지가 중요한가보죠?” 리디아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물론이죠. 미치는 내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니까요. 미치가 선택한 여자가 내 맘에도 들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멜라니는 리디아의 침대로 되돌아간다. “만약 맘에 안 드시는 여자라면요?” 리디아는 시선을 떨구며 한숨을 내쉰다. “어차피 미치는 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요. 뭘.” 멜라니는 고개를 저으며 미치는 어머니를 중요하게 생각할거라고 말해준다. 리디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미치는 늘 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리디아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가 촉촉해진다.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아요. 너무 비참하고 참담한 심정이라 상상조차 하기 싫군요.” 리디아는 울상이 된 얼굴을 양손에 파묻는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미안해요...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미친 새들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오늘 미치가 없었다면 나 혼자 얼마나 망막했을지...”

멜라니는 침대 위의 티트레이를 치워주고 리디아를 편안하게 눕혀준다. 머리를 베개에 아늑하게 기댄 리디아는 멜라니를 바라본다. “캐시가 정말 학교에서 괜찮을까요?” 멜라니는 잠깐 생각하고 대답한다. “제가 가서 데려오면 어떨까요?”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전 정말 괜찮아요.” “그럼... 그래줄 수 있겠어요? 그래준다면야 한결 마음이 놓일 거예요.” 리디아의 표정은 밝아지고 멜라니는 믿음직스런 미소로 화답한다. “지금 다녀올게요. 푹 쉬고 계세요.” 멜라니가 티트레이를 들고 방을 나서는데 등 뒤로 리디아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멜라니.” 멜라니는 뒤돌아서고, 리디아는 미소를 보낸다. “따뜻한 홍차 정말 고마웠어요.” 멜라니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려서 응답하고, 리디아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한다.



멜라니는 애스턴마틴을 몰고 캐시가 등교한 보데가 베이 학교로 향한다. 학교 앞에 도착해서 차를 세운다. 아이들이 합창하는 노래가 학교 밖으로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다. 세련미와 정교함은 밋밋한 회색 외벽의 학교 건물만큼이나 떨어지지만 순수한 열정의 외침이 넘쳐나는 합창이다.


멜라니는 학교로 들어가서 교실 뒷문을 열어본다. 교단 한가운데 위엄 있게 서 있는 애니가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은 애니의 지휘에 따라 햇병아리처럼 쾌활하게 합창을 한다. 간간히 합창인지 외침인지 분간하기 힘들 때도 있다. 노래의 가사는 어떤 순박한 시골 여인의 결혼생활을 다룬 내용인 듯하다. 멜로디는 아이들이 합창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매우 동요스럽고 흥이 난다.


멜라니는 자신을 알아보고 시선을 마주친 애니에게 뭐라고 묻는다.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합창 또는 외침 때문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애니는 십중팔구 감을 잡는다. ‘수업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나요?’ 라고 물었을 거라고 짐작한 애니는 목에 걸고 있던 시계를 흘끔 내려다보고 멜라니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세워서 보여준다. 또한 멜라니도 대충 감을 잡는다. “20분 정도 남았어요.” 라고 대답한 것이리라. 멜라니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학교를 빠져나온다.


학교 정문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맘 편하게 기다릴만한 적당한 장소가 눈에 띄지 않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이들 놀이터가 보여서 그곳으로 걸어간다. 놀이터를 둘러싼 나무 울타리 앞에 떡갈나무로 만든 벤치가 있다. 멜라니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나무 울타리에 등을 기대자 한결 온몸이 편해진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눈동자의 긴장을 풀어준다. 담배 연기 사이로 아이들이 열창하는 합창곡의 가사가 그려지는 듯하다.



리슬티 로슬티 헤이 도니도슬티
니키티 내키티 러스티컬 퀄러티
위로우티 왈로우티 나우 나우 나우

난 아내와 6월에 결혼했네.
달빛을 받으며 아내를 집으로 데려왔지.

아내는 머리를 빗었지. 1년에 딱 한 번
그 빗질 한 번에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네.

아내는 마루를 손으로 훔쳤지. 1년에 딱 한 번
빗자루는 소중해서 쓸 수 없었다네.

아내는 버터를 만들었지. 아버지의 낡은 부츠에
급할 때는 발로 밟고 했지.
버터는 완성되었네. 거무칙칙한 회색으로.

