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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책] 파묻힌 거인 (The Buried Giant - Kazuo Ishiguro) 감상글

by 김곧글 Kim Godgul 2019. 2. 19. 00:51





한두 해 전에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작가의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 소설책을 구입해서 읽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와 비슷한 듯 다른 문체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좀더 깊이감 있는 내면적인 인물 묘사에 매료되어서, 국내에 출판된 다른 소설들도 싸그리 구입했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막 읽은 것은 아니고, (즐거운 마음으로 수월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나름 집중력을 소모해가며 읽어나갔고, ‘나를 보내지 마’,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An Artist of the Floating World)’, ‘창백한 언덕 풍경(A Pale View of Hills)’ 이렇게 읽었고 최근에는 ‘파묻힌 거인’을 마쳤다. (참고로,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인이지만 어렸을 때 영국으로 이민 가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모두 영어로 써졌고, 그 영어 소설들이 국내에 번역된 것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나를 보내지 마’는 한 번만 읽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또 읽어볼 계획이다. 영화도 괜찮았지만 작품이나 작가의 표현 방식 특성상 소설이 좀더 좋았던 것 같다. 그래도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 (2010)’, 국내 개봉 제목 ‘네버 렛 미 고’)’ 영화에서 ‘캐리 멀리건(Carey Mulligan)’의 분위기 있는 매력은 인상적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 국내에 거의 다 번역 출간된 것은 정말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구입해 놓고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이 집구석에서 필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어서 뿌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달콤한 꿀단지가 다락방에서 필자의 티스푼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



소설 ‘파묻힌 거인’은 작가의 가장 최근작이다.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중세 판타지 장르를 다뤘다. 어느 정도 예상되겠지만, 작가 본연의 스타일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통속적인 흥미 위주의 판타지 소설은 아니다. 특히 초반에는 더욱 지루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평범한 노부부가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점점 고조되고 흥미로워지더니 마지막에는 좋은 느낌을 받으며 끝장을 넘길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혈기 왕성한 젊은 독자가 일반적인 중세 판타지를 기대하면서 책장을 펼쳤다간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실망할 수도 있다. 사건보다는 인물들의 인생사나 사고방식이나 과거 회상 등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세 판타지 장르다운 소재들이 두루 등장하므로 세계관과 분위기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필자가 보기에, 일상적인 언어로 점잖은 수준의 대화를 아주 풍요롭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뒤로 갈수록 두드러진다. 그리고 작가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기억, 회상은 이 작품에서도 예외없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참고로 제목에서 언급된 ‘거인’은 판타지 장르에 흔하게 등장하는 거인은 아니다. 일종의 관념적인 ‘거인’이고 그 관념이 매우 치명적인 것이어서 거인이라고 언급한 것 같다. 혹시 땅속에 파묻혔던 거인이 우여곡절 끝에 되살아나서 어떤 마을이나 왕국을 혼란의 수렁으로 몰고 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아니므로 그쪽으로 기대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그래도 괴물(여기서는 도깨비), 갑옷기사, 전사, 이런 저런 전투, 불을 뿜는 용, 등은 등장해서 판타지 장르의 재미를 그럭저럭 살려주고 있다.



아무쪼록 만족스러웠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신작 소설이 나온다면 당장 구입해서 읽어볼 것이다. 특유의 좋은 느낌이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파릇파릇하고 혈기왕성한 젊은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지루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거의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연배가 좀 있는 독자들은 또는 순수소설을 애독하는 독자들은 또는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팬이라면 매우 좋은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2월 19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