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감상글(Movie)

곡성 (The Wailing, 2016)

by 김곧글 Kim Godgul 2016. 7. 8. 22:33




끝날 때까지 숨 조리며 흥미진진하게 간간히 소름 돋으며 감상했던 영화는 오래만인 것 같다. 끝이 모호했다는 점이 작품의 완성도에 플러스 알파였을지 마이너스 알파였을지 명확히 선을 그을 수 없다. 평범한 소시민 주인공 종구(곽도운 분)의 가족들의 혈흔이 온 집안에 난사된 것에 대한 이유나 상징이나 메시지를 친절하게 제시하지 않은 점도 같은 알파 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킬링 타임으로 봐야지, 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관객의 넋을 빼놓았으므로 영화의 흥행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나홍진 감독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작품성의 기준을 높게 잡고 만들었던 이전 작 ‘황해’가 기대치에 못 미치는 미지근한 흥행을 해서 나름 고심을 했었는지 이번 영화에서는 확실하게 동서양에서 널리 인기 있는 ‘좀비‘ 장르를 마치 스팸을 김치찌개에 넣어 새로운 맛의 부대찌개 닮은 것을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젊은 20대 만화가, 장르소설가가 서양적인 (또는 일본적인) 좀비 장르의 뼈대와 바탕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적인 것을 주도적으로 사용하지 못 하고) 익숙한 흥미위주의 장르물을 만들어내는 것과 확연히 다르게 군계일학(群鷄一鶴)적으로 한국적인 좀비장르물을 만들어낸 작품성의 공로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감독이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만들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투자를 미국 회사에서 많이 받았으니 미국에서의 흥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좀비와 기독교적인 것을 한국의 토속적인 무속신앙과 잘 섞어놓는 모험을 잘 성공시켰다. 결과적으로 어떤 측면에서 (감독은 이 말을 좋아하지 않을지 몰라도) ‘신선하고 독창적인 좀비장르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초반부터 중반까지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잔재미를 간간히 첨부한 것도 현시대 영화관객의 취향을 염두한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시종일관 저기압이고 침울하게 무게를 잡았다면 후반부의 어둡고 암울하고 소름 돋는 쇼크를 폭발시키지 못 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알레고리(allegory)적인 느낌이 드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최초의 단서는 일본 노인이 한국의 시골마을 산속에 홀로 거주하고 있고 갑작스런 마을의 살인사건과 그를 연결시켜놓은 점이다. 일본인이 한국의 어떤 마을에 섞여서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일본 남자가 홀로 한국 시골마을 산속에 정착해서 들짐승을 날것으로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희소한 상황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하다. 만약,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고 단지 외지인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일본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랬다면 굳이 오해를 살 가능성이 높은 일본 남자를 선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영화 중반부터 등장해서 강한 존재감으로 돋보인 무당 일광(황정민 분)은 비록 직업은 토속적인 무당이지만 마을의 외부에서 왔다는 점, 외양이나 행동이 대도시적이고 남성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인하여 상징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바로 근현대사에서 패권주의적인 ‘미국’이다. 즉, 종구의 장모가 손녀(종구의 딸)을 구하려고 외부의 힘을 불러들이는 이야기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한국이 미국의 힘을 불러들이고 의존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당연히 산속에 홀로 기거하면서 요상한 꿍꿍이를 벌리고 있는 일본인은 일본 세력을 뜻하는데 특히 군국주의적이고 우익적인 일본을 상징한다. 그가 혐의를 받고 있는 수많은 산 사람들을 죽게 만든 일이나, 화면으로 넌지시 보여준 것처럼 죽은 사람을 살려내려는 작업이나 과거 태평양 전쟁 시절의 제국주의 일본이 암암리에 시도했던 만행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독버섯 같은 것으로 감염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정체불명의 무엇이 마을 주민을 산 송장으로 만든 모습은 마치 원폭에 기인한 방사능 오염에 의한 인체 질환을 상기시켜준다. 

