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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D-War) LA 촬영 탐방기

'디워(D-War)' LA 촬영 탐방기 15 (스턴트우먼)

by 김곧글 Kim Godgul 2021. 8. 23. 13:01

 

 

(2007년 9월 22일에 적었던 글을 약간 수정해서 재업)

 

 

여주인공 ‘사라’ 집 거실 벽에 한국에서 공수된 노란색 부적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장면이 있다. 부적을 붙이던 심감독이 버럭 화냈다. 부적에 한글로 적힌 어떤 문구 때문이었다. 아주 잠깐 훑어지나가는 장면이지만 불순한 생각에 빠진 자들이 악의적으로 화면을 캡쳐해서 퍼뜨리면 논란이 생길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한국과 관련된 문구가 아니다. 미국과 관련된 내용이다. 몇몇 한국 스탭들이 부적을 모두 골라냈다. 문제없는 것만 붙였다. 부적 제작과 관련된 영구 아트 직원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심감독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적은 한두 번 있었는데 그때가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심감독은 다혈질이 아니다. 오래가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후 평상시 유머러스한 평정심을 되찾았다. 촬영장 분위기는 평소처럼 진행되었다.

 


같은 저택 뒤뜰 수영장에 사라의 친구 ‘브랜디(에이미 가르시아 분)’가 이무기한테 물렸다가 떨어져 둥둥 떠있는 장면이 있다. 에이미 여배우는 그다지 좋은 성격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까탈스럽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짧은 조연이라서 가볍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표정과 행동이 이랬다 '빨리 내 장면만 끝내고 얼른 가버리고 싶다.' 촬영 때 에이미 여배우가 직접 수영장 수면에 둥둥 떠다녔던 것은 아니다. 촬영이 다소 지연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자신의 촬영 분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떠났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이 아니므로 그녀를 좋지 않게 보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특히 미국 문화에서는 그렇다. 그저 필자가 느끼기에 그녀는 머릿속으로 현실적인 상황 판단과 계산을 빨리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다소 냉정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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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몇 십 년 된 나무와 잔디가 어우러진 공원에서 먹었는데 한쪽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열심히 예행연습을 하는 무리가 있었다. 스턴트 팀이었다. 남자 두 명이 도와주고 여자가 다이빙 포즈를 취하고 매트리스 위로 몸을 던졌다.

 


처음에는 스턴트우먼이 아닌 줄 알았다. 그렇다고 스턴트맨인줄 알았다는 의미도 아니다. 필자는 점심을 먹고 커피를 들고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봤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디워 촬영 동안 봤던 여배우, 여자 스탭, 여자 방문객 통틀어서 가장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인 기준에서 말이다. 함께 걷던 한국 스탭들도 그녀의 미모에 동공이 커지는 것을 애써 감췄다. 아름다움은 각자 기준이 다르므로 어떤이에게는 그저 그렇다고 보여질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 스턴트우먼의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볼륨 있고 균형 잡힌 몸매는 동양인에게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체형이다. 얼굴도 예뻤지만 각선미까지 매혹적이었다.

 


남미계 미녀였다. '저런 미모라면 굳이 스턴트우먼을 하지 않아도...' 라고 생각했지만 워낙에 배우로서 성공하기 힘든 할리우드다보니 그녀가 택한 여배우 성공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순수하고 선한 눈빛이었다. 그녀가 대역하는 실제 연기자(에이미 가르시아)의 눈빛과 완전히 반대였다. 얼굴도 완전히 달랐다. 유일하게 키만 비슷했다. 동양적인 청순하고 순수하고 선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더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키 165 정도, 삐쩍 마른 젓가락이 아니라 살짝 볼륨 있는 건강미인 체형.

 


