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칼럼, 단편

[칼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창궐을 겪은 후 느낀점 10가지

by 김곧글 Kim Godgul 2020. 4. 27. 14:35

인터넷 검색으로 구한 사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창궐을 겪은 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 점 10가지

 

 


1. 막연하게 선입견을 갖고 있던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이라는 두리뭉실한 등급이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신종 바이러스 앞에서는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미와 유럽 같은 선진국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과학과 이성을 기반으로 잘 다져진 사회 시스템에서 모범적으로 잘 대처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번 사태의 경우에는 선진국이나 중진국이나 후진국이나 특별히 안전한 곳이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현시대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예전의 전방과 후방과 외진 지역 같은 것이 따로 없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신종 바이러스 앞에서 특별히 강한 인종이나 민족도 따로 없었다. 인간은 다 똑같이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은 나가올 미래에 수많은 인종들이 어느 국가나 지역에서 특별히 차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식의 바탕에 플러스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2. 대도시에 사는 것의 단점을 재확인하였다. 미국 뉴욕 시가 대표적인 예이다. 꼭 대도시가 아니라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유동인구가 많은 주거지의 (비록 장점도 분명히 많지만) 이번 질병 바이러스의 경우에는 확실히 강한 단점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단독주택, 전원주택, 중소 규모의 도시 또는 농촌이나 산촌에서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것의 장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과밀하게 밀집한 지역에 사는 것은 결코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당장 산촌의 한적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창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3. 가족 또는 한 지붕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동안 바쁘게 자신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자가격리’ 또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게 되면서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을 좀더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된 듯하다. 조부모, 부모, 형제자매, 친척, 애완동물과 이전보다 더 밀착해서 살게 되는 의도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마치, 컴퓨터에 몰입해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컴퓨터 또는 인터넷 연결이 고장나서 잠시 컴퓨터 앞을 떠나서 자신의 집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자신의 과거 애장품(책, 만화책, 레코드판, 장난감, 카메라, 악기,... 등등)을 다시 만져보게 되면서 느끼는 좋은 감정과 비슷하다. 가족 구성원 각자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4. 아무래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까 평소의 생각과 관심과 주의가 외향으로부터 내향으로 전환된 시간이 늘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좀더 살펴보게 된 거라면... 이것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사회현상이라면, 전 세계의 문화와 예술의 기저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비록 당장 확연히 눈에 띄지는 않을 지라도 말이다. 한없이 가볍고 찰나의 쾌락을 쫓는 요즘 시대의 문화에서 다소 변화하여 심연적이거나 은은하게 메아리치는 예술 작품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마치 2차 세계 대전을 겪고 나서 추상미술과 전위예술(아방가르드)이 급속도로 발전했던 것처럼 말이다.

 


5. 바로 위에 것은 다소 고상하고 이상적인 바람 쪽에 가깝고, 대개는 집에서 그동안 생각만 했던 맛있는 요리를 해먹던가, 밀린 빨래를 하거나, 녹슨 운동 기구를 만져본다던가, 구석구석 먼지를 제거하거나, 방바닥의 머리카락을 줍던가, 화장실의 검댕을 제거하던가, 싱크대와 가스레인지의 오물과 기름때를 청소하던가 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형광등 밑 또는 코 밑 주변을 살펴보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을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6. 다른 국가의 경우에는 각각 다른 상황이겠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에 사이비종교 집회당이 있을 때 이번 사태 이전까지는 자신이 신자가 아니라면 그만이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었고 또 별문제 없이 공존했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주변에 있는 사이비종교가 절대로 자신과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확실하게 있다. 누군가 어떤 종교를 믿고 안 믿고는 철저하게 그 사람 자유이고 그 사람 소관이다(이런 종교적 무한 자유는 수많은 사이비 종교를 양산하는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다만, 그 어떤 종교가 지역사회의 보편적 질서와 존엄에 반하는 어떤 이상한(질서를 혼란시키는) 행동을 저지르지는 않는지 (적어도 해당 종교 지도자들도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또는 실수로 행동할 수도 있으므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막연하게 내가 믿지도 않고, 행여나 믿게 될까봐 겁을 먹고 앗사리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가는 어느 순간 나와 지역사회가 치명적인 위협을 당하게 되고 해당 종교와 전혀 상관없이 살던 사람과 그의 가족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제부터라도 무관심을 떨쳐버리고 지속적으로 잘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을 장점으로 볼 수 있겠다.

 


6. 공중파 방송 중에서도 공영방송의 필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일부 국민들은 왜 시청료를 매달 꼬박꼬박 전기세를 내듯이 지불해야하는지 불만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공영방송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하루 종일 (다른 공중파 방송에 비해서 많이 그리고 CF도 없이) 국내외 ‘코로나19’관련 새로운 뉴스를 정확하고 빠르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했는데, 이것이 유익했을 뿐만 아니라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적절한 경각심을 갖추게 하는데 요긴하게 일조했다. 지금까지 ‘전 국민이 공영방송국에 시청료를 매달 꼬박꼬박 내야하는가?’라고 의문을 품었던 일부 사람들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공영방송이 매우 요긴하고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 것 같다.