치즈로 말할 것 같으면, 발이 생겨서 달아났지.
아내는 달아나는 치즈를 그냥 내버려뒀다네.

내가 아내에게 마루 좀 닦아달라고 했더니
아내는 내게 모자를 건네며 현관문으로 나가라 했네.

아내와 결혼한 날은 6월 어느 날
달빛을 받으며 아내를 집으로 데려왔다네.

리슬티 로슬티 헤이 도니도슬티
니키티 내키티 러스티컬 퀄러티
윌로우티 왈로우티 나우 나우 나우



멜라니의 등 뒤로 그러니까 놀이터의 중앙에는 정글짐이 있다. 마치는 그녀를 의식하고 그러는 듯이 새까만 새 한 마리가 조용히 날아와 정글짐에 내려와 앉는다. 곧바로 다른 한 마리가 뒤쫓아 정글짐의 어디에 자리를 잡는다. 차근차근 느릿느릿. 어느 덧 정글짐은 날아온 새까만 새들로 인하여 헬륨가스를 주입한 검은 색깔의 애드벌룬처럼 덩치가 부풀어 오른다.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멜라니는 푸석한 담배연기를 연거푸 내뿜으며 빨리 수업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합창곡은 생동감을 잃을 줄 모른다. 정글짐에는 새까만 새들로 빼곡히 북새통을 이룬다. 더 이상 비집고 들어앉을 틈이 없을 정도다. 초원의 왕자 사자가 남기고 간 앙상한 코끼리 골격의 살점을 뜯어 먹으려고 날아든 시체청소부 대머리 독수리 떼가 따로 없다. 니코틴의 체내 흡수로 멜라니의 감각이 정교해졌기 때문일까? 왠지 뒤통수가 캥기고 꾸르륵꾸르륵 하는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서 날아오는 새까만 새 한 마리의 궤적을 따라 멜라니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칠흑 같은 암흑의 거대한 물체가 짙은 먹구름처럼 꿈틀거린다. 멜라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굳어버린다. 정글짐을 빈틈없이 메운 수많은 새까만 새들이 그녀를 지켜보며 불길한 울부짖음을 내뱉고 있다. 소름 돋고 징그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이 그녀의 온몸에 닭살을 퍼트리고, 그녀는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본 죄인처럼 소금기둥이 된다. 새 떼로부터 백병전을 앞둔 전사들의 전운조차 느껴진다.


멜라니는 가위 눌린 듯이 굳어버린 몸뚱이를 가까스로 움직인다. 그녀의 동작은 평소와 달리 무의식의 영향으로 매우 부자연스럽다. 내지를 수 없는 비명을 입술만 뻐끔거리는 시늉으로 뱉어내며 천천히 그러나 허겁지겁 학교로 피신다.



멜라니가 다시 교실에 들어설 때 수업은 막 끝나는 참이다. 애니는 아이들에게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서 놀아도 괜찮다며 밖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이를 본 멜라니는 애니에게 황급히 달려간다. “빨리 문 닫아요! 어서요!” 애니는 멜라니의 표정과 행동과 어조가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보고 얼떨결에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다. 멜라니는 애니를 창가로 데려가 놀이터를 보라고 가리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새들이 놀이터의 정글짐뿐만 아니라 주택의 지붕과 가로수와 전신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뭣 때문에 저렇게 많은 새들이 몰려든 걸까? 혹시 아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한 걸까? 새들이 학교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애니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애들을 무사히 귀가시키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교단으로 올라가 그저 흥겹게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산만한 주의를 집중시킨다.


“모두 조용! 이제부터 소방훈련을 할 거야. 잘 듣고 따라야 돼. 모두 학교를 나서자마자 아주 조용히 이동하는 거야. 집이 근처인 학생은 곧장 집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언덕을 내려가서 호텔까지 이동한다. 잘 알겠지?” 아이들은 일제히 합창한다. “네. 선생님!” “다시 말하지만, 내가 달리라고 하기 전까진 절대로 소리 내면 안 돼. 달리라고 하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거야. 잘 알겠지?” “네. 선생님!”


