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4일에 적었던 글. 문장을 조금 수정함)
관습적이고 피상적인 황진이 이미지로 관객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게 아쉬웠다. 이땅에서 황진이 모르면 간첩일 것이다. 요즘은 외국인 노동자, 며느리도 황진이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황진이 하면 얼핏 떠오르는 상상에서 다소 벗어난 내용이 아닌가 싶다.
영상미적인 측면에서는 정갈하고 아름답고 좋았다. 지고지순하고 절개있는 황진이 모습과 고급스럽고 깔끔하고 정교한 영상미는 찰떡궁합이었다. 다만, 시나리오 상의 내용과는 별개로 생략하면 더 괜찮았을 장면이 여러 개 눈에 띄였다. 가끔 카메라 앵글, 카메라 워크, 컷들의 연결과 배치가 전체적인 조화에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일반 관객이 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영상미는 두번째다. 첫번째는 이야기와 인물일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기존에 익히 알려진 황진이 작품들과 차별된 것, 새로운 영상미와 내용으로 황진이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겠다는 의도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 제작자, 작가의 성취 목표가 뭐든지간에 보통 관객이 영화관에서 즐기고 싶은 그 무엇을 제공하면서 했어야 더 좋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영화는 시대를 앞질러 너무 일찍 나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몇 년 전에 나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현시대가 적격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우아하고 정갈하고 지고지순한 황진이를 그린 건 이해가 간다. 천민 출신이지만 사대부의 교육을 받았다가 기생이 되었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 자존심이 높은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영화 초반에 그렸듯이 자신의 출신 신분이 현재보다 낮았다는 것을 알게 된 황진이가 비록 겉으로는 차분하고 태연하게 기생의 길을 택했다지만, 영화가 근사하고 정갈하고 우아한 컨셉이므로 이해가지만, 적어도 야심한 밤에 고위층 사대부를 농락하는 온돌 이불씬에선 신들린 유혹의 달인 행새를 완벽히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황진이에게 감정이입이 몇 배는 됐을것이다. 황진이의 기본적인 능력을 짧게라도 보여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 영화상에 비춰진 황진이 모습만으론 고위층 사대부가 홀라당 빠져들만한 당대 최고 기생 이미지는 아니게 보인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천부적인 유혹을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의지대로 휘두룰 수 있었기에 몇 백년이 지난 현대까지도 당대 최고 기생으로 전승되는 이유일텐데 그런 유혹의 예술성을 남자관객, 심지어는 여자관객도 극장을 찾으면서 은근히 기대했을 것이다.
새로운 황진이 영화를 만들겠다는 제작자, 감독, 작가의 의도는 알겠는데 보통 관객의 입장에서 '임꺽정+러브스토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놈이(유지태 분)가 주인공인지 황진이가 주인공인지 한 쪽에 촛점을 맞췄어야 좋았을거다. 제목이 황진이니까 황진이 위주로 전체적인 통일이 이뤄졌어야 했다. 비빔밥을 만들어 먹을 때 고소한 참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달콤한 맛이 떨어지는 맥락이다. 유지태가 나오는 장면은 황진이에 비해 한참 적다. 그렇지만 내용상, 황진이 머리 속 생각 등을 합치면 놈이의 비중이 너무 과도해 보인다.
게다가 이런 과오가 절정을 이룬다. 후반부에 놈이가 이끄는 화적패가 관군에게 습격당하는 장면이 엄청 길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세트를 제작한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필름이 돌아갈 때 관객이 지루해하고 감정몰입을 이탈할 정도로 지연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놈이와 황진이의 특별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주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당대 최고 기생 황진이가 천부적인 유혹으로 당대 최고 고위층 사대부를 농락하고 향락한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한 사랑은 오직 한 명, '놈이'다. 이렇게 강조될려면 전반부에 황진이의 희대 최고 천부적인 기생질, 낮에는 고상한 문필력으로 유혹하는 모습을, 한밤에는 그녀의 무릎과 치마폭에서 함몰되는 수많은 사대부를 간결하게라도 보여줬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은 아애 없었던 점이 아쉽다. 전반적으로 냉랭하고 도도하고 근엄한 황진이 모습 뿐이다. 문필력과 백그라운드로 먹고 산 기생같다는 느낌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잘난 상류층이라도 지식이 많다고 어떤 여자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남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섹시 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유혹의 천재성을 지닌 여자에게 빠져드는 것은 수컷의 본능이다. 상류층 고위층 남자들도 수컷들일 뿐이다.
황진이는 결코 못 만든 영화는 아니다. 미술, 의상, 소품, 카메라, 조명, 연기 등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히 전해진다. 여러 스텝들의 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충분히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모든 중견 조연들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황진이 영화가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가 되지 못 한 가장 큰 이유는 연출, 시나리오가 아주 살짝 미달이었다. 또는 판단착오였다.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연출 중 아쉬웠던 점은 내용과는 무관하게 과감히 생략해야할 장면을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넣었다. 어느 장면에서 좀더 일찍 끝내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어야 좋았을텐데 늘어지는 경우가 종종 나왔다. 그리고 보통 관객이 익히 알고 있는 보편적인 황진이 이미지를 전혀 보여주지 않고 과감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과감한 시도는 칭찬받을만했지만 결과적으로 관객은 낯선 황진이 이미지에 공감하거나 매료되지 않은 것 같다. 지금껏 송혜교 연기에서 볼 수 없었던 요염하고 매혹적인 유혹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 황진이를 초반에 캐릭터 소개의 관점에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면 관객을 이야기에 몰입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 전체적으로 짧은 상영시간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했다. 간결하게 줄이고 과감하게 생략했으면 훨씬 좋았을 법한 장면이 눈에 많이 띄였다. 진부한 사회개혁 내용을 이전에 숱하게 봤던 그 내용 전개 방식 그대로 나열하는 것에 그쳐서 매우 지루했다. 현대 관객은 사회 개혁 목적의 저항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런 이야기를 서사물, 코믹물도 아니고 멜로 사극 드라마에서 그렇게까지 긴 시간동안 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개있고 지고지순한 사랑에 관한 메시지 하나만을 선택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편이 훨씬 좋지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전: 2007 11 05 김곧글(Kim Godgul)
최종: 2012 05 16 김곧글(Kim God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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