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1일에 쓴 글)
최근 본 영화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 본 얼티메이텀(Bourne Ultimatum)이다. 내용, 인물, 그닥 별거 없다. 추적, 도주, 원격 협동, 따돌림, 저격, 구출, 자동차 추적, 음모, 폭로... 액션 영화에서 아주 흔한 소재를 그다지 놀라지 않을 정도로 버무렸을 뿐이지만, 보는 순간은 정말 재밌었다. 보고 나면 아련, 감동, 여운 따위 전혀 없다. 오직 쿨했던 느낌 뿐이다. 녀석들 멋지다 멋져.
1편을 봤을 때도 느꼈었는데 여지없이 주인공 본(맷 데이먼 분)은 쿨하다. 건조하다. 스파이 영화의 고전이면서 아직까지 건재하다고 볼 수 있는 007 제임스 본드의 아류에 지나지 않을까? 살짝 비꼬아서 흥미롭게 만들었겠지... 본드 걸과 차별되는 젊은이들 취향의 본드걸을 사랑하고 이용하고 뒤통수 당하고 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봤다가 여지없지 허를 찔렸던 1편에 이어 3편 격인 본 얼티메이텀도 예상대로 쿨하고 건조한 스파이 본이다.
이 영화가 기존 스파이 액션 영화와 다른 점은, 탐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와 차별되기도 하는 부분인데, 영화의 분위기, 스타일이 건조하고 쿨하고 깔끔하고 간결하단 점이다. 기존 영화에서 질질 끌었을만한 부분을 과감히 짧게 끝내거나 아애 생략해버린다. 주인공 본 뿐만아니라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쿨하다. 예외없이 쿨하다. 적이건 주인공 편이건 알짜없다. 죽더라고 쿨하게 죽는다. 칙칙하거나 늘어지거나 처절하거나 애절하거나 아련함 따위는 아애 철저히 박멸해버렸다.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본에게서 쿨하게 듣고 쿨한 감정 표현 조차 별로 안 보여주고 장면을 마치고, 뭔가 큰 단서를 쥐고 있을 법한 신문 기자가 죽는 것도 의외로 쿨하고, 포트투갈 리스본으로 장소를 옮겨 기발한 아이디어로 적을 제압하는 사무실 격투 씬도 쿨하고, 사무실에서 만난 비서 니키 파슨스(줄리아 스타일즈)와 미국 CIA 본부와 교신하는 장면을 마치고 전화기를 쿨하게 내던지면서 장전된 총알을 쏟아내는 장면은 무자게 쿨하고 멋지다. **; 이 장면에 뻑 갔다. 그냥 전화선만 뽑아 버리고 내던져도 될 것을 시선은 니키의 시선과 마주침을 유지하고 전화기를 우측으로 내던지면서 보지도 않고 총알을 난사하는 장면, 주인공 본 캐릭터를 멋지고 쿨하게 만들어준다. (아래 사진)
포루투갈의 이슬람인들이 밀집 거주하는 달동네에서 니키가 암살자에게 추적당하고 이를 제지하려고 뒤쫓는 본의 장면들도 따지고 보면 내용상 뻔하고 뻔한 장면이다. 그런데 영화상에서는 무자게 긴박하고 재밌고 흥미롭다. 이 영화의 매력은 내용, 스토리, 캐릭터의 갈등, 내면 등에 있기보다는 바로 영화 스타일, 분위기, 장면들에 있다. 앞에서 숫하게 칭찬한 쿨한 장면, 장면들이다.
건조한 본이 니키를 구하기 위해 창문으로 뛰어들어가는 장면도 인상 깊게 멋지다. 좁은 공간에서 암살자와 처절하게 격투하는 장면도 명불허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가끔 로맨틱 영화보면 내용상 그닥 특별한게 없는데 여러 사람이 감동하는 경우가 있다. '무슨동화' 드라마 풍 말이다. 사실 남녀가 사랑하는데 반드시 굉장하고 기발하고 새로운 스토리가 있어서 감동적인 건 아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대개는 장면, 분위기, 섬세한 그 시대 관객에게 먹히는 대사에 앞도된 경우도 많다.