애니는 멜라니에게 아이들의 선두에서 이끌어달라고 부탁한다. 애니는 혹시라도 뒤처지는 아이들이 있을까 후방을 맡는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문제가 생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애니는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조용히 이동시킨다.



아이들에게 너무 큰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닐는지. 설령,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수많은 새 떼가 비상식적으로 여기저기 운집해 있는 기괴한 장면과 맞닥뜨리게 되면 극소수의 특별히 담력이 크거나 아애 무신경한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비이성적인 충동이 솟구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대부분은 어른들이라 사태를 직시하고 인내력을 발휘하여 질서 있게 단체행동을 할 테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꼭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 즉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 이비규환으로 치달을 터인데, 얘네들은 초등학생들이라 애초에 침착한 질서정연함을 기대하지 말고 학교 건물 내에 대기하고 있다가 부모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애니는 후회가 막심했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딱히 어느 아이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이들은 학교를 나오자마자 조용히 이동하라는 애니의 지시사항 따위는 까맣게 잊고 또는 일부러 무시하고 전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는데 수많은 아이들의 뛰는 발자국의 합창이 가만히 앉아있던 새까만 새들의 전의를 불태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수많은 새까만 새들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하늘로 치솟는다. 아직 환한 대낮인데 예고 없이 들이닥친 일식처럼 쾌청한 하늘에 검은 커튼이 드리워진다. 새까만 새 떼가 하늘을 뒤덮는다. 온 세상이 빛을 차압당하고 컴컴해진다. 화학물질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서 거무죽죽한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먹구름으로 변한 듯하다. 그 속에서 먹물 같은 우박이 찢어지는 우레를 동반하며 쏟아져 내려오다 새로 변신한 형국이다.


새들이 뛰어가는 아이들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딱딱한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아이들의 머리와 목덜미와 복숭아 같은 피부의 얼굴을 공격한다. 아이들은 공포심과 고통으로 인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내달린다. 아이들의 비명은 더 많은 새들을 불러 모으며 동시에 그 어떤 희열을 새들에게 모이 주듯이 뿌려주는 셈이다. 피로를 극복하며 열정적으로 즐기는 파티 참가자들처럼 새들은 지칠 줄 모르며 기세등등하게 맹렬히 아이들을 공격한다.


아이들은 애니의 지시를 따라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공포를 피하려고 전력을 다해 달린다. 도로는 직선으로 길게 뻗은 내리막길이라 자연스럽게 속도를 낼 수밖에 없어서 아이들에겐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뛰는 속도가 아무리 빨라봐야 창공을 자유롭게 활강하며 달려드는 새들의 공격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어떤 아이들은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다른 아이들은 만신창이가 되거나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달려간다. 이제 보데가 베이 학교 주변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우렁창 합창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새들의 노랫소리와 아이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불협화음처럼 교차되며 울려 퍼진다.



멜라니는 캐시의 손을 꼭 붙잡고 달린다. 캐시의 다른 손은 단짝친구의 손을 붙잡고 이끌고 있다. 갑자기 캐시의 친구가 넘어진다. 캐시는 새들의 공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를 도우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멜라니가 캐시를 뒤따라간다. 멜라니가 캐시의 친구를 일으켜 세우고, 전력을 다 해서 달리려고 하지만 역부족임을 깨닫는다. 다행히 근처에 누군가 주차시켜놓은 빈차를 발견한다. 멜라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차안으로 막무가내로 들어가 위급한 사태를 모면한다. 열려있던 창문을 모두 올려서 새들이 차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제지한다.


새들이 사방에서 차창을 요란하게 부딪쳐대지만 깨지기는 커녕 놈들의 붉은 핏자국만 찍어놓는다. 멜라니와 캐시와 친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멜라니는 부득이하게 포악한 새들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차안에 머무는 편이 가장 안전하겠다고 판단한다. 그녀의 예측대로 새 떼는 오래지않아 뿔뿔이 흩어져 사라진다. 창공은 언제 무자비한 새들의 폭격이 있었냐고 발뺌하듯이 따사로운 햇살을 내리쬘 뿐이다. 아이들에게 벌어진 공포의 사태는 진정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아이들이 전력질주하여 피신한 호텔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학부모들이 찾아와 자신의 아이를 끌어안고 기뻐하며 서둘러 각자의 집으로 떠난다. 애니는 크게 다친 아이가 없어서 천만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또한 멜라니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멜라니도 애니를 리더쉽 있고 열정적이고 좋은 선생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애니의 이런 장점은 멜라니 자신에겐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미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도 두 여자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연인을 찾는데 이런 것을 어느 정도 비중의 잣대로 사용할까? 멜라니는 이런 생각을 해보는 자신을 향해 피식 웃어넘긴다.



