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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by 김곧글 Kim Godgul 2017. 10. 31. 14:33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1968)

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원작소설

위의 책은 국내에서 1993년에 출판된 책

 

 

 

익히 알려졌다시피, 이 소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의 원작소설이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은 상당 부분 차이가 있다. 인물의 이름과 직업과 이야기의 세부 설정에 비슷한 점이 다분하지만, 생략된 인물도 적지 않고, 같은 인물이라도 성격이 다른 경우도 있고, 직업이 다른 경우도 있고, 이야기는 비슷한 듯 다르고, 은은하게 전달되는 메시지도 차이가 있다.

 


영화의 주인공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는 고딕풍 고층 아파트에 청승맞게 독수공방하고 있는데 반하여, 소설의 릭 데커드는 부인과 함께 온전한 삶을 살고 있으며 특별히 (영화와 달리) 살아 숨 쉬는 애완동물에 매우 열성적이라는 특성이 있다. 영화나 소설이나 전 세계적으로 발발한 대전의 여파로 인간이 살아가기에 힘겨운 대기의 지구라는 점은 공통이다.

 


영화에서는 알 듯 모를 듯 표현됐지만, 소설에서는 수많은 동물들이 대부분 멸종했고 극소수의 생존하는 동물들은 매우 고귀하게 추앙되고 있다. 매매가 이뤄진다면 엄청나게 큰 금액이 오간다. 누군가 실제와 똑같은 인조로봇동물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숨 쉬는 동물을 집에서 기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주변 사람들도 매우 부러워한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거나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것에 비견되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으로 진짜 살아 숨 쉬는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영화에서는 짧고 적게 소개되는데 (인조로봇뱀으로 뱀춤을 추는 여자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장면 등) 소설에서는 꽤 여러 부분에 등장하고 그 중에는 중요한 내용을 포함한 것도 있다.

 


그 중에 애매하면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다. 데커드가 자신이 담당한 수배 중이던 안드로이드들을 모두 폐기처분(retirement)하고 귀가하던 도중에 (이야기의 결말에 근접해서) 우연히 땅위에서 꿈틀대는 두꺼비를 발견한다. 그는 진짜 살아 숨 쉬는 두꺼비로 생각하고 집으로 가져와서 아내에게 자랑한다. (소설의 세계관에서는 우연히 살아있는 동물을 발견하는 것은 마치 로또에 맞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두꺼비의 배에서 제어 배선반을 발견하고 인조로봇동물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실망을 금치 못 한다. 이 내용이 암시하는 것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주인공이며 안드로이드를 폐기처분하는 바운티 헌터(현상금 사냥꾼, 영화에서는 ‘블레이드 러너’라고 명명되었는데 이 용어는 시나리오 작가가 다른 작품에서 참고한 것이다.) 데커드도 사실은 안드로이드인데 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암시한 것이다. 영화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데커드의 정체(인간인지 안드로이드인지)에 대해 암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소설에서는 이런 식으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경찰로 잠입하여 살아가는 안드로이드도 나오고, 데커드와 같은 직업의 어떤 바운티 헌터가 안드로이드일지도 모른다고 강하게 의심되는데 정작 본인은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살아가고 있는 내용도 나온다. (이런 내용은 영화에서 빠져있다)


 

또한, 영화에서 데커드가 안드로이드 제작사 타이렐 회사를 방문하여 레이첼이라는 여비서를 ‘보이트 캄프 테스트’를 하는데, 이때 첫 번째 질문이 ‘생일날, 누군가 동물 가죽으로 만든 가죽지갑을 선물한다면?’ 이고 레이첼은 이렇게 대답한다. “받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걸 준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영화 속 세계에 사는 정상적인 인간답게 상식적인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영화관객은 다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냥 지갑을 선물했을 뿐인데 안 받으면 그만이지 경찰에 신고까지 하는 건 무슨 경우인가? 여기에는 원작소설의 세계관이 깔려있는데 영화만을 감상한 관객은 즉시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설의 세계관은 살아 숨 쉬는 동물이 매우 귀중하게 대접받는 시대이다. 누군가 그런 VIP 급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지갑을 선물한다면 그는 사회적 중범죄자 또는 살인자일지도 모른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정상적

이라고 통용되는 것이다.