앞 글에서 언급했던 뱀이 휘어 감싼 중국계 여배우 제이드는 그런 캐릭터가 영화에 특별한 재미를 선사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라는 뜻이었지 개인적으로 그런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디워 촬영을 따라다니면서 "아름답다. 필자의 주제 파악을 무시하고 어떻게 발전해볼 수 없을까?" 라고 마음속에서 울림이 있었던 것은 이 스턴트우먼을 보면서였다. 미국에 머문 동안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줬던 여인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썸씽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화도 못 해 봤다. ^^;;;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스턴트우먼? 근육질 여자, 운동선수 출신, 알통... 물론 그런 스턴트우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스턴트우먼은 아니었다. 척 보면 안다. 대신 초보 티가 확 났다. 연습할 때부터 그런 티가 보였다. 운동 신경이 선천적으로 좋아 보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혹시 원래는 연기지망생이었는데 돈도 좀 벌 겸 스턴트우먼 일을 이제 막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초저녁이 되어 어수룩해지자 수영장 옆에 커다란 풍선을 만들고 그 속에 조명을 넣고 살짝 공중에 띄웠다. 낮에 봤던 허름한 수영장 뒤뜰이 환상틱한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조명 키잡이 백인이 지나치리 만큼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그랬다. 심감독은 살짝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었다. 한 장면을 찍는데 촬영으로 고민하는 게 아니라 조명 키를 잡는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그렇다고 그 때문에 "바꿔!"라고 하기도 뭐했다. 그랬다면 너무 살벌한 현장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공중에 떠올린 조명 풍선이 과열로 타버렸다. 활활.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타는 동안 화려하고 정말 멋있었다. **; 얼마 짜리 장비인지는 모르지만 풍선이니까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을 것이다.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손끝 하나 다친 사람은 없다. 대체용 장비를 가져와 설치하는 시간이 추가되었다. 그 때문에 추가된 총비용은 몇 천만원은 됐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계속 조명 키잡이가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 걸 껄쩍스러워한 심감독의 표정을 눈치챈 조나단 조감독이 당당하고 차분하게 제안한다. '조명 키잡이를 다른 스탭으로 바꾸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전혀 문제 될 건 없어요. 부담 갖지 말아요.' 다음 날부터 새 조명 키잡이가 참여했고 훨씬 빨라졌고 촬영은 지체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 에피소드는 심감독도 자를 때는 과감히 자르는 제작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마냥 사람 좋고 사람 웃기는 코메디언의 연장선에 있는 감독만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잘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 거북표 키잡이도 어차피 유니온에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영화촬영에 합류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가 직업을 잃거나 커리어에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대체 조명이 재설치 되고 카메라 배치도 끝나자 필자가 매료되었던 남미계 스턴트우먼이 등장했다. 필자는 카메라의 테이프를 점검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말고와 무관하게 필자는 메이킹을 열심히 찍었다. 스턴트우먼은 수영장으로 풍덩! 숨을 쉬지 않고 둥둥 떠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필름은 계속 돌아갔다. 쓸 부분은 죽은 여자가 수영장의 중간 정도에 떠 있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위치까지 이동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어서 정작 촬영 분을 찍을 때 숨을 참지 못하고 일어서고 말았다. 그렇게 몇 번... 콜록! 콜록! LA는 사막 날씨라 일교차가 정말 컸다. 낮에는 한여름, 밤에는 늦가을 날씨였다. 체감온도는 더 낮았다. 10월 밤 수영장 물은 얼음물이란 의미다. 초보 티가 역력한 스턴트우먼은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물을 많이 먹었다. 얼굴이 파김치가 되었다. 메이킹을 찍는 필자가 보기에도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할 수만 있다면 대신 빠져주고 싶었다.

 


결국 촬영 분을 완료하지 못 했다. 그때 스턴트우먼의 지친 얼굴, 파김치된 표정, 선한 눈빛은 무릇 남자 스탭들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상상 속에서만 그녀를 꼭 껴안았다. 필자의 온기가 그녀의 냉기를 누그러뜨렸다.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잘못했다간 범죄가 될 일이었다.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동료 선배에게 부축되어 제트 엔진 난로에서 불을 쬐며 안식을 취했다. 몇 분 후 선배들의 부축을 받으며 베이스캠프로 이동했다. 현지인 스탭들은 혼신을 다해서 할만큼 한 스턴트우먼에게 박수쳐주며 배웅했다.

 


필자는 생각해봤다. 만약 그 스턴트우먼이 한두 테이크만에 완벽하게 스턴트 과제를 해치우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촬영장을 빠져나갔다면, 그래도 필자는 지금처럼 장황하게 풀어놓을 정도로 심적으로 좋아했을까? 윤리, 에티켓을 논하는 게 아니라 인간 본능을 얘기하는 것이다. 아닐 것 같다. 그 스턴트우먼이 보호본능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녀에 대한 기억은 보통 정도였을 지도 모른다. 예쁘고 볼륨 있고 일 잘하는 멋있는 스턴트우먼 정도.

 


촬영을 못 마쳤다고 다음날 여기 또 와서 재촬영할 수는 없었다. 생략해버릴 정도로 가벼운 장면도 아니었다. 심감독은 심사숙고했다.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때 든든한 지원군이 나섰다. 통역을 담당하는 체구가 적은 한국 남자 스탭이었다. 마침 사라 친구 브랜디와 체형이 비슷했다. 그는 서둘러 여자 옷을 입고 가발을 쓰고 수영장에 풍덩! 필름 촤르르르...

 


"오케이! 굳! 베리 굳!" 심감독은 얼음물에 온몸을 던져 2, 3분 잠수했다가 파르르 떨며 수영장을 나오는 통역 스탭에게 엄지손가락을 높이 세워서 치하했다. 현지인 스탭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필자는 이 모습을 메이킹에 담으며 생각했다. '미녀 스턴트우먼의 몸상태는 괜찮을까? 행여 그녀 경력에 지장이 없기를...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꼭 성공하기를 바란다.'

 


미녀 스턴트우먼은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전혀 모른다. 영화 ‘무간도’ 조폭두목 ‘한침’의 말대로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하겠지. 아름다운 외모에 좋은 인상까지 갖춰서 어떻게든 잘 됐을 거라고 예상해 본다.

 


계속...

 


2007년 9월 22일 (초안)
2021년 8월 23일 (약간 수정)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