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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칼럼, 단편

[시] 토마토 쥬스처럼 신선한 피

by 김곧글 Kim Godgul 2020. 2. 1. 19:18

그림과 시 내용은 별개 (단순히 인터넷 검색으로 올린 사진)

 

 

 

토마토 쥬스처럼 신선한 피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말해야겠어
맨 정신을, 적어도 남들 보기에 정상인처럼 보이고 싶어
다 살자고 하는 짓
사는 게 다 그렇지
내가 사는 방식, 이랄 것도 없지만 껄껄껄, 그날이 오기 전까진
영원히 암흑으로 떨어질 그날 전까진
이렇게 살 테니.

 


너무 놀라진 마, 날 이해해 달라고 까진 안 바래
단지 이렇게 가끔 만나 너와 나누는 싸구려 술자리
시원한 부대찌개와 투명한 소주
우리가 각자 결혼하기 전에도 종종 이런 자리, 괜찮았는데
요즘은 통, 여간해선 자리 만들기 힘들어
너나 나나, 믿고 따라온 아내를 행복하게 해줘야할 의무가 있으니
옷과 화장품을 사주고, 맛집을 동행하고, 백화점을 따라가고, 휴가도 데려가고...
귀찮다니, 쉿! 큰일 날 소리
귀신같이 눈치채는 아내한테 혼줄 날라
결혼한 남자는 다들 그렇게 살다가, 늙어 죽는 거지, 인생 뭐 있어?

 


마시자, 건배!
좋아, 이제... 말할게. 오랜만에 너를 만난 용건
요즘 들어 꽤 많이 느껴져,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는 게
언제 또다시 이런 자리를 가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죽마고우보다 더 좋은 녀석, 너에게만 나만의 비밀을 털어놓으련다
짜식, 웃기는...

 


얼마나 될까?
그동안 내 손을 거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했던 사람들
......
호들갑 떨지 마, 난 멀쩡해, 농담 아냐
아냐, 아냐, 영화나 컴퓨터 게임을 말하는 게 아냐
바로 나, 네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말하는 거야
짜식, 두 눈이 휘둥그레지기는...


평균 잡아 근 5년 동안 한 달에 한 명씩
강제로 레테의 강을 건너게 했던 것 같아
단지 인간의 신선한 붉은 피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걸 최소한 일점오 리터 피티병에 가득 채워야 했거든
짜식, 바들바들 떨기는...

 


너 언제부터 술 마시면 수전증?
내 생일에 폭탄주를 들이붓던 네가 결혼을 하더니
신체성장곡선이 꺾였는지
이젠 술 앞에서 몸을 다 사리는구나, 껄껄껄

 


긴장감, 허겁지겁, 후들후들, 죄책감,...
밤새 고생해서 피티병에 인간의 붉은 피를 채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차가운 공기의 새벽 전철을 기다려
첫차로 귀가 길에 오를 때의 뿌듯한 기분을
넌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거야
천국, 파라다이스, 안식처, 화장실에서 초코파이...
아무도 내가 안고 있는 피티병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아
건강에 좋은 신선한 토마토 쥬스, 라고 생각하겠지
조금 주면 안 되겠냐고 하는 노숙자도 있었어
피식! 5000원 주니까 냉큼 가버리더군

 


이제 막 동이 트려는 푸르딩딩한 새벽 공기 마시며
땀을 뻘뻘 흘리며 막바지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는 이들을 지나쳐
이 세상에 나를 반기는 유일한 곳
마이 스위트 홈으로 들어가
삶이 공수래공수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를 반겨주는 곳은 오직 하나
나의 집, 나의 집뿐이리

 


초등학생 자녀들은 아직 자도 되는 시간
아내는 침대에 누워 기력이 쇠해
남편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려
안방 문을 열자마자 남편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내가 들고 온 피티병을 냉큼 빼앗아, 찬연한 미소를 날리며
연거푸 키스를 퍼붓고
“수고 많았어요! 사랑해요, 여보!”

 


어쩌다 운이 좋아 피티병 두 개를 가져오면
냉동실에 숨겨 둔 내 팬티를 꺼내 주며 진한 눈빛을 쏘며
“오늘밤 죽을 각오는 돼 있겠지!”
반짝반짝 빛나는 아내의 눈망울, 영락없이 연애 때와 같더군

 


어쨌든 아내는 피티병을 열어 유리컵에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아까워 조심조심 따르더니
인삼보약이라도 되는 양
벌컥벌컥 꼴깍꼴깍 헐떡헐떡 들이켜
단숨에 한 컵을 깨끗이 비워

 


