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감상글(Movie)

[감상글] 청년 마르크스(The Young Karl Marx, 2017)

by 김곧글 Kim Godgul 2021. 6. 7. 01:20

 

 

요즘 같은 시대에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 ‘사상’, ‘주의’ (이렇게 말하면 선입관으로 인하여 다른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므로 ‘철학’이라고 부르겠다)이 아닐까 생각된다. 19세기에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저술할 때만 해도 산업혁명으로 급격하게 부강해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사례를 참고해서 만든 철학이었다. 당시는 수많은 남자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수의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을 하지만 급여로는 근근이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정도였던 시대였다. 상대적으로 자본가들은 큰 돈을 벌어들였다. 정부가 경제적 시장에 인위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시대였으니까, 그야말로 자본가들에게는 전무후무한 유토피아였고, 노동자들에게는 디스토피아였다.

 


현시대와 그때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최소한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후진국에서조차 불법적으로 은밀히 자행되고 있을 정도로 금지되어 있다. 소위 노동자의 권익은 과거에 비하면 많이 향상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칼 마르크스가 의문을 품은 궁극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확정되지 않았다. 비록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부가 증가하는데 왜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심해지는가?’ 어쩌면 이것은 딱히 산업혁명에서 현시대까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인류의 문명이 태동했던 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나마 그당시에는 신과 마법이 살아있었고 엄격한 신분제도가 종교와 함께 생활의 일부였기 때문에 사유재산에 관해 과몰입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부의 불균형의 가속화와 심화’, 이것은 인류의 문명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따라다니지만 영원히 해결하지 못하는 숙제, 딜레마,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일 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칼 마르크스의 청년 시절을 다룬 영화이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정확하지는 않다. 다른 곳에서는 ‘진화론’이라고 그랬던 것 같다. 그 외에 여러 후보들이 있다. 다만, 이렇게 언급될 정도로 많이 팔렸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자본론’을 본격적으로 저술하기 이전에 영국의 (오늘날로 치면 재벌 2세) ‘엥겔스’를 만나서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을 공동 저술하던 시기를 다뤘다. 서로의 특출남을 진작에 알아보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혈기 왕성한 젊음과 열정을 기반으로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기도 했다. 비록 진심으로 원했던 유토피아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다양한 경험이 불멸의 저작 ‘자본론’을 낳는데 크게 일조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표현된 사회활동 시기가 끝나고 칼 마르크스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어마무시한 존재감의 책 ‘자본론’을 저술하는데 매진했다고 영화의 크레딧은 전한다.

 


특이한 점은 두 사람(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당시 혹독한 노동환경의 공장에서 죽도록 일만하다가 어느 날 문뜩 당시의 사회 시스템이 잘못된 거라는 깨달음을 얻어서 사회 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한국적으로 비유하자면 조선시대 후기에 신분타파 사회개혁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파급력 있는 책을 저술한 사람이 노비나 천민 출신이 아니라 놀고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 없는 사대부 양반 출신이었다는 얘기다). 칼 마르크스는 대학 교수 자리를 희망했던 천재(언어에 특출난 재능)이었다. 엥겔스는 혹독한 노동환경의 공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자본가 아버지를 둔 아들(재벌 2세)였다. 심지어 칼 마르크스의 부인조차 당시 독일에서 유명한 부유층 가문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노동운동과 묵직한 책을 저술한 것은 아니었다. 양가와 단절했기 때문에 칼 마르크스 부부는 생활비에 쪼들렸고 부득이하게 엥겔스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엥겔스가 천재 칼 마르크스의 다된 명작에 숟가락만 얹은 기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도 그 나름대로 칼 마르크스 못지 않은 천재였고 사회개혁주의자(문명비판주의자)였다. 역사라는 관념적 신이 문뜩, 타고난 성격과 가정환경이 너무나 달랐던 두 사람을 만나게 했고 두 사람이 시너지 효과를 내서 인류 역사의 큰 강줄기에 변화를 주게 되는 결과물인 ‘자본론’을 낳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소위 똑똑하고 지적 재능을 갖춘 마르크스 부부와 엥겔스가 위대하게 보이는 이유는, 보통 부유한 재력의 배경을 갖춘 사람들은 그것을 잘 활용하여 더 큰 재력을 쌓고 잘 유지하고 향유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 낙, 의의로 생각한다. 대개 인간의 99%는 그렇다. 그것을 또 나쁘다고 볼 수만도 없다. 인간이니까 인지상정이니까. 그런데 마르크스 부부와 엥겔스는 보통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살지 않고 자신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의 삶의 개선을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인생을 사용했다. 누군가는 명성을 쫓았을 뿐이라고 가볍게 치부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설령 그렇더라도 이들의 일평생이 낮은 사람을 위해서 (후대에게 좋은 사회를 만들어주려고) 수고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들이 더 위대해 보이는 것이다.  