 

그 외에 우주 식민지 이민 부적격자 ‘이지도어(영화에서 ’세바스찬‘인데 다만 직업은 다르다)’가 소설에서는 비중 있는 조연급으로 등장한다. 어찌어찌해서 이지도어는 도망자 신세에 처한 세 명의 안드로이드 편에 서서 (비록 자신이 그들에게조차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지만 다른 인간들 속에 있어도 마찬가지이므로)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안드로이드에겐 인간다움이 없다는 것을 알아보고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이지도어가 우연히 집주변에서 진짜 살아있는 거미를 발견하게 되고 기뻐하며 안드로이드들에게 보여주는데 두 명의 여자 안드로이드는 단순히 호기심과 흥미위주로 거미의 다리를 하나씩 뜯어내며 반응을 관찰하며 흥미진진해한다. 그 모습을 보고 이지도어는 안드로이드와 인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실제 동물 또는 인조로봇동물과 관련된 내용이 영화와 달리 여러 개 들어있고 비중 있게 다뤄진다.


 

영화에서 레이첼은 웬만한 인간보다 인간적인 감수성을 지닌 안드로이드이며 일종의 비련의 여인인데,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데커드를 구해주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함께 미래를 일궈나간다는 암시를 남기면서 영화가 끝나는데, 소설의 초반에는 그녀가 영화에서의 성격처럼 느껴졌는데 후반에는 영화와는 많이 다르게 비인간적이고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녔지만 냉혹한 감정의 (냉전시대의 여자 스파이 같은 또는 사이코패스 같은) 안드로이드 여인으로 보여진다.


 

영화에서는 아애 생략되고 소설에만 있는 것으로 ‘공감박스’라는 장치와 일종의 사이버 사이비교주 같은 ‘윌버 마사’가 있다. 이들은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 영화와 소설의 분위기와 내용과 메시지가 다른 이유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소재이기도 하다. 공감박스는 현대적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서로 멀리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집에서 인터넷 같은 것에 연결된 공감박스라는 것을 손으로 붙잡아서 정신이나 의식을 공통으로 연결해서 좋은 감정이 있으면 서로 공감하면서 나누고 나쁜 감정이 있으면 서로 공감하면서 보듬어줄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감정 조절 장치이다. (어쩌면 1984년에 출판되어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고 일컬어지는 ‘뉴로맨서(Neuromancer)’에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인상적인 가상공간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고안해내는데 영감을 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참고로 이 소설은 1968년 출판되었다. 아무튼, 공감박스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윌버 마사라는 사이버교주 같은 노인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는 산행을 하면서 감정과 마음을 위로받는다. 그런데 소설의 후반부에 TV의 유명한 코미디 프로에서 윌버 마사에 대한 초라한 실체를 폭로하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윌버 마사를 믿고 따르는 것을 지속한다. 영화에는 없고 소설에만 있는 내용인데 인상적이고 의미심장한 내용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윌버 마사’와 관련된 내용을 다른 형태로 의미심장하게 풀어놓았다. 소설에서 안드로이드들이 지구로 숨어든 목적은 황량한 화성보다 살기 좋은 지구에서 살고 싶어서일 뿐이다. 이에 반해 영화에서는 4년 밖에 안 되는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이고 결국에는 자신을 창조한 제작자(타이렐 회사 엘든 타이렐 회장)을 찾아가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그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이것은 마치 인간과 신의 관계를 은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수많은 인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창조주에게 요구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창조주를 부정한다. 즉, 창조주를 죽인다. 소설에서 사이비교주 같은 윌버 마사가 유명한 코미디언에게 초라한 실체가 까발려지고 조롱거리로 전락된 것은 현시대에 신이 부정되는 현상을 은유한 것 같다. 한편, 그 코미디언은 거의 24시간 일하는 것으로 봐서 안드로이드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영화와 소설에서 비교적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는 ‘보이트 캄프 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인간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겉모습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를 감지할 수 있는 장치인데 몇 가지 질문을 던져주면서 응답하는 피실험자의 눈동자의 반응을 살펴보고 인간인지 안드로이드인지 판별한다. 보이트 캄프 테스트는 영화에서는 초반에 잠깐 등장하지만 소설에서는 훨씬 여러 번 등장하고 이것의 신용도에 대한 의심을 여러 번 다룬다.