멜라니는 캐시를 학교 옆에 있는 애니의 집에 맡겨놓는다. 그리고 애스턴마틴을 몰고 보데가 베이 중심가에 있는 타이즈 식당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신문사 공동창업자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자신이 겪은 기이한 사건에 대해 낫낫이 알려준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무려 수많은 새 떼가 인간을 무자비하게 공격한 사건이 머나 먼 아프리카 오지 또는 아마존 정글도 아니고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도시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마도 곱게 자란 딸이 관심을 끌기 위해 지어낸 말장난 쯤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멜라니가 전화기에 대고 한참 조목조목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인상적인 옷차림의 어떤 할머니가 식당으로 들어온다. 녹색 베레모를 쓰고 젊은 분위기의 복장으로 한껏 멋을 부린 번디 부인이다. 식당 주인에게 지폐를 동전으로 바꾼 번디 부인은 자판기에서 담배를 구입하더니 곧바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는다. 담배가 많이 고팠었나보다. 이 와중에 번디 부인은 본의 아니게 멜라니가 아버지와 통화하는 내용을 엿듣지 않을 수 없었고 새에 관한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술술 풀어낸다. 담배뿐만 아니라 누군가와의 대화도 많이 고팠었나보다.


번디 부인의 새에 관한 지식은 거의 백과사전에 버금간다. 그녀의 지식에 따르면 지구상의 그 어떤 종류의 새 떼도 인간을 의도적으로 공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어쩌다 한두 마리가 매우 특이한 경우에 인간을 공격한 보고는 아주 드물게 있었지만 수많은 새 떼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인간을 공격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까놓고 말해서, 만약 수많은 새들이 하이에나 같다면 인간은 벌써 멸종되었을 지도 모른다며 소탈하게 웃는다.



잠시 후, 미치와 경찰서장이 함께 식당으로 들어온다. 두 사람은 댄 포셋 농가에 들렀다 오는 길이다. 경찰서장은 현장을 직접 눈으로 살펴보고도 오로지 새들의 공격에 의한 사건이라고 단정 짓지 않는다. 누군가 댄 포셋을 살해하고 마치 새들이 공격한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과연 온갖 다양한 사건들을 다뤄 본 경찰다운 추리이다. 자신의 본분에 지나치게 충실해서 탈이지만 그를 비난할 수도 없으리라. 수십 년간 경찰직에 몸담고 산전수전 다 겪어봤지만 새 떼가 인간을 공격해서 살인까지 했다는 사건은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미치는 안타깝고 답답했지만 그로서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미치와 멜라니는 서로를 알아보고 짧은 안부를 주고받는다.


식당손님 중에 선원 차림의 어떤 남자가 미치에게 다가온다. 그는 최근에 갈매기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다고 털어 놓는다. 미치는 그 선원을 매우 반갑게 맞이하며 자신과 생각이 통하는 동지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대책논의를 하자고 제안한다. 선원은 낮술을 마신 김에 심심풀이로 잡담이나 할 요량이었는데 미치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미치는 그런 선원의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서장에게서 채우지 못한 답답함을 낯선 선원을 통해 풀어보자는 심산으로 열정적으로 설득해본다. 그러나 그다지 진전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술 냄새 풍기는 선원에게 열변을 토하는 미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멜라니가 언뜻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간다. 뭔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식당의 커다란 창문 밖으로 교차로가 보이고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주유소가 있다. 이 도시 거주자인 듯한 한 남자가 차를 정차하고 기름을 넣고 있는데 갑자기 갈매기 한 마리가 곤두박질쳐 하강하더니 그 남자의 머리를 후려치고 날아가 버린다. 그 남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이 때문에 바닥에 떨어진 호수에서 휘발유가 콸콸 뿜어져 나와 내리막길로 흘러 내려간다. 그리고 마치 방금 전 갈매기가 포문을 열기라도 한 듯이 여러 마리의 다른 새들도 일제히 저공비행하여 주유소 주변의 사람들을 공격한다.


