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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D-War) LA 촬영 탐방기

'디워(D-War)' LA 촬영 탐방기 05 (동네 꼬마들)

by 김곧글 Kim Godgul 2021. 8. 17. 14:49

 

 

(2007년 7월 28일에 적었던 글을 약간 수정해서 재업)

 

 

 

화창한 LA 날씨, 오늘 촬영은 주택가, 촬영 초반의 서먹서먹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모두 어른들이라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현지인 스탭들은 심형래 감독을 속으로까지 신용하지는 않아, 그런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전문직업이니까 주워진 일에 충실하자, 그런 가치관으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심감독은 인위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본능으로 현지인 스탭들을 감동시킨다.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서 결과적으로 이후 촬영 능률을 더욱 향상시키는 효과를 본다.

 


재밌는 소설, 영화, 게임 등의 공통점은? 감동적인 스토리, 심금을 울리는 대사, 흥미진진한 이야기 구성... 무엇보다 매력적인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현실 속에서는 일평생동안 얼마나 성장하는지 천차만별이지만 만화, 소설, 영화, 게임의 주인공은 급속도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 영화가 아니라면 그럴 확률은 더욱 높다. RPG 게임에서 노가다도 성장의 일종이고, '헤일로(Halo)'같은 순발력을 요하는 컴퓨터게임도 일정한 노가다를 거쳐야 좋은 무기를 획득한다. 모두 성장의 일종이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이런 것이 적용된다.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지만, 감독의 경우 수많은 스탭들을 얼마나 빠른 시간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신의 영화에 충심으로 몰두하게 만드느냐가 일종의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요소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심감독이라는 캐릭터는 초고속으로 성장했다.

 


어떤이는 다소 의외라고 치부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각자 필터링해서 생각하기를 바란다. 뭐냐하면, 심감독은 영화 '반지의 제왕' 감독 ‘피터 잭슨’을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감독으로 치부했다. 가벼운 농담일 수도 있고, 스스로 우쭐해하면서 관객을 웃게 만드는 전문 개그 테크닉 중에 하나였는지도 모르다.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더라도 잘못 된 것은 없다. 무릇 예술가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창작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일종의 나르시시즘 이론.

 


디워 촬영을 하던 중에 가끔 누군가의 입에서 ‘반지의 제왕’ 얘기가 튀어나오곤 했다. 그 감독이 그 해 겨울에 대형 고릴라를 데려와 관객을 놀래킬 거라고. 디워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거라고, 다소 미묘하고 조심스런 얘기거리였다. 그때마다 심감독은 자신있게 당당하게 짧게 말했다.

 

"에이~ 어따 비교해? 디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반지의 제왕’ 주인공 ‘프로도’와 ‘샘’이 사는 동내 이름이 '샤이어(shire)'다. LA에서 종로만큼 유명한 도로가 '윌셔(wilshire)'인데 '윌(wil)'을 빼면 '샤이어'가 되다. 청바지 메이커로 어울리는 또 다른 유명한 거리 '웨스턴(western)'과 ‘윌셔’가 만나는 사거리에 유서 깊은 극장이 딸린 고풍스런 빌딩을 LG에서 구입했던 때도 그때쯤이었다. 할리우드 옛날 영화를 보면 이 극장이 종종 나온다.

 


백인들은 그 동네를 떠나 서쪽으로 이사해갔다. 태평양쪽 말이다. ‘윌셔’ 거리를 따라 무조건 서쪽으로 달리면 ‘산타모니카’ 해변이 나온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 해변에 도착하기 10분 전에 우측으로 (지도에서는 북쪽으로) 진입하면 비교적 백인 중산층이 사는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동네가 이어진다. 그곳의 어떤 주택을 대여해서 실내촬영을 했다. 그리고 바로 앞 거리로 나와서 2차 촬영을 했다. (위에 사진의 장면을 촬영할 때임)

 


주택가라지만 단독주택들은 띄엄띠엄 떨어져 있고 그 사이는 잔디, 정원, 야자수, 무명 나무들로 채워져 있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없다. LA에서 영화촬영은 아무 것도 아니다. 햇볕이 따가운 낮에 주택가 사이를 걸어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퍼마켓에 가려고 해도 차를 몰고 나가야 한다. 다만 직접 차를 몰고 멀리 갈 수 없는 학생이나 노인들이 산책하는 경우를 드물게 볼 수 있을 뿐이다.

