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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러브 액츄얼리 :: 깔끔하고 담백한 사랑 꿈

by 김곧글 Kim Godgul 2007. 11. 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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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3일에 쓴 글)

2003년 영화지만 최근 봤다. 모든 영화를 다 볼 순 없다.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미루다 며칠 전 보고 말았다. 로맨틱 영화를 싫어하지 않지만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잔혹한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와는 전혀 다르다. 로맨틱 영화를 보면 내 현실을 망각하고 로맨틱 상상을 나름 치밀하고 건실하게 꿈꾸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로맨틱 영화 10분의 1이라도 비슷하게 내 현실에서 일어나면 다행이련만... 로맨틱 영화 안경으로 상상한 꿈은 더 강렬한 씁쓸함으로 현실을 강타하기 때문에 아애 그 안경을 집어들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 한다. 커피를 마시고 안 마시고, 술한잔 하고 말고도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힘든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랑' 따위가 자신의 의지 통제내에서 완벽히 제어될 리 없다. 어떤 본능 욕망에 이끌려 로맨틱 영화 안경을 또 집어들게 되는 걸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서두가 무겁고 길었다. 러브 액츄얼리는 가볍고, 쿨하고, 간결하고, 담백하고, 짧다. 영국 런던의 여러 남녀간 사랑을 그렸다. 영국 로맨틱 코메디만의 독특한 분위기다. 케이블TV에서도 방영했을테니 안 본 사람 없을 것이다. 내용과 인물에 관해 적어도 스포일러라고 욕먹을 확률은 극히 낮겠다.

친한 흑인 친구를 둔 젊은 미술가가 남몰래 짝사랑한 흑인 친구의 미녀 부인.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문장을 종이에 적어 표현한 고백은 숫하게 여기저기서 봐온 명장면이다. 영화를 보니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멋있으라고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다. 2층에 남편이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만약 흑인 친구가 문 열고 나왔으면 어떻게 했을까? 종이 판낼을 얼른 버리고 태연하게 ...... 이런 로맨틱 하지 않은 생각일랑 하지 말자.

포르노 남녀 배우들이 촬영하는 씬도 로맨틱하게 연출되었지만 실제로 포르노 남녀 배우가 연기 중에 대화활 수 있을 정도로 포르노 촬영이 엉성하지는 않을거다. 스탭들이 촬영 준비 한창일 때 구석에 쭈그리고 커피와 도너츠 먹으며 얘기하는 장면이 더 현실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러브 액츄얼리 속 장면이 더 극적이기는 하다. 비현실적이지만 말이다.

꽤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하게 아내만을 사랑할 것 같은 소설가가 자신의 동생과 아내가 불륜하는 것을 꽤 쿨하고 깔끔하게 넘긴다. 이런 장면 전환 너무 좋다. 영국인이 포루투갈에 많이 가는 것 같다. 물가도 싸겠고 사람들도 영국인들처럼 이지적이고 현대적이고 세련되고 쿨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게다가 포루투갈은 영국과 달리 화사한 지중해 태양빛이 일상이니까. 소설가는 소설을 쓰려고 포루투갈 시골 오두막에 머문다. 가정부가 오는데 ... 현실적으로 도저히 있을법하지 않은 상황이다. 예쁘고 젊은 여자가 가정부로 온다. 한국으로 치면 내가 소설 쓰려고 부산 허름한 여관에 쳐박히는데 '아오이 유우' 같은 일본 여자가 옆방에 투숙하고 자신이 한국말을 잘 모르니 한국말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보는 설정이다. 순정만화같은 설정이지만 재밌긴 재밌다.

그렇다고 모두 행복한 연인만 나오는 건 아니다. 다양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출판사 여직원과 젊은 남자가 몇 년 동안 느낌만을 쌓았다가 크리스마스 다가와서 어쩌구 해서 결국 사랑을 하게 되지만 여직원은 정신병원에 있는 오빠와의 전화를 거부하지 않고 때문에 여자들이 좋아하는 핸썸남자와 정사씬을 전희도 못 끝내고... 결국 사랑을 성취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이 영화가 판타스틱 유치 코믹 로맨틱 만화만은 아니라는 걸 암시한다.

다이하드 1편에서 악명 높은 악당 두목의 또 다른 연기라고 볼 수 있는 출판사 사장이 늘씬하고 젊은 직원과 로맨틱이 진전될랑말랑하고 백화점 쇼핑 가서 젊은 직원에게 줄 목거리를 구입하는데 직원이 마침 미스터 빈이다. 다른 매장에서 쇼핑하는 아내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사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자게 꼼지락 빈정거리며 포장하는 미스터 빈,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웃기는 장면이었다. 배꼽 잡았다. 나중에 아내는 남편의 흔들림을 알게되고 눈물을 펑펑 쏟고 그런 장면을 담백하게 보여주는데 깔끔하고 현대적이고 좋았다.