도로의 경사를 타고 흘러내려간 휘발유는 차로를 가로질러 타이즈 식당 주차장으로 이동한다. 마치 시냇물처럼 흘러내려간 기름을 전혀 못 본 어떤 남자가 막 차를 주차하고 내리면서 담뱃불을 붙이다가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화재가 발생한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다른 차들도 연쇄폭발하고 불길은 순식간에 주유소로 옮겨가더니 폭격이라도 맞은 듯이 큰 폭발음과 함께 먹물 같은 검은 연기를 뿜어낸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화재를 진압하고 다친 사람을 구해주려고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오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수많은 새 떼들이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공격한다. 사람들은 새들의 공격이 워낙에 무차별적이고 거칠어서 각자 제 몸을 피신하기에도 급급할 지경이다. 그나마 남자들은 새들의 거친 공격을 뿌리치며 화재를 진압하고 다친 사람을 구하려고 애쓰지만 여자들은 다시 식당으로 되돌아가 피신한다.


사람들을 따라 식당 밖으로 나왔던 멜라니는 새들의 공격으로 휘청거리다가 식당 앞에 세워져 있던 공중전화 박스로 피신하는데, 유리를 금가게 할 정도로 포악하게 새들이 공격하기 때문에 다시 빠져나올 엄두를 못 내고 갇혀 있는 신세가 된다. 인간이 새들의 의지에 의해 새장 속에 갇힌 꼴이 된 것이다.


보데가 베이 선창장 번화가는 수많은 새 떼들이 아수라장을 만들고, 사람들의 비명과 새들의 히스테릭한 지저귐의 소음은 정신을 뒤집어 놓을 정도이고, 공중전화박스 유리를 깨고 침투하려고 애쓰는 새들이 바로 앞에 어른거리고, 멜라니는 당혹스럽고 공포에 휩싸여 온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진다. 조금 더 충격이 가해진다면 유리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버릴 것 같다. 그러면 새들은 멜라니를 마음껏 갈갈이 쪼고 찢을 것이다. 처음 겪는 낯선 공포로 그녀는 현재 사태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사리분별을 못 하는 지경이다. 당장이라도 기진맥진해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혼비백산한 거리를 창공에서 전쟁의 신이라도 된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갈매기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수많은 새들이 의도적으로 즐기기라도 한다는 듯이 산발적으로 미친 듯이 인간들을 공격한다. 큰 화재로 칠흑 같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새들의 공격으로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허둥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보데가 베이 번화가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위험에 처한 주민들을 돕던 미치가 공중전화박스에 갇힌 멜라니를 뒤늦게 알아본다. 그는 새들의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자신의 신체에 상처를 입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그녀를 구출하여 타이즈 식당으로 피신시킨다.


멜라니는 자칫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는 곤경에 빠진 자신을 구하려고 온몸을 내던진 미치에게 고마움의 감정을 느낀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의존하게 되는 마음이 샘솟는다. 몇 시간 전에 미치의 집 부엌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키스를 하면서 생성된 작은 무엇이 발전해서 구체화되는 과정의 일환일 것이다.


외부와는 전혀 딴판으로 타이즈 식당 안의 공기는 매우 조용하다. 아니 섬뜩할 정도로 정숙하고 고요하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인기척도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미치와 멜라니는 한쪽 구석에 모여서 겁에 질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발견한다.


어린 두 남매를 애지중지 다루던 마을 주민 아줌마가 멜라니에게 다가오더니 원망하는 시선으로 쏘아붙인다. 새 떼가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모두 멜라니의 탓으로 돌리려는 듯이 쏟아낸다. 멜라니가 일종의 마녀라는 것이다.


멜라니는 충동적으로 아줌마의 뺨을 후려친다. 강한 파열음이 울려 퍼지고 싸늘한 정적이 메아리친다. 모여 있던 무리의 다른 여자들은 누구 한 명 나서서 어느 쪽 편을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두 남매의 어머니의 의견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듯이 느껴진다. 그런 껄끄러운 분위기를 감지한 미치는 주저없이 멜라니를 데리고 타이즈 식당을 빠져나온다.


