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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칼럼, 단편

[시] 눈 내리는 한강 다리에서

by 김곧글 Kim Godgul 2021. 1. 4. 12:59

사진 출처: 인터넷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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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한강 다리에서

 

 


“거의 다 왔어요! 거의 다!”
함박눈이 시야를 가려 한강 다리는 거북이 교통체증으로 북적였고
택배물을 실은 내 오토바이는 꼬불꼬불 질주하다 꽈당 넘어졌다.
고개를 드니,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여인이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하니 애처롭게 을씨년스럽게...
뒷모습의 그녀는 특이하게도 어깨에
샤넬 핸드백이 아니라 깁슨 기타 케이스를 메고 있었다.
그녀를 거의 묻어버릴 듯이 함박눈이 쏟아지는 장면을 뒤로 하고
나는 황급히 오토바이에 올라타 배송지로 달렸다.

 


쥐꼬리만한 수수료를 챙기고, 불과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내가 다시 되돌아가는 한강 다리 위에
좀 전의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달랑,
그세 수북이 눈이 쌓인 깁슨 기타 케이스만 다소곳이 세워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득한 시야를 가리는 함박눈의 장막과
질퍽이며 기어가는 자동차 엔진 소음과 매연이 흩어질 뿐.
설마 그녀가......
나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굵은 하얀 눈송이들이 짙은 채색의 강물에 내려앉자마자 삼켜졌다.
혹시 그녀도 눈송이처럼......

 


기타 케이스를 열어보니 고풍스런 디자인의 기타가 들어있었다.
딱 봐도 비싸 보였다. 샤넬 프리미엄 핸드백 값은 나가겠는 걸.
언젠가 어떤 콘서트에서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마이크를 잡고
수십년 내내 오로지 기타에만 메달린 인생이 후회가 된다고
지금 세상이 이렇게 다채롭게 변할 줄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씁쓸해하는 코멘트를 남겼던 영상이 떠오른다.
이 여자도 비슷한 이유로 현실을 비관해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기타 케이스가 내 발목을 잡았다.
그냥 여기에 두면 누군가 집어가서 중고시장에 팔아먹겠지.
그녀가 원하는 게 그것은 아닐 거야.
그렇다고 내가 깊은 사연이 있는 기타를 입양할 수도 없고...
그래! 그녀가 그곳에서도 기타를 칠 수 있도록 해주자!
나는 무거운 기타 케이스를 낑낑 들어올려
다리 난간 위에 겨우 걸쳐 놓았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연주를 끝없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 함박눈 장막 저편에서 고함치는 외침이 들렸다.
“아저씨! 아저씨!”
여자 목소리였다. ‘오빠’가 아니라 ‘아저씨’라고 불렀으니까 내가 맞는 것 같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멈춰요! 멈춰!”
여자는 총총 걸음으로 허겁지겁 다가왔다.
“왜 남의 소중한 기타를 강물에 던지려 해요?”
그녀의 손에는 스타벅스 빅사이즈 커피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함박눈을 가로질러 까르르 깔깔깔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녀는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최신식 스마트폰을 꺼내서
인스타그램, 유튜브. 스포티파이를 보여주며
(프로필 사진은 같은 기타를 든 그녀의 상반신 사진)
손가락으로 팔로워와 구독자 숫자를 가리켰다.
엄청 많았다.
“오랜만에 함박눈을 맞으며 한강 다리 위에서 분위기 잡고
셀카와 동영상을 찍다가
커피가 무자게 땡겨서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웬 아저씨가...”

 


머쓱해진 나는 그녀를 위해 사진과 동영상을 해달라는 위치에서 찍어줬다.

엄청 꼼꼼하고 까칠하게 요구했다. 거부할 수 없었다.
심지어 눈 덮힌 바닥에 엎드려 셔터를 누르기도 했다.
때문에 그날 더 이상 배달 수수료를 벌 수 없었다.

계속 쏟아지는 짙은 함박눈은 더욱 더 깊어지고
그래서 그녀가 예뻤는지 말았는지 잘 분간할 수는 없었는데
다만, 하얀 눈발의 장막 사이로 기타를 튕기며 흥얼거리며 움직이는

그녀의 온몸의 실루엣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2021년 1월 4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