 


남주인공 ‘이든’과 여주인공 ‘사라’가 승용차를 타고 빠르게 달려가면서 몇 마디 대사를 나누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무선 마이크를 배우들에게 장착시켜주고, 카메라맨은 뒷좌석에 앉았다. 실제로 차를 운행하면서 찍는 장면이었다. 심감독은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헤드폰으로 체크할 수밖에 없었다. ‘레디~ 고!’


그때 낯선 이들이 슬금슬금 심감독 쪽으로 걸어왔다.


"영화 찍나봐요? 영화?"


동네 주민인가 보다. 백발인지 금발인지 노인이 5살 정도 남매 조카를 데리고 산책하던 길이었다. 남자 아이가 정말 이렇게 말했는지는 모른다. 기 살려주기 유아 교육으로 자란 미국 아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심감독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이런 저런 장비를 만지작거리고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소위 깔짝대는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여동생 아이는 오빠가 하는 짓을 따라했다.

 


슈팅에 들어간 상태였고 헤드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심감독은 깜짝 놀랐다. 꼭 아이들 때문은 아니겠지만 조나단 조감독에게 "one more time"을 요청했다. 젊은 스탭들이 달려와서 아이들을 쫓아내려고 했다. 물론 달래면서 살살...

 


그때 심감독은 아이들에게 마법 같은 실력을 발휘했다. 특유의 친근감.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격. 다정함. 활짝 웃으면서 '이건 모니터고 이건 사운드 장비고...' 설명해줬다. 현지인 스탭들은 의외라는 듯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Mr. Sim (현지인 스탭들은 심감독을 이렇게 불렀다)’에게 저런 면이...

 


그 사이 다시 슈팅할 준비가 되었고 '테이크 2'를 시작했다. 다시 헤드폰을 머리에 썼던 심감독은 좀 듣다가 원했던 순간이 지났는지 헤드폰을 남자 아이 머리에 씌워주었다. 놀랬다. 현지인 스탭들에게는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나 보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에게 저렇게 친절하다니... 우리가 알고 있던 감독이나 여느 동양인과 너무 달라.'


현지인 스탭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놀랬다고 나중에 영어 잘 하는 한국 스탭에게 들었다. 잘 아시다시피 미국인들은 아이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다. 물론 역사적으로 과거에는 안 그랬겠지만 현시대에는 그렇다. 심감독이 활짝 웃으며, 주인공 아역도 아니고 일면식도 없는 동네 꼬마들에게 저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모습에 덩달아 웃으며 순간 촬영장은 화기애애해졌다. 한국에서 보면 별거 아닌 장면일수도 있는데, 현지인들에게는 그 에피소드가 심감독을 매우 다르게 보게 했다. 심감독 캐릭터가 급속도로 성장(업그레이드) 된 순간이었다. RPG 게임으로 치자면 레벨이 서너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것과 같았다.

 


이후 현지인 스탭들은 심감독의 영화를 더욱 열심히 성심성의껏 작업했다. 심감독의 업그레이드된 포스의 영향일 것이다.

 


미국을 여행할 때 아이와 여자에게 매우 친절하다면 뭇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의 점수를 딴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회성 있는 남자라면 그렇게 변하게 된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뭇사람들의 이유도 없는 멸시 적대감의 시선이 뒤통수나 등쪽에서 저격되는 것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다소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런 것을 국제적으로 마당발이었던 심감독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촬영장의 분위기는 내내 LA 날씨 만큼이나 화창하고 청명했다.

 


계속...

 


2007년 7월 28일 (초안)
2021년 8월 17일 (약간 수정)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