 


7. 전 세계가 비록 국가체제나 권력층의 특성은 각양각색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단지 신종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전 세계 경제가 이렇게까지 거대하게 휘청거릴 줄은 (전문가들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고 하겠지만) 일반인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아니, 일반인들은 평소에 자신의 코앞에 당면한 생계 이외의 것에 (게다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것에) 그렇게까지 신경쓰며 걱정하고 대비하며 살아야 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자영업자는 뜻하지 않게 엄청난 경제적 압박에 직면했고, 어떤 중소기업에 다니는 월급쟁이는 실직의 위협에 목구멍이 타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나 지자체는 재정적인 지원을 어떻게 해야 효과적일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국가 간의 교류와 교역에 높은 장벽이 세워지는 바람에 수많은 기업들이 경제적 타격을 면할 수 없었다. 코로나19 덕분에, 전 세계 수많은 국가들이 모래알처럼 개별적으로 자국우선주의 경제정책을 펼치고 있던 현시대 주류 흐름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언젠가 카오스 이론을 쉽게 설명했던 ‘나비효과’가 이번 사태를 잘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바이러스의 작은 꼼지락거림이 다른 대륙으로 쉽게 이동해서 대량 살상과 대량 실업 등의 경제적으로 큰 파국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향후에도 분명히 이와 비슷한 사태는 또 발생할 것이다.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가 전 세계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던져진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8. 이번 사태로 국가체제의 우월성을 따지는 것은 다소 부적절하지만, 짧은 식견으로 생각해보자면, 국민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가체제가 이번 사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국가체제의 경우보다 치명적인 바이러스 공격에 취약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로 얼핏 든 생각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서 국가의 강제적인 통제를 따르지 않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기 때문인 것 같다. 만약 단 한 명이라도 정부의 통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바이러스 감염자가 있다면, 경우에 따라서 매우 치명적인 전파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함부로 막 대할 수 없는데 반하여 (그를 합법적으로 강제 실행시키는데 다소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때는 이미 바이러스가 널리 확산된 후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국가에서는 개인의 인권 따위는 일시적으로 철저히 무시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발빠른 강압 통제를 실행해서 바이러스 확산을 조기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향후에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렇게 치명적으로 확산되는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 어떻게 하면 좀더 신속하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지(공공의 안녕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합법적으로 빠르게 통제할지를) 미리미리 고심해서 세심한 부분에까지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민주주의가 아닌 국가체제보다 훨씬 복잡하고 많이 대비해야할 것이다) 교훈을 얻게 되었다.

 


9. 위의 내용들과 전혀 별개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도 있다. 바로 이번 사태가 전 세계를 강타한 동안에, 지구상 어느 땅에서나 대기의 질이 매우 깨끗해졌다는 점이다. 수많은 공장의 굴뚝과 자동차의 배기통의 먼지와 매연이 본의아니게 내뿜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가 인격체를 갖춘 존재라면 얼마 만에 신선한 호흡을 제대로 하는 거냐며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수많은 동식물들도 동변상련이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것이 지속될 수 없다는 현실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아쉽고 안타깝다. 그러나 코로나19 덕분에 산업혁명 이후 진정으로 깨끗한 대기를 체험했으니 이것을 잘 기억해서 이번 사태 이전의 쾨쾨한 대기가 최근 몇 주 동안의 대기로 만들어지도록 전 세계가 꾸준히 노력하게 되기를 희망해본다.

 


10. 끝으로 이번 사태에서도 빈부격차가 비례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비록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감염될 확률이 똑같다고 볼 수 있지만, 처한 계층적 환경이라는 변수가 추가되면 많이 달라진다. 가난한 사람의 감염 확률이 훌쩍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치료가 진행되고 완치되기까지도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고 변수도 다양하지만) 빈부격차가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로 인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강타하는 경제적 타격을 누가 더 치명적으로 당하느냐를 살펴봤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치명적으로 받는다. 물론 어떤 일부 부자들은 예를 들어 잘 되던 사업체를 접을 수밖에 없어서 가난한 계층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다수를 살펴봤을 때 빈부의 격차에 따라 어려워진 경제 상황을 이겨내야 하는 전투에서 창고에 보급품(의식주를 넘어 포괄적인 의미)을 넉넉히 비축해 둔 부자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의 전투력과 생존력의 차이는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요즘 시대만의 특별한 일은 아니고 (지상이 천국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인류 문명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대두될 수밖에 없는 아킬레스건일 것이다. 어쩌면 지구 대기질을 산업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만큼 문명 사회의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당연히 완전히는 불가능하지만 완화되도록, 지구의 대기질이 완전히 청명해질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듯이, 세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0년 4월 27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