그 순간 아내는 매우 행복한 모습을 지어. 표정에 달콤함이 흘러 내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스으윽, 손등으로 입술을 닦는 아내, 혓바닥으로 낼름낼름 빨아 빨아
귀여운 나의 고양이, 들켰네, 우린 잠자리에서, 그래 그거 할 때
거의 아내는 고양이 톰, 나는... 한 번은 제리, 한 번은 복슬이, 한 번은...
물론 아내가 정하지 내게 무슨 결정권이 있겠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뭘 웃어
짜식, 넌 웃는 모습이 멋진 친구야

 


너나 다른 친구들이 외도까지는 아니지만, 가끔 다른 여자를 품을 때
내가 한사코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얼마나 답답했던지, 이제야 말할 수 있어, 속 시원하다.
내가 어렵게 구해 온 신선한 토마토 쥬스를 실컷 마신 아내는
그날 밤 나를 완전히 죽여주거든
그 매혹적인 죽음을 한 번 맛보고 나면, 다른 여자는 설령 세기의 미녀라 해도
시시하게 느껴져. 그냥 개울가에 반짝이는 조약돌일 뿐이야
짜식... 그만 웃어...
건배! 왜 이렇게 안 마셔? 너 술 많이 약해졌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
참하고 다소곳하고 정숙했던 아내가
인터넷을 하면서 부턴지, 여고동창들과 만나면서 부턴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부턴지...
어쩌면 내가 전혀 모르는 무엇 때문인지
전혀 모르겠어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말하더군
“여보... 나... 흡혈귀가 됐어”

 


당연히 처음엔 믿지 않았지
미친 듯이 날뛰다가 기력이 쇄하여 죽어가는 아내를 겨우 살려낸 것은
오로지 인간의 신선한 피뿐이란 것을 깨닫고 나서
아내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믿게 됐지
그러나 방법이 없더군
한 번 흡혈귀가 되면 영원히 흡혈귀로 살 수밖에 없잖아
아내는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은 인간의 신선한 피를 먹어줘야 살 수 있어
......
자! 건배하자. 술맛이 왜 이래?
짜식! 난 괜찮아 임마!

 


별 볼일 없는 나 같은 놈의 꾀임에 넘어가
결혼까지 해주고 내 유전자를 품은 자식도 나아주고
끼니 챙겨주고, 밤마다 나를 위로해주고, 드물게 죽여주고
순수하고 참하고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착한 아내가
어떻게 산 사람의 목을 깨물어 피를 쫙쫙 빨겠어?
짜식... 네가 뭘 안다고 슬픈 표정을 짓냐?
고맙지만 사양이다

 


타고난 내 팔자겠거니 하고 살아야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아내가 기뻐할 수 있다면
뭐든
다 해주고 말테야
그렇게 생각하는 날 이상하다고, 이해할 수 없는 놈이라고
휴머니즘, 사회성, 공공성으로 깨우치려고 해도
난 신경 안 써
세상엔 이런 사랑, 저런 사랑
디지리도 다양하게 많은데 그 중에 괴상한 한 가지일 뿐

 


경찰의 수사망이 시시각각 좁혀져 오는 게 느껴져
조만간 체포되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차고
톱뉴스에 출연하겠지, 빨가벗긴 마네킹을 놓고 재연
“마네킹은 남자로 해 주세요.
여자와 아이와 노인은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거든요.
아내가 남자 호르몬이 들어간 피가 매우 건강에 좋다고 해서.
게다가 죽인 남자들도 모두 수배 중인 1급 살인자로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살인이 살인이 아닌 걸로 바뀔 리는 없겠지만...
자! 마지막 잔을 비우자! 건배!

 


잘 있어, 친구
죽마고우 보다 더 좋았던 친구
언제 이런 자릴 또 가질 수 있을까
만약 그런 행운이 다시 온다면
그땐 이곳을 피하자
무슨 부대찌개를 이 따위로 끓여! 발로 끓여도 이것보다 낫겠다

다른 맛집을 찾자

 


행여나 네 아내가 흡혈귀가 되더라도
네가 꼭 나처럼 처신할 필요는 없어
난 나고, 넌 너니까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원초적인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 한
......
몰라, 아무튼, 선택은 네 몫
오늘 술한잔 정말 좋았어
술값은 내가 낼게

 

 


2006년 8월 초고
2020년 2월 1일 (2고)

 

 

PS: 이 시에서 화자(주인공)은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에서 여자 흡혈귀와 살았던 중년 남자를 상상하면 얼추 비슷하다. 2006년에 초고를 썼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렛미인 영화보다 먼저 썼네. 물론 이후에 수정하고 첨가한 것도 있다. 그 시절에는 이런 느낌의 영화들이 요즘보다 흔했던 것 같다.) 이 블로그나 곧글 문자를 만들기도 전에 적었던 시(또는 매우 짧은 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