 


이 영화는 칼 마르크스의 평생을 다룬 전기영화는 아니다. 제목대로 젊은 시절, 아이를 두 명까지 낳았을 때, 영원한 친구이자 조력자 엥겔스를 만나서, 단순히 책과 신문의 칼럼만을 저술하지 않고 실제로 사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했던 시기를 다뤘다. 그가 단순히 탁상공론가(또는 몽상가)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독일의 어떤 대학에서 대학교수직을 맏을 수 있었다면 생활비는 그럭저럭 벌 수 있었기에 부인에게 허구헌날 눈총과 잔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두 딸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고 노후까지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을 테지만, 영국의 엥겔스를 만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어쩌면 ‘자본론’ 같은 불멸의 명작을 저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가 ‘자본론’을 쓰지 않았다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인한 피 튀기는 수많은 살육의 20세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한편 다른 쪽으로 이런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가 ‘자본론’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 현시대에 자본가와 노동자의 실제 수익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클 지도 모른다고. 모든 기업체에서 가족의 세습 운영은 기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선진국에서조차 아이들이 학교가 아니라 공장에서 하루 8시간 이상 노동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세상일 지도 모른다고.

 


더 깊이 갈 정도로 필자가 이 분야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저 상식 정도의 수준일 뿐이므로 이쯤에서 생략한다. 필자는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정식으로 한글자막이 만들어지기 전에 한 번 (그때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고 영화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칙칙한 느낌이 매우 좋았다) 정식 한글자막으로 또 봤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종종 보여지는 칼 마르크스의 집안에는 필사된 종이들이 여기저기 어질러져서 쌓여있는 배경이다. 당시는 신문과 책이 제작될 정도로 인쇄술이 보급되었지만 아직 타자기가 발명되지는 않은 시대였다. 좁은 방구석에 아이들도 있는데 한두 개의 탁자에는 필사로 적힌 종이들이 널부러져 있다. 악필이었던 칼 마르크스를 대신해 부인이 대필 또는 출판업자가 알아 볼 수 있도록 옮겨쓰기도 한 것 같다.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입으로 말하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텍스트를 필사한 것은 부인이었다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필사한 종이 한 장 한 장을 모으고 모아서 그리고 검토하고 검토해서 출판한 책이 그 유명한 ‘자본론’인 셈이다. 만약 그 필사의 종이들이 지금 보존되어있다면 한국인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훈민정음’의 가치와 맞먹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예술성을 첨가한 미려한 전기 영화 스타일도 아니다. 또한, 신랄하고 감각적으로 시사성이 있는 현실을 비판하는 다큐 스타일도 아니다. 다소 무겁고 잔잔하고 칙칙한 분위기가 일관되게 흐르는 드라마 장르이다. 그 당시에 주인공의 삶을 관객이 눈으로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고증대로 담아내려고 노력한 것 같다. (만약 이런 무거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느낌의 영상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객이 그나마 좋은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또는 무거운 내용과는 별개로 어떤 사상가(작가)가 글을 써서 불멸의 책을 출간하는 과정의 일부를 엿보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관객에게도 좋은 감상이 될 것 같다.

 


2021년 6월 7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