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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칼럼, 단편

[시] 지하철에서 페티시(fetish)

by 김곧글 Kim Godgul 2020. 2. 3. 18:56

사진과 시 내용과는 무관 (단지 인터넷 검색으로 올림)

 

 

 

 

지하철에서 페티시(fetish)

 

 


먼지와 매연이 콘크리트 벽을 휘어 감싸는 대도시
덜커덩거리는, 붐비는, 어두침침한 객차.
신문을 활짝 펼쳐 읽는 양복 신사, 청바지를 꽉 끼여 입은 젊은녀,
커다란 보따리를 지고타는 주름살의 아줌마, 이어폰에 귀를 파묻은 남고생,
싸구려 샴푸 향기 휘날리는 생머리 처녀, 깔깔대는 여고생,
지하 동굴을 괴성 지르며 질주하는 지하철.
그 속에 빼곡히 들어찬 무의식의 충동을 깊숙이 꽁꽁 움켜쥔 도시의 짐승들

 


착석한 내 앞에 바짝 붙어 선 교복차림의 두 여고생
확실치 않지만, 요 몇 년 사이 부쩍 짧아진 교복 스커트
그보다 확실한 것은 부쩍 날씬해진 여고생들의 다리
젓가락처럼 삐쩍 가늘다.
종아리와 허벅지의 차이가 미묘할 정도로.
두 여고생의 체형은 다르지만 다리의 굵기는 비슷하고,
얼굴 크기는 다르지만 초점을 잃은 눈빛은 닮았다.

 


본디 까무잡잡한 그 여고생의 다리를
손으로 한 번, 그냥 딱 한 번만
위에서 아래로 두루 어루만져봤으면...
순수한 땀 냄새를 맡으며, 부드러운 감촉을 느껴봤으면...

 

 

이토록 불순한 무의식의 충동을 깊숙이

꼭꼭 감추도록 오랫동안 훈련된 차분하고 강한 나의 이성적인 의식,
그건 분명히 문명화된 수컷의 이성적인 의식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우연일까? 나의 착각일까?
아니면 나를 가지고 놀고 싶었던 걸까?
내 앞에서 미끈한 다리를 거의 엑스자로 비비꼬는 여고생
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의 친구와 대화에 빠진 듯 행동하면서
힐끗 곁눈 질로 아주 미묘하게 나를 훔쳐보면서.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만개하는 도시동굴에서
바람직한 도덕관에 오랫동안 좋은 성적으로 길들여진 세파트 같은 내가,
행여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의 의식과 무의식은
이미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도덕 시스템에 꽁꽁 묶여 있는 내가
감히 더 이상 무슨 행동을 하겠는가?

 


게다가 이런 쓸데없는 사고, 충동 따윈 한 치의 용납도 허용해선 안 된다.
까딱 잘못했다간 세파트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여타 짐승들에게, 대다수 암컷들에게.

 

 

여고생들은 깔깔깔 굉장히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 정차 역에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대신
그렇게 예쁜 엉덩이를 씰룩쌜룩 흔들며 유유히 사라진다.
눈 가려진 맹수들이 우글대는 대도시의 정글 속으로

 

 

 

2002~4년 사이 어느 날 (초고)
2020년 2월 3일 (2고) 김곧글(Kim Godgul)

 

 

PS: 어떤 면에서 '보들레르(Baudelaire, Charles Pierre 1821~1867)'의 시를 흉내낸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