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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칼럼, 단편

[시] 태풍 (Typhoon, Hurricane)

by 김곧글 Kim Godgul 2019. 1. 30. 01:00

TYPHOON, HURRICANE





태풍 (Typhoon, Hurricane)



한가로움의 열광에 달아오른 한여름의 거인이
부유하는 습기를 조물락거려서 비바람을 만드는데
예상외로 폭풍이 빚어지는가 싶더니 걷잡을 수 없게 되었구나.
콧구멍이 아니라 눈구멍으로 생명이 불어넣어지자
몸서리 치고 기지개를 켜며 태풍이 태어난다.
중력을 거슬러 격정적으로 팽이처럼 춤을 추더니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흩날리며 문득 어딘가로 이동한다.



시선을 추켜세워 드넓은 창공을 우러러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흘기며 껌뻑거리는 태풍,
별과 달과 태양이 어둠 저편으로 줄행랑치고,
잔잔한 수면에서 본의 아니게 깨어난 파도들이 정신줄을 내려놓고
빛의 속도로 광란의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어떤 존재도 두렵지 않은 태풍,
어떤 존재도 인지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천진난만함
막무가내로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한다.
태평스런 산천의 그 어떤 존재도 예외 없이
청천병력 같은 경계의 사이렌을 복사하며 발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가이아(Gaea) 여신의 품에 밀착하는 것
또는 최대한 멀리 달아나는 것 뿐.



태풍은 그저 유유히 산책하듯이 이동할 뿐이지만
어떤 존재도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나고 공간은 찌그러지고 뭉개져서
그의 산책의 발자국에는 전율이 휘몰아친다.



그러나 시간은 만병통치약
짧고 굵고 강렬했던 태풍의 야수성의 정열은 어느덧 노쇠해지고
마침내 광기의 불청객은 붉은 황혼의 저편으로 소멸한다.
시간과 공간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본연의 실체를 되찾고
몽롱한 수증기 발자취 너머 화사한 무지개 화관이 떠오른다.



수많은 존재들은 잠깐 동안 대자연의 불가항력에 경외감을 바치며 숭배하더니
맑고 푸른 하늘처럼 순수한 본래의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2019년 1월 30일 김곧글(Kim Godgul)





PS. 이 시는 작년(2018) 여름에 실제로 태풍이 창문을 요란하게 흔들던 날에 적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최근에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