이제 밖은 미친 새들이 사라지고 진정국면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침착하게 협업하여 다친 이웃을 돕고 있다. 미치는 자신의 포드 갤럭시는 주차장에 그대로 세워두고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을 몰고 그녀와 함께 애니의 집으로 향한다. 멜라니가 맡겨 놓은 캐시를 픽업하기 위해서이다.



보데가 베이 학교와 애니의 집으로 향하는 도로의 주변에는 수많은 새들이 휴식이라도 취하는 듯이 앉아있다. 언제 다시 날아올라 인간들을 공격할지 종잡을 수 없다. 이동 중 두 사람은 특별히 말을 하지는 않는다. 각자 스스로 현재 상황을 극복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 같다. 애니의 집에 도착하자, 미치는 멜라니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새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한 걸음으로 애니 집의 현관문으로 향한다. 그런데 현관문 바로 앞에 애니가 쓰러져 있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고 온몸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멜라니는 처참하게 죽은 애니를 보자마자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다.


미치가 애니의 몸을 살펴보지만 이미 싸늘한 주검이었다. 애니의 집안에서 누군가 창문으로 내다보며 흐느껴 울고 있다. 미치의 여동생 캐시이다. 아마도 캐시는 새들에게 공격당하는 애니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딱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공포감으로 인해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파서 흐느껴 눈물만을 흘릴 뿐이다.


미치가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캐시를 안고 정차해 있던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에 태운다. 멜라니의 부탁으로 미치는 애니의 시신을 안고 집안에 들여놓는다. 더 이상 새들의 먹이감이 되거나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신세진 것도 있고 앞으로 좋은 친구사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터라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에 깊은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미치가 옛 연인이었던 애니의 죽음에 대해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내색하지 않는 것에 대해 멜라니는 다소 의아해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미치에게는 지금 이 순간 첩첩산중인 험난한 난관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 지가 훨씬 중대하고 시급한 사안일 것이다. 그가 돌봐야할 사람은 리디아, 캐시, 멜라니 총 세 명이나 되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보면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미치는 멜라니와 캐시를 차에 태우고 수많은 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사히 애니의 집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한다.



얼마 안 있으면 어두운 밤이 찾아온다. 이제까지 정황으로 볼 때 새들이 마냥 잠자코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집으로 돌아온 미치는 모든 창문을 나무판자로 빈틈없이 막는다. 기다란 판자대기를 2층 창문에 대고 못질을 할 때는 마치 로마제정시대에 십자가형을 거행하는 것이 연상된다. 멜라니는 미치의 곁에서 그의 작업을 보조한다. 지금 이 순간의 행동은 마치 멜라니가 이 집의 안주인이라도 된 것 같다. 그녀가 이성적으로 원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얼떨결에 처한 상황과 하게 된 행동은 미치 집안의 새 안주인이 되게끔 이끌어져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다. 어떤 미지의 주술적인 영향력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수많은 새들이 미쳐 날뛰는 것도 그 미지의 힘이 전후를 예견하고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은 아닐까? 만약 그 미지의 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미치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멜라니는 생각해본다.


거실과 부엌에서도 미치는 구석구석 꼼꼼히 점검하고 확인한다. 혹시라도 허술한 곳을 방치하면 미친 새들이 침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벽난로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전처럼 새들이 굴뚝을 타고 침입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미친 새들이라지만 이글이글 타고 있는 고열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는 못할 것이다.


리디아, 캐시, 미치, 멜라니는 거실 소파에 둘러 앉아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는 않지만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위안을 받고 있다. 리디아는 사별한 남편의 초상화 아래 앉아있다. 불확실한 공포에 휩싸인 지금 이 순간 수십 년 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의지하며 동거동락했던 남편이 그립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건장하고 듬직하게 자란 아들 미치가 곁에 있어서 천만다행이지만 남편만큼 의지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은 언젠가 부모의 품을 떠나서 제 가족을 꾸리기 마련이다. 미치도 예외는 아니다. 캐시는 멜라니를 잘 따른다. 멜라니의 품에 안겨 두려움을 달래고 있다. 리디아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멜라니에게서 느낄 것이다.


