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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신조어

신조어: 2012년에 낼게

by 김곧글 Kim Godgul 2011. 3. 1. 23:46

지인이나 주변 사람과 일상적인 대화 중에 내가 문뜩 "어차피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할텐데요 뭐."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애써 잠재우지만 두 눈이 다소 커지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심각하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같은 문장이라도 누군가의 어떤 뉘앙스냐에 따라 다른 뜻을 내포하겠지만 내가 의도한 뜻은 '그러니까 현재 걱정거리를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고 블랙(black) 코메디적인 생각으로 슬기롭게 승화시키며 살자.' 정도이다.

2012년에 낼게

이 말도 블랙 코메디적이고 자조적인 뉘앙스가 담겨있다. 다음 대화체 예문을 보자.

붉은 노을이 검게 변하는 서쪽 하늘, 어떤 서울 거리에서 갑과 을이 만났다. 두 사람의 차림새, 갑은 꼬지지하고 을은 산뜻하다.

갑: 와~ 잘 됐다 그렇잖아도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을: 며칠 전에도 봤는데, 왜 이리 달라붙으실까?
갑: 널 볼 때마다 반갑고 마구 생기가 돋아서 그렇지. ㅋㅋ...
을: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혹시 또 그거...?
갑: (촉촉한 눈빛으로 끄덕 끄덕)
을: 오늘은 안돼. 선약이 있어.
갑: 오~ 제발. 며칠 굶었더니 혈관이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어. 난 꼭...
을: 췟... 말이나 못 하면... 그 집(the house)의 그게 그렇게 좋아?
갑: (단오하게 고양이의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응.
     난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그 집의 스파게티를 꼭
     배속에 채워줘야만 움직일 수 있어.
을: (한숨) 니 고급스런 뱃대기 취향 만족스켜주느라 내 쥐꼬리만한 지갑은
     사막처럼 매말라 간다... (씁쓸해하면서 체념하는 표정)
     그건 그렇고... 넌 언제 낼거야?
도대체 그 초유의 명작이 언제 팔려서
     크게 한턱 낼거냐구?

갑: (양손가락을 부딪치며 조물락 거리며) 조... 조만간...
을: 맨날 조만간 조만간.
갑: ...... (고개를 들고 또박하게) 2012년에 낼게.
을: 췟... 말이나 못 하면... 가자 그 집으로.

두 사람은 스파게티를 잘하는 그 집(the house)으로 향한다.

이 글에서 빈대 컨셉의 '갑' 캐릭터는 "2012년에 낼게"라고 말하는데 이 문장은 실제로 정말 '2012년에 거하게 한턱 사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내포된 정확한 뜻은 '나도 간절히 그러고 싶지만 정확히 기약할 수 없어'라는 뜻이다. 왜 이런 뜻이 성립될 수 있냐하면, '2012년'이란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즉, 2012년은 지구가 멸망하는 날이라고 최근에 유행하는 가십 거리다. 2012년이 다 가기 전에 지구가 멸망하면 한턱을 내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갑 캐릭터의 '2012년에 낼게'라는 말은 난처한 상황을 얼버무리고 모면하려고 한 최신 관용구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있는 그대로 "기약할 수 없거든.", "돈 생기면 안 내겠냐?".... 현실 그래로 말하면 ... 왠지 더 울적하고 척박한 삶이 된다. 그래서 다소 블랙 코메디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참고로 '블랙(black) 코메디'를 '바움(baum) 코메디'라고도 한다 --;)

이제부터 친구에게 술한잔 얻어먹고 쑥쓰러워하거나 미안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당당하게 고양이의 맑은 눈빛으로 대답해주자.

"2012년에 낼게", "2012년에 살게", "2012년에 쏠게."

주의할 점은 2011년, 2013년, 2014년... 등등 다른 년도를 쓰면 안 된다. 그것은 진짜로 그 년도에 한턱 내겠다는 사실적인 문장이 된다.

또한, 만약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하지 않고 2013년이 된다면 그때에는 다른 용도로 변경된다. 즉 과거형에 쓰인다. 2013년 이후에 친구에게 술이나 저녁을 얻어먹고 '너는 언제 쏠거냐?'라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해준다.

"2012년에 냈잖아. 기억 못 하는구나. 알았어. 조만간 다시 살게."
(상대방의 기억력이 약한 경우에만 사용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할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냥 재미로 하는 이야기이고 현대인의 불안한 직업 생활, 노후 대책, 불확실한 자신의 인생을 중화시키는(위로하는) 집단 무의식 창작 이야기쯤 된다고 생각한다.


2011년 3월 1일 김곧글


ps: 2012년이야 어찌됐든, 올해는 꼭 바움[=black]한 밤 창문 넘어 쇼파 또는 하얀 침대에서 과자를 커피에 찍어먹고, 아이스크림을 녹여야겠다.
창문과 쇼파, 밤과 침대, 커피와 아이스크림, 이렇게 지새우는 밤을 'black & white all night'라 부른다. (방금 떠오른 신조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