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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술한잔(A Drink)

by 김곧글 Kim Godgul 2009. 12. 24.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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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동쪽 수유동이었다. 아는 후배는 가까운 고기 집으로 인도했다. 아파트 단지에 붙은 허름한 상가건물 1층이었다. 포장마차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가게 폭과 높이만큼 보도블럭쪽으로 증설한 포장 칸막이일 뿐이었다. 고기 굽는 연기와 동네 아저씨들의 담배 연기로 너구리는 벌써 잡았고 호랑이는 네 발을 들었을 법 했다. 빈자리가 없어서 내심 좋았다. 다른 곳으로 갔으면 바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입문 바로 앞에 딱 한 테이블이 남아있었고 후배는 거기에 앉았다. 우리는 남자 셋이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정말 추웠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기도 귀찮았다. 자리에 앉았어도 추위의 손톱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출입문은 포장 칸막이 실내를 왕래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주 열렸다. 그날은 올들어 가장 추웠던 날이었다.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이 모두 모인 듯이 왁자지껄했다. 주인장은 손님이 부르지 않으면 주문을 받으러 오지도 않았다. 후배가 바쁘게 지나치는 주인장을 불러 세웠다. 삼겹살과 목살을 주문했다. 한참 후에 밑반찬이 나왔다. 쌈장, 가는소금, 부추, 고추, 쌈, 깻잎, 마늘, 된장찌개였다. 젓가락질을 유혹하는 외양과 신선도는 아니었다. 가스불이고 그나마 두꺼운 돌판으로 덮어놔서 숯불고개집에서처럼 손을 녹이는 아늑함도 없었다. 동사직전에 주문한 고기가 나왔다. 보기 드물게 육질이 두꺼웠다. 익는데 한참 걸렸다. 고기를 굽다가 동사하는 줄 알았다. 요즘은 다들 이렇게 마신다며 후배는 소맥을 만들었다. 유리잔 한 개의 끝부분에 하얀 찌꺼기들이 여러 조각 붙어있어서 교환하기도 했다. 나는 밑반찬에 손을 안 댄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소맥을 죽 들이켰다. 그래야 이곳에서 동사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차는 따뜻하고 널찍한 곳을 상상했다. 고기가 익어서 식용가위로 잘랐다. 일행 셋은 구워진 고기를 먹었다. 뜻밖이었다. 고기 맛이 제법 좋았다. 지금까지 씁쓸한 감정이 쌓아올린 피라밋이 고기를 씹는 만큼 무너져 내렸다. 핵심은 고기였다. 그것은 괜찮았다. 그렇다고 춥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불쾌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잠시 잊을 수 있을 수 있었다.

2차는 회집에 갔다. 대로 건너편에 있었다. 언젠가 갔었던 곳이다. 그때는 여름이었고 오늘은 한겨울이란 점이 달랐다. 그때는 보도블록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먹었는데 오늘은 2층으로 안내되었다. 보일러를 때서 바닥은 따끈따끈 했다. 테이블 사이는 널찍했다. 손님도 많지 않았다. 시침은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광어회가 무난했다. 전과 달리 지느러미 부위가 맛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거의 다 먹었다. 대신 몸통은 많이 못 먹었다. 배가 불러서였다. 일행은 아파트 얘기, 주식 얘기, 정치 사회 문화 얘기를 했다. 목적도 없이 흘러가는 종이배 같은 얘기였다. 회집에 들어온 이유는 얼큰한 매운탕이 당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 했다. 배가 부르기도 했지만 문 받을 시간이었다. "저희가 좀 이따 나가봐야 되거든요." 주인장이 말했다. 친절한 완곡어법은 아니어도 마감할 시간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시침은 11시를 막 넘겼다.

후배 집은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안방에는 그의 아버님이 주무시고 계셨다. 후배는 몇 년 전에 결혼했고 아이 한 명을 낳았다. 애엄마와 아이는 처가댁에 가있었다. 그래서 이 근방에서 술한잔 했다. 일행 셋은 신혼 분위기 나는 방에서 합숙했다. 벽지는 핑크 빛 꽃 천지였다. 둘이 침대를 차지했고, 나는 홀로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좋아하는 여자가 옆에 있다면 모를까 옆에 누가 있으면 잠을 잘 못자는 편이다. 숙취로 포카리스웨트를 마셨다. 효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술을 마신 후 갈증 해소에는 물보다 빨랐다. 다만 물보다 비싼 것이 흠이었다. 벽에는 결혼사진,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나는 부부가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후배는 주위에서 남매 같다고 말한다며 웃었다. 닮은 구석이 있기에 결혼한 걸까? 결혼했기에 닮은 구석이 많아진 걸까?  아이는 아빠 엄마를 쏙 빼닮았다. 나는 3남매라고 말했다. 후배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두 후배는 침대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수없이 돌리다가 곯아떨어졌다. 나는 방바닥에 누워서 이불을 덮었다. 이불에는 뽀로로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밖은 강추위였지만 이불 속은 따뜻했다. 다음날 오전에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2009년 12월 20일 김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