멜라니의 내면에는 새들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과는 별개로 미치의 집에 친숙함이 생겨났다. 어느 정도 자신의 집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미치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것도 아닌데 너무 앞서가는 것은 아닐까? 현재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냉정하게 되돌아볼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은 아닐 것이다.



미치 가족과 멜라니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전투기의 야간 공습에 떨며 잠 못 이루던 시민들처럼 밤은 깊어지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한다, 그렇게 적막한 밤을 지새우던 어느 순간, 갑자기 새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다. 저택의 전방위에서 집안에 숨어있는 인간의 따뜻한 피냄새를 맡고 침입하려고 온갖 발버둥을 친다. 어떻게 새들이 갑자기 이토록 포악한 맹수로 변해버렸는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준다면 이 상황이 조금 덜 공포스러울지도 모른다.


갑자기 전기가 끊어지고 실내는 어둠에 휩싸인다. 결국, 새들은 미치가 깜빡 놓친 허술한 틈을 뚫고 집안으로 침입해서 미치 가족과 멜라니를 공격한다. 리디아와 캐시와 멜라니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양팔로 새들의 공격을 뿌리친다. 미치는 뚫린 부분을 찾아내서 피땀을 흘리며 보수작업을 한다. 그 와중에 미치의 손은 새의 부리에 쪼여서 붉은 피가 흥건히 흘러내린다. 새들이 문짝을 쫄 때 세로 방향으로 부서진 균열은 마치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에 인디언들이 날카로운 손도끼로 찍어 놓은 자국처럼 느껴진다. 미치는 커다란 진열장을 이동하며 현관문 앞에 가로막아놓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강상태가 된다. 새들의 공격이 잠잠해진 것이다. 놈들도 쉴 시간이 필요했을까? 오늘밤 다시 공격해올까? 아니면 오늘밤은 이것으로 끝일까? 밤은 깊어가고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치 가족과 멜라니는 하나 둘 씩 눈이 감기며 잠들어 버린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육체적 본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언제 잠들었었지? 멜라니의 눈은 슬며서 떠진다. 실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세 사람은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들어 있다. 앞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리디아가 잠들어 있다. 미치는 하얀 붕대를 감은 손을 머리에 대고 잠들어 있다. 소파에 누워서 잠든 캐시에게서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순수함을 읽을 수 있다.


멜라니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이 고요한 적막이 자신을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운명의 장난일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두컴컴한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걸어간다. 자신이 데려온 잉꼬 한 쌍이 인간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심히 지저귀고, 그 고음대의 노래는 부엌의 적막을 파헤치며 흩어진다.


멜라니는 부엌을 되돌아 나오다가 금속성으로 반짝이는 물체에 시선을 사로잡힌다. 이 집에 머문 지 시간이 꽤 흘렀건만, 줄곳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전기가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은빛으로 밝게 빛나는 천칭의 존재를 알아본 것이다. 천칭은 은빛 갑옷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며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로막고 있다. 찬란한 은빛의 초자연적인 유혹일까? 멜라니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몽유병 환자처럼 천칭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가니 2층 다락방이 나온다. 멜라니는 다락방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바라본다. 지금 이 시간에 혼자서 열어보는 것이 잘 하는 짓일까? 현명한 결정을 내릴 만큼 멜라니의 정신은 온전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행동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꿈속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가 내린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잡고 돌린다. 천천히 문짝을 열고 안쪽으로 밀자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고막을 할퀸다. 다락방의 천장은 유리창이 깨져서 뚫려 있고 새들의 시체가 그 위를 뒤덮고 있다. 사방은 온통 새들 천지다. 죽어서 널브러져 있는 새들, 구석구석 앉아서 꿈틀대며 주변을 관찰하는 새들, 인간을 공격하느라 기진맥진해진 몸을 재충전하는 새들.



