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쉽게 이해되고 즐길 수 있지는 않았다. 살점을 잘 뜯어내려고 해도 가시가 딸려서 씹히는 생선 같다. 그렇다고 고차원적이거나 철학적이어서 소화하기 불편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인간이 사랑하는 반려자를 만나 살아가는 결혼생활과 사회에 관하여 각자가 생각해볼 미끼를 던져주는 정도? 흔한 로맨틱 장르처럼 익숙하고 달콤한 메시지를 먹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양가 있는 뭔가가 관객의 영혼 속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어쩌면 통속적인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진 사람들에게 냉정하고 현실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고 자신만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가치관을 수정, 보완, 재정립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아쉬운 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영상미는 담백하고 깔끔한데 간간히 느껴지는 파편적인 메시지는 냉혹하고 건조하고 까끌하다.  


이 영화의 세계관에는 세 가지 조직사회가 등장한다. 호텔, 숲, 도시인데 비현실적이고 개념적이다. 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보완적이다. 영화 속 인간은 반드시 셋 중에 한 곳에 소속되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선택이 널려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간단히 말해서, 도시는 현재 결혼생활이 유효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이다. 호텔은 반려자가 없거나 결혼생활이 파탄난 사람들이 투숙되어서 새로운 반려자를 찾는 사회이다. 숲은 혼자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사회인데 호텔이나 도시에 들어가 살 수는 없고 숲에서 살아야 한다. 혹시 유럽의 중세시대 장원제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어느 날 부부관계가 파탄난 주인공 데이비드(콜린 파렐 분)는 일명 ‘도시(city)’에서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비상식적인 호텔에 투숙하게 된다. 그렇게 된 것은 도시의 사회적 규범 때문인 것 같다. 혼기가 찼지만 결혼을 못 했거나, 결혼생활이 깨진 사람은 이런 호텔에 일정기간 투숙해야하고 그 동안 새로운 짝을 찾아야 하는데 만약 새 반려자를 찾지 못 하면 동물로 변하게 되는 처벌을 받는다. 이미 개로 변하게 된 형을 데리고 호텔에 투숙한 데이비드는 혹시 변하게 될 지도 모를 동물을 선택해달라는 호텔 매니저의 요청에 ‘랍스터(lobster)’라고 대답한다.  

호텔에 투숙한 사람들은 금연, 자위 금지 같은 몇 가지 규범을 지켜주고 편안하게 생활하며 각자의 반려자를 찾는다. 그런데 반려자를 결정하는 내용에 특이한 점이 있다. 세 가지 사회만큼 비현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상식적이지도 않다. 뭐냐 하면, 반려자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살펴보는 것은 자신과 닮은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에서도 그렇긴 하지만 반드시 결정적인 것은 아닌 것과 대비된다). 자신의 어머니가 먼저 입소되어서 늑대로 변했다고 발표했던 젊은 남자는 어떤 여자와 사랑의 감정이 통해서가 아니라 동물로 변하는 것보다 낫겠다며 그녀가 시시때때로 코피를 자주 흘리는 것과 닮아 보이려고 일부러 자신의 코를 책상이나 벽에 부딪쳐서 코피를 흘리게 한다. 둘은 커플이 되었고 호텔에서 몇 주간 잘 지내면 도시로 되돌아가 살 수 있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며칠 후에 주인공 데이비드가 젊은 남자 내외가 최종 테스트로서 거주하는 요트에 침입해서는 그가 코피 흘리는 것은 결혼하기 위한 거짓된 연출이었다고 여자에게 말해주지만 그녀는 동요하지 않고 남편 젊은 남자와의 결혼생활 테스트를 계속 진행한다. (이 부분은 관객으로 하여금 각자 나름대로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 젊은 남자에게 영향을 받은 데이비드는 감정과는 무관하게 아니 전혀 자신과 다른 성격의 여자와 커플이 된다. 그가 그녀의 냉혹한 사이코패스 성격과 닮았음을 거짓으로 꾸며서 이룬 결과이다. 어떤 여자라도 웬만한 남자보다 눈치가 백배는 빠를 것이다, 라는 속설이 있듯이 냉혹한 여자는 어딘지 의심스러워 그가 정말 자신의 성격과 닮았는지 테스트를 하는데 그것이 사이코패스적인 냉혹함 자체였다. 데이비드가 애지중지 동거동락하는 개로 변한 형을 잔인하게 죽인 것이다. 너무나도 큰 슬픔으로 인해 데이비드는 더 이상 거짓된 성격을 가장할 수 없게 된다. 냉혹한 여자는 거짓된 마음으로 결혼한 그를 이끌고 당장 동물로 변하는 처벌을 받도록 매니저에게 끌고가는데... 데이비드는 가까스로 반전을 꽤하여 냉혹한 여자에게 형의 복수를 해주고 (동물로 변하게 하고) 호텔을 탈출한다. 숲에서 우연히 독신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사회에 편입되어 살아간다. (이 부분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관객에게 던져준다. 그때까지 규칙을 잘 지켰던 주인공 데이비드는 형을 죽인 냉혹한 여자에게 똑같이 되갚아주고 호텔을 무단이탈한다. 즉, 반사회적인 행동을 저지른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본인만의 책임은 아니다. 사이코패스 여자와 억지로 결혼할 수밖에 없도록 조장한 호텔이라는 사회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고 영화는 지그시 눈을 감고 시치미 떼고 있을 뿐이다)