혹자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일본을 상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굳이 일본인이 산속에 왔다고 설정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상징했을 것이다, 라고. 그러나 한 가지 더 추가되는 상징성 때문에 그런 생각에 힘을 실케 되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젊은 여자(이하 소복녀, 천우희 분)는 일본의 전후세대 및 한국의 친일적인 성격의 사람들을 상징하는데 등장하는 장면 수도 많지 않은 소복녀를 관객에게 오해 없이 상징하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소복녀와 연결성이 깊은 산속의 일본인 캐릭터를 잘 알아볼 수 있게 (군국주의 일본을 상징하게) 설정할 필요성에 절감했을 것이다.      

소복녀를 곡성 지역의 산신, 지주신, 터주신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왜 진작부터 마을 사람을 공격하는 일본인과 싸우지 않았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종구의 가족이 몰살되도록 주도적 또는 조력적 행동을 한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와 더불어, 일본인과 소복녀가 서로를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결코 대결하지 않은 점 (소위 먹이감이 있는 지역에 원정 왔기 때문에 굳이 둘이 싸울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무당 일광이 새벽에 홀로 종구의 집을 방문했는데 문앞에서 소복녀를 대면하더니 흥건히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해내는 장면 (마치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의 초기 증상 같다. 즉, 소복녀가 일본의 세력이고 젊고 강하다는 것은 전후세대를 상징한다) 등으로 소복녀의 상징성을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무당 일광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마을 외부에서 유입되어서 종구네 가족을 구하려고 파워를 행사하는 장면은 미국이(좀 더 정확하게는 미국의 패권주의자 또는 군수업자) 한국에 군사적으로 영향을 끼친 역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일광이 일본인과 같은 기저귀 형태의 팬티를 입고 있었다는 것은 두 인물이 같은 부류의 종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종구네 집의 잔혹한 살육의 현장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구식 사진기로 찍는 장면을 통해서도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사진을 여러 장 찍었었다는 것도 보여주었고, 일본인도 자신의 거처에 찾아온 신부 지망생을 구식 사진기로 찍는 장면을 교차로 보여주고) 그가 일본인과 궁극적으로는 같은 부류의 존재라고 상징하고 있다. 무당 일광이 악귀를 퇴치하는 행적은, 마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쟁을 하며 각종 무기를 소모하는 군수업자의 이중적인 모습과 닮았다. 선(善)의 영역에 있지만 부득이하게 악의 이면도 함께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인 한계를 지녔다. 그러나 종구나 그의 장모처럼 평범한 사람은 일광 같은 권력자의 보호를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류의 문명이 태동된 이래 초권력자와 나머지 사람들 간에 맺어진 운명 같은 측면이 있다. 초권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 것이 평범한 사람의 운명이기도 하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세계사에서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종구네 가족은 단지 운이 나쁜 경우일 뿐이었다, 라고 생각하면 그들의 예상치 못한 불행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이 영화가 상징하는 것이 이것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거의 아귀가 들어맞는 것도 전혀 무시할 수 없다.

한편으론, 관객이 너무 해석하려고 집착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알송달송한데 맹백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보이는 대로 감상되기를 바라는 영화들도 많이 있다. 이 영화도 그런 부류일 수도 있다. 또는 관객 각자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마치 흰도화지를 제공하고 스스로 느낀 이야기를 그려보도록 하는 것 같은 맥락일 수도 있다. 필자의 해석이 정답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적어본 것이다.


영화 ‘곡성’,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소름 돋으며 흥미롭게 감상했다. 영화를 본 직후 필자 홀로 집에 있을 때 형광등을 켜 놓고 자야 했다. 어두운 방에서 나 홀로 잠들기 무서웠다. 또는 동트는 시간까지 다른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자 비로소 잠든 적도 있다. 물론 지금은 아무 시간에나 불 끄고 선풍기 틀어 놓고 잔다.


2016년 7월 8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