멜라니는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할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본인만의 의지는 아니었을 터이다. 그녀를 홀로 다락방으로 이끈 그 어떤 힘의 작용이었을 것이고 그 힘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나아가서 이탈리아 로마에서 휴양을 보내며 소일하고 있던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어온 그 어떤 힘의 작용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멜라니는 얼떨결에 소음을 발생시키고 만다. 마치 공격 명령을 알려주는 나팔 소리를 들은 고대 병정들처럼 다락방의 여러 마리의 새들이 일제히 깨어나 멜라니를 포악하게 덮친다. 멜라니는 문밖으로 도망가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나 매우 급박하게 발생한 참변이라 이렇다 할 손도 못 써보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워낙에 많은 새들이 그녀에게 맹렬히 달려들어 부리로 그녀의 육체를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퀸다. 멜라니의 양손은 붉은 피범벅이 된다. 새 떼에게 십자가 처형을 받는 것이다.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멜라니는 실신하여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진다. 뒤늦게 다락방의 참변을 알아채고 뛰어올라온 미치와 리디아는 혼신의 힘을 다해 멜라니를 구출한다.



멜라니는 거실 소파에 의지해 앉아 안정을 취하고 있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지 혼이 나간 상태이다. 정상으로 회복되려면 의사의 처방을 받고 최대한 편안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녀 곁에서 미치가 응급처치를 해주고 리디아가 간호해준다. 그 보살핌은 새벽이 오고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


미치는 멜라니를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미친 새들이 지배하고 있는 집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결단을 내린다. 겸사겸사 새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 집을 일단 떠나야겠다고 작정한다. 잠시 심호흡을 들이키며 해야 할 일을 되새겨보더니 몸을 움직여 실행에 옮긴다. 미치는 여기저기 흩어져서 서성거리는 수많은 새들을 홍해 가르듯이 헤집고 조용히 헛간으로 이동한다.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에 올라타 시동을 건다. 그의 포드 갤럭시는 타이즈 식당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리디아의 트럭을 운전할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새들의 공격을 뿌리치도록 속도를 낼 수 있는 맬라니의 애스턴마틴이 유용하겠다고 판단한다.


미치와 리디아는 제 정신이 아닌 멜라니의 양어깨를 부축해서 차에 태운다. 캐시는 집안에 있는 물건 중에 유일하게 잉꼬를 가져가겠다고 생떼를 쓴다. 그 한 쌍의 잉꼬는 멜라니가 캐시에게 생일선물로 준 것이다. 미치는 마지못해 허락한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멜라니는 리디아의 품에 기대어 심장의 따뜻한 박동을 들으며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유년시절 그리웠던 어머니에 대한 보상심리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미치가 운전대를 잡고 리디아와 캐시와 멜라니는 새들이 빼곡히 뒤덮고 있는 저택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지천에는 서로 다른 종의 수많은 새들이 뒤죽박죽 깔려있다. 차기 공격을 준비하며 일시적으로 재충전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잔뜩 먹구름이 뒤덮인 어두침침한 잿빛 하늘을 화폭에 담아 세상의 종말을 부르는 어둠의 집회가 열린다면 바로 이 지역일 것이다.


미치 가족과 멜라니는 보데가 베이 마을을 떠나 안전한 지역을 찾아 달린다. 머지않아 새들의 포악한 공격성은 무슨 일 있었냐고 되묻기라도 하듯이 예전의 본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사람들을 공격하기는커녕 사람들이 근처에 모이를 주면서 다가와도 멀리 날아가 버릴 것이다. 아마도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현업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화제거리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겐 헤쳐 나가야할 당면한 현실적인 일이 너무나도 산재하기 때문이다.


미치 가족과 멜라니도 차차 악몽에서 깨어나 안정을 되찾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제 멜라니에게 새 가족이 생긴 것일까? 11살 때 자신과 아버지를 버리고 낯선 남자와 야반도주해버린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라는 이중성의 앙금이 리디아를 통해서 다소나마 치유될 수 있을까? 리디아는 그럴 능력이나 의지를 발현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멜라니의 약점을 악용하여 집안의 권력을 독점적으로 휘두르는 어두운 전래동화의 고질적인 시어머니가 될까? 반면, 미치는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이 매우 다른 멜라니를 고령임에도 아직 녹녹치 않은 어머니 리디아의 그늘 아래에서 어떤 방식으로 수평적인 부부간의 사랑을 일궈나갈까? 미치 가족의 새 보금자리에는 그들이 함께 겪고 극복한 고통과 번뇌의 시간이 보데가 만의 집에서 캐시가 데려온 잉꼬 두 마리가 지저귀는 노래처럼 아련하고 흐릿한 추억이 되어 맴돌 것이다.



(끝)


2018년 3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