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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매개체의 인간 (호모 캐리어스, Homo carriers)

by 김곧글 Kim Godgul 2009. 6. 1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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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고립되어 홀로 살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보통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든 타인과 상호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인간은 타인과 온갖 것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부족을 이뤘고,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이루고, 현대와 같은 초호화 정보화 사회를 이뤘다. 그런데 인간은 여느 동물과 달리 주고받는 온갖 것을 담아서(적재해서, 포장해서, 다른 형태로) 사회적 행동하며, 세월이 흐를수록 담는 무엇은 더 다양해지고 고도화된다. 즉,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은 온갖 것을 매개체를 통해서 주고받는 속성이 짙어지는데, 그 매개체는 다양해지고 고도화로 발전한다. 여느 동물과 달리 매개체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인간을 '매개체의 인간 (호모 캐리어스(Homo carriers)'라 한다.

선사 시대 때 어떤 부족민이 힘을 합쳐 들소를 사냥해서 다같이 나눠먹는데, 한 사람이 배가 아파서 배당 받은 살점을 먹을 수 없게 됐다. 어차피 놔두면 부패할 것이고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살점을 준다. 처음에는 먼지 묻은 손에서 손으로 누군가에게 직접 건네졌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어느 때부터 그릇에 담아서 건네진다. 이때 그릇이 '매개체'다. 넓게 보면 그릇도 도구에 지나지 않지만, 한 인간이 타인과 주고받는 사회적 행위에서 온갖 것을 적재하는 도구를 특별히 '매개체(carrier, medium)'라 한다. 쉽게 말해서, 그릇에 놓여 있는 과일을 내가 직접 집어서 내가 먹으면 그릇은 도구이지만 매개체는 아니다. 그러나 과일을 그릇에 담아 타인에게 준다면 그릇은 도구이면서 동시에 매개체다.

인간이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온갖 도구 중에서 특정한 어떤 것을 매개체로 분류하려면 다음 항목을 만족해야 한다.
  • 한 인간이 타인과 주거나 받는 사회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 (예, 건네준다)
  • 이동되는 알맹이(핵심 내용, 실체)가 하나 이상 존재해야 한다. (예, 과일)
  • 알맹이를 담는 매개체가 하나 이상 존재해야 한다. (예, 그릇)

한편, 인간의 신체는 매개체로 분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고 '행복한가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을 이렇게 분석할 수도 있다. '웃음'은 '알맹이'이고, 두 사람 사이를 이동하는 '사회적 행위'가 있고, '눈'은 '매개체'라고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눈'을 매개체로 분류하지 않기로 한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무엇도 인간의 신체를 매개체로 하지 않고는 주거나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의 손은 넓은 의미에서 도구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도구를 논할 때 인간의 손은 제외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사 시대에는 사회가 커지면서 대규모 전투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수많은 전사들이 장군의 작전 명령에 따라 신속히 공격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나팔'을 사용하기도 했다. 즉, 특정한 가락을 나팔로 불면 어떤 명령을 실행하라는 것이다. 이때 특정 명령 내용은 '알맹이'이고, 나팔수가 수많은 전사에게 전달하는 사회적 행위가 있고, 나팔과 특정한 가락은 매개체다. 중요한 점은 '특정한 가락'과 '나팔'이 모두 매개체라는 점이다. 매개체가 2개 이고 형태도 다르다. 하나는 청각으로 감지되는 것이고 하나는 물질이다. (한편, 특정한 가락을 알맹이로 볼 수도 있는데 이때는 나팔만 매개체가 된다.) 이처럼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고 발전할수록 매개체의 형태는 다양해지고 고도화된다.

들에 핀 어떤 꽃을 인간은 '꽃'이라 불렀고 한글로는 '꽃'이라 쓰고 영어로는 'flower'라고 쓴다. 실제 꽃은 알맹이이고 한글로 쓴 '꽃'과 영어로 쓴 'flower'는 매개체로 사용되는 경우를 책을 통해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에게 분위기를 잡고 실제 꽃을 건네주는 경우에 실제 꽃도 매개체로 분석될 수도 있다. 이때는 알맹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라는 알맹이를 '실제 꽃'이라는 매개체에 담아서 사회적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한글로 쓴 '꽃'이나 영어로 쓴 'flower'도 알맹이로 분석될 수도 있다. 핸드폰 문자로 '꽃'을 써서 누군가에게 전송했다면 '꽃'이라는 한글은 알맹이이고 핸드폰은 매개체다. 그리고 핸드폰은 꽤 많이 여러 개의 알맹이와 매개체로 분석될 수도 있다. 회로, 전자, 전파, 액정판,...파고들면 꽤 많다.

텔레비전으로 보는 남태평양 섬들의 아름다운 경관은 실제가 아니다. 시청자는 텔레비전 브라운관(또는 그에 준하는 영상 패널)의 변화무쌍한 고성능을 보는 것이다. 즉, 텔레비젼이라는 매개체를 거처서 보는 것이다. (또한 섬들의 경관을 촬영할 때도 카메라라는 매개체를 거쳐서 담아졌고, 색보정, 편집이라는 매개체를 거치기도 했다) 인간은 세월이 흐를수록 알갱이(실체, 실물, 핵심)을 접할 때 매개체를 사용하는 의존도는 높아진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방식, 의식, 무의식, 정치, 경제, 사회제도, 도덕, 가정 생활... 전반적인 것들에도 많은 영향을 줄 것이다. 매개체를 복잡하고 다양하게 사용하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인간 사회의 다양한 것들도 비례해서 급속도로 변화할 것이다.

현대 이후에도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이 사용하는 매개체는 더욱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고 고도화될 것이다. 한 인간이 어떤 매개체를 얼마나 많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질문은 한 인간을 조망하는 잣대가 된다. 한 사회가 어떤 매개체를 얼마나 많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질문은 한 사회를 조망하는 잣대가 된다. 학교, 집단, 조직, 회사, 국가, 민족, 종교 등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매개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질문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의 질문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호모 캐리어스(Homo carriers), 매개체의 인간, 고도의 지능을 지닌 생명체의 특징이다. 만약, 밤하늘의 별천지 어딘가에서 인간보다 이성과 감성이 월등히 앞서는 지적인 고등 외계인을 만난다면 (어떤 의미에선 신(god)일 수도 있다), 그 고등 외계인은 반드시 인간의 것을 가뿐히 초월하는 풍부하고 고도화된 매개체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2009년 6월 12일 김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