 

 

어떻게 보면 다소 비과학적인 탐지기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라 하더라도 개인차에 따라 충분히 안드로이드라고 판단될 수 있어 보인다. 게다가 안드로이드라고 판정되었을 때 그냥 웃고 넘어가는 게 아니고 즉시 폐기처분(살인)해도 합법적인 상황이니 매우 불합리하고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소설이 쓰여진 시대에서 조금 앞서 벌어졌던 황당하고 비극적인 시대적 상황을 은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에서 1950년 초중반에 창궐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떨게 만든 ‘매카시즘’이 그것이다. 누구나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찍히면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누가 어떻게 공산주의자를 구분해내는가이다. 그야말로 귀에 걸며 귀걸이고 코에 골면 코걸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먼 옛날 중세시대에 마녀사냥이랍시고 수많은 여자(남자도 포함)를 공공연하게 죽인 사건과 비슷한 사회현상이 20세 중반에도 있었던 것이다. 보이트 캄프 테스는 그런 것에 대한 은유가 들어있는 듯하다.


 

영화의 디테일을 가늠할만한 것으로 이런 것도 있다. 데커드가 뱀쇼를 하는 여자 안드로이드 ‘조라(가명 살로메)’를 탐방하러 갔다가 기습공격을 당하고, 번화가로 뛰쳐나가 달아나는 그녀를 추격하는 역동적인 장면이 있다. 거리는 여타 장면들에 비해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려 인상적이다. 엑스트라들이 대거 동원된 것이다. 그런데 살로메가 막 클럽을 나와서 거리로 도주할 때 유독 난장이들이 여러 명 화면에 등장한다. 이들은 동양인(이곳은 차이나타운이다) 또는 다인종으로 북적대는 만화경 같은 시가지를 표현하기 위한 일환만은 아니다. 소설의 세계관에서 지구인들은 대기가 오염된 지구를 떠나 개척된 우주식민지로 많이 이주했는데, 여전히 지구에 남은 자들을 몇 가지 분류해보자면, 우주이민을 떠날 재력과 신체조건은 충분하지만 언젠가는 예전처럼 괜찮아질 것을 기대하면서 남아있는 경우, 신체조건은 문제없지만 재력이 넉넉지 않은 저소득층, 신체에 문제가 있어 부적격자로 낙인찍힌 자들이다. 신체부적격자는 재력의 유무를 떠나서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우주이민을 떠날 수 없다. 그래서 거리 곳곳에는 신체부적격자에 해당하는 난장이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감독의 디테일 표현력을 알아볼 수 있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소설에서 주목할 만하게 다뤄진 어떤 소품을 원래대로 사용하지 않고 그 흔적만을 슬쩍 보여준 것도 있다. 이야기가 다소 다르고 상영시간이라는 제한 때문에 생략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 아쉬움을 달래는 취지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데커드 아파트의 거실에 있는 피아노가 그렇다. 소설에서 데커드의 집안에는 피아노 건반 같은 장치가 놓여있는데, 단순히 피아노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다양하게 조절해주는 첨단장치이다. 이것을 영화에서는 순수한 피아노로 등장시켰다. 왠지 현상금 사냥꾼 데커드의 집안에는 꿔다놓은 보리자루 같다. 부자연스럽고 생뚱맞아 보이는 인테리어 소품이지만 소설을 감안하면 데커드가 피아노 건반을 끄적대는 장면을 짧게 삽입한 감독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레이첼이 죽기 일보직전의 데커드를 구해주고 둘이 함께 데커드의 집에 머물렀을 때 레이첼이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피아노 연주를 하는데 단지 이 장면을 위해서 피아노를 데커드의 집에 비치한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무릇 독자가 이 소설을 이해하고 즐기기는 쉽지 않은 편이다. 이 장르에 빠져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읽는 동안에도 졸음과 싸워야할 수도 있다.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조차 재미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많은 분량이 아닌 것은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그런 장벽 넘어에는 인간과 사회를 꿰뚫는 냉철한 통찰 같은 것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것을 알아보게 되는 어떤 독자는 분량이 적음을 아쉬워하여 언젠가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2017년 10월 31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