그러나 관객이 못 생긴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려진 지폐를 매표상에 건내며 스크린 동굴을 찾는 이유는 매혹적인 판타지를 꾸기 위해서가 과반수라는 걸 감독, 제작자, 작가가 모를 리 없다. 판타지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다른 사람의 에피소드에서 그렇다. 그걸 알면서도 보는 순간 재밌다.

최고 절정은 어수룩한, 사회 통념적으로 보통 여자들이 싫어하는 스타일의 젊지만 별볼일 없고 게다가 현실 관념도 부족한 젊은 남자가 (포르노 감독의 친구) 영국 여자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미국으로 날아가 택시 기사에서 아무 술집이나 가자고 하고 술집에 도착하자마자 패션 잡지 보그, 코스모폴리탄에 나와도 훌륭했을 젊은 미녀들을 삼종세트로 사귀는 장면은 이 영화 환타지의 절정이다. 나는 솔직히 이 장면 다음에 비행기 안에서 꿈꾸는 장면이 나오겠거니, 허름한 미국 호텔에서 술에 쩔어 혼자 궁상떨며 잠꼬대하는 장면이 이어질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게다가... 말이 안 나온다. ... 게다가 영화 끝 장면에는 실제로 그녀들을 사귀어서 영국에 데려온다. 어수룩한 남자의 친구 포르노 흑인 감독이 놀라는 것 이상으로 나도 놀랐다. 이렇게 감독과 작가에게 허를 찔릴 줄이야.

또 하나 만화같은 설정이 더 있다. 죽은 아내의 아들이 여자 친구에게 고백하는 걸 도와주는 아버지의 친절한 배려와 노력은 한국적이지 않은 감수성이지만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농담으로 얘기한 클라우디아 쉬퍼 닮은 여자와 우연히 만나서 영화 끝에는 함께 연인, 또는 부부가 된 것처럼 나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남자 환타지가 많은 편이다. 포루투갈 시골 처녀가 핸썸하고 자상해 보이는 영국 남자 소설가의 로맨틱한 프로포즈를 받는 건 여자들이 꿈꾸는 환타지지만 아내와 동생이 불륜한 걸 겪은 상처가 채 가기도 전에 며칠 후 모델 비슷한 순박한 젊은 처녀와 재혼 하는 것은 남자의 환타지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여자의 환타지가 강하게 들어간 연인 에피소드는 영국 최고 배우, 한국 여자들이 좋아하는 외국 배우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배우가 영국 수상으로 출연하고 약간 비만이고 허벅지가 굵다며 남자친구에게 체인 비서와의 사랑 에피소드가 그렇다. 확실히 여자들이 꿈꾸기 좋은 러브 환타지다. 물론 남자 입장에서 잘 나가는 상태가 되고 자신의 사랑 노력과 배려에 고마워하는 순수한 여자를 만난다는 것, 조건을 따지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점이 확인 되었을 때 갖는 만족감은 남자의 환타지이기도 하다.

러브 액츄얼리는 로맨틱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남자들의 환타지가 순수하게 베어있다. 왜 남자들의 로맨틱 영화는 맨날 홀딱 벗는 포르노 잡지, 결코 머리 속을 보여주지 않는 미끈한 모델, 화장실 유머, 굴욕적인 상황을 겪는 것 등으로 일관되는지 모르겠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 구조로 인한 사랑 판타지가 다르긴 하지만 그런 영화보단 차라리 러브 액츄얼리 같은 비현실적인 로맨틱 영화가 좋은 것 같다. 혹자는 이런 영화가 더 해롭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색즉시공 같은 영화는 누가봐도 코메디고 비현실적이란 걸 알고 보기 때문에 영화를 낄낄거리며 보고 나서 사랑에 대한 환타지를 오버해서 꾸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러브 액츄얼리같은 영화를 보고 나선 그게 비현실적이란 걸 깨닫지 못 하고 실제로 자신에게 좋은 연애 기회가 코앞에 수수하게 알게 모르게 와 있다는 걸 깨닫지 못 하고 영화 속 판타지를 꿈꾸며 독수공방 환갑을 내다보게된다(삐~ 지나친 비약). 어느 게 더 좋고 나쁜지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러브 액츄얼리도 내용, 인물과는 무관하게 영화 스타일적으로 담백하고 쿨하고 간결하고 멋스럽고 똘똘하다. 이런 느낌이 한국적이냐 아니냐는 확실치 않다. 만약 한국 배경에 한국 스토리에 한국 배우가 출연하고 이런 영화 스타일로 찍었다면 이 만큼 좋아 보일지는 잘 모르겠다. 모든 걸 떼어놓고 이질적인 것을 붙여놓으면 뭔가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적인 로맨틱이 있을 것 같다. 기존의 것과 다르고 외국 것과 다른 그 무엇.


2007 10 03 김곧글 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