호텔에서는 커플을 이루어 잘 살도록 교화하는 강의도 있고 자유롭게 생활하는 개인시간도 있다. 그 외에 매우 특이한 이벤트가 있는데 그것은 사냥이다. 단체로 숲에 들어가서 마취총으로 숲에 사는 인간을 사냥하는데 호텔은 투숙객에게 생포한 개체만큼 비례하여 숙박기간을 연장시켜준다. 이것은 투숙객들이 사냥을 열심히 하게 되는 동기부여로 작용한다. 이때 숲에 사는 사냥감 인간들은 독신주의자들이다. 데이비드는 이들 사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사냥이 은유하는 것은 어떤 조직이나 사회가 자신의 유지보존과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반대되는 성향의 조직이나 사회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단점을 들춰내는 것이다. 결혼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독신주의자를 비난함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위로받고 자신이 열정적으로 짝을 찾는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회는 유지보존을 강화한다.)  

데이비드는 숲속에서 육체적으로는 불편하겠지만 정신적으로는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사회에도 호텔 사회 못지않게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숲속 사회에서는 반려자를 찾으려는 수작조차 허용되지 않는데 만약 그러다 걸리면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을 향한 욕망은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인간은 하지 말라고 통제하면 더 하고 싶고, 하라고 내버려두면 오히려 하지 않는 속성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데이비드는 어떤 여인(레이첼 와이즈 분)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데이비드는 그 여인에게서 자신과 공통적인 요소로서 근시를 찾아냈다. 둘은 마치 현대사회에서 사내연애를 하듯이 둘 만의 비밀스런 수신호로 서로를 향해 사랑을 표현한다. 둘은 숲속을 이탈해서 도시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데이비드와 근시여인은 숲속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리더에게 들켜서 처벌을 받게 된다. 리더는 근시여인을 완전히 장님으로 만든다. 근시여인은 데이비드는 놔두고 하필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었는지 원망하며 리더를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리더는 영악하게 빠져나간다. (이 부분에서 근시여인도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는 반려자보다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달콤한 이상을 표현했던 것과 대비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반려자를 향한 이타적인 사랑을 할 것 같았던 데이비드도 막상 도시로 탈출하는 것이 성공하자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자신의 눈을 멀게 해서 그녀와 공통점을 갖겠다는 결심이 흔들린다. 영화는 그가 어떻게 결정했는지 확실히 알려주지 않고 끝낸다. (특수한 상황에서 이지만, 인간은 남녀 예외 없이 사랑 앞에서 얼마든지 이기적일 수 있다고 영화는 냉정하게 말하는 것 같다) 한편, 데이비드가 스스로 장님이 되도록 장님 여인도 “눈이 멀게 되니까 다른 감각이 더 살아나는 장점도 있고 좋다.”는 식으로 부추기기도 한다. 장님 여인은 데이비드가 눈이 멀지 않는다면 자신을 떠나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붙잡기 위해서 그렇게 부추겼을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이기적인 것뿐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비현실적인 이 영화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장님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서로의 감정에만 집중하겠다는 협약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어 보인다.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인간과 사회와 사랑과 결혼에 대하여 관찰자적 시점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준다. 결혼 따위를 하지 말라거나 사회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마음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라는 뜻이 아니라, 만약 사랑과 결혼이 파멸되었을 때 사람들 사이게 발생하는 부정적인 폐해(비난, 비방, 왕따, 소외감, 절망, 자괴감...)이 사실은 사회에서 만들어낸 인위적이고 유명무실한 허깨비라는 것을 깨닫도록 간접적으로 예술적인 형식을 빌어서 이해시켜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현재 사랑을 하고 있거나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은 거의 모두가 이기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에 반려자를 좀 더 이해해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원래 이런 식의 비현실적이고 개념적인 설정을 즐겨 사용하여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초기작 ‘송곳니’를 만들 때부터 그가 만든 영화의 특징을 알아볼 수 있다. 아무튼 쉽게 볼 수 없는 형식의 영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차기작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쉽지 않고 달콤하지도 않지만 쓴 약이 몸에 좋다는 평범한 속설을 위안삼아 다시 감상하도록 유혹받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2016년 7월 13일 김곧글(Kim Godgul)



  

관련글: 송곳니 (Dogtooth, 2009) (같은 감독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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