본 얼티메이텀 장면들은 긴박하게 쿨하게 현대적으로 빠르게 깔끔하게 짜증나지 않게 하품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현대 액션 영화란 이런 건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재밌다고 칭찬했던 무간도 미국판을 나는 솔직히 재미없게 봤다. 홍콩판 무간도 1편과 2편을 너무 감동적으로 보고 또 보고 마르고 달토록 봐서 그런지 모른지만 미국판은 왠지 시시했다. 시나리오 작가가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지언정 정작 영화 스타일면에서는 고리타분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장 감독이 만들었으니 더 흉봤다간 욕먹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느낀 건 사실이다. 아무리 영화 엘리트들이 입이 마르드록 칭찬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그런 영화를 싫어할 수 있다. 아무리 전 세계 영화인들이 칭찬해도 싫은 건 싫은거다. 그렇다 영화의 정통성을 따르는 영화 스타일은 별로다. 그래서 히치콕도 별로다. 그렇다고 명장 감독을 다 싫어하는 건 아니다. 구스 반 산트 영화는 정말 새롭고 멋지고 마음에 와 닿는다. 마이클 베이, 리들리 스콧, 제임스 카메론 감독 영화들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 스타일이다.
본 얼티메이텀의 화면 전개는 무자게 빠르다. 어쩌면 머리 아프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재밌었는지도 모른다. 자동차 추적 씬도 두말 하면 잔소리. 쿨하고 쿨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멋진 영화에는 뭔가 새로운 부분이 있다. 같은 자동차 추적 씬이라도 차별되는 뭔가가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한국 영화만의 장점이 있다. 끈끈한 인간관계, 찐한 우정, 애절한 사랑, 처절한 복수, 치졸한 뒤통수 치기 ... 나도 한국 사람이니 이런 느낌이 김치끼개처럼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쿨한 것은 서구문명 가치관에서 나왔다. 특히 미국이다. 쿨한 것이 싫을 때도 많다. 차갑고 건조하고 인간미 없어보인다. 가끔 미국인들 생활 태도를 보면 면전에선 무자게 잘 웃고 친절하다. 그러나 그건 공중도덕이고 에티켓이고 관습일 뿐, 뒤돌아서면 쿨하고 깔끔하고 깨끗하게 남남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당연하고 유익한 에티켓이기도 하지만 당혹스러울 때도 종종 있다. 그러나 차라리 쿨한 게 좋을 때도 있다. 사회생활에서 보통 인간관계 말이다. 그러나 연인관계에선 쿨해야하느냐 마느냐는 정말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건 각자 개인마다 다른 것 같다. 미국, 서구권도 개인차가 다양하다.
본 얼티메이텀은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분위기 정서의 영화다. 소위 미드(미국 드라마)에서 종종 느낄 수 있는 쿨한 정서의 극한까지 치달았다고 보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무덤덤하단 의미가 아니고 깔끔하게 산뜻하다는 쪽으로 말이다.
솔직히 내가 만약 영화 감독이라면 이런 스타일로 영화 만들고 싶다. 액션, 멜로, 코메디, 이런 정서 분위기로 만들 것 같다. 사극도 이렇게 만들고 싶다.
한국 정서와는 약간 이질적이어서 대박나지 않을 지는 몰라도 오히려 해외 젊은층에게 심심찮게 동감을 얻을 수 있는 정서일지도 모른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어차피 한국적이고 한국적인 정서를 잘 만드는 감독들은 방송국 PD를 포함해서 정말 많지 않은가? 그 분들과 경쟁했다간 본전도 못 찾을 거 뻔하다.
어떤 영화를 보면서 전율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잘 만든 경우다. 쿨하고 덤덤하면서 느끼하지 않은 남자 주인공을 만나고 싶은가? 가끔 사랑 따위와는 무관한 영화가 보고 싶은가? 덤으로 조연들도 무자게 쿨하고 멋지고 깔끔하다. 여자 조연이라고 예외없다. 본 얼티메이텀(Bourn Ultimatum)이다.
2007 11 01 김곧글 Kim God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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