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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더 로드(The Road 2009) - 절망 속의 신과 인간

by 김곧글 Kim Godgul 2010. 3. 15.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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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영화는 꽤 감동적이었다.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흐린 날 혼자 보기에 제격인 영화인 것 같다. 많은 인파로 북적이는 영화관에서보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감상하면 더 좋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홍보 문구대로 성경에 비견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용과 인물이 은유하는 것은 확실히 성경 또는 종교와 관련되어 보인다. 아버지는 구약에서의 여호와이고 아들은 예수이고 세계관은 기독교가 이교도에게 핍박을 받고 있을 때에 대입된다. 한편, 굳이 기독교에 국한할만큼 노골적이지는 않다. 어떤 세계 종교 또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미니멀리즘으로 은유했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보인다. 아버지는 어떤 지역만을 위하는 신이고, 아들은 박애정신으로 전 인류를 위하는 신이다.

얼마 전 과학관련 뉴스에서 공룡이 멸망하게 된 주요한 이유는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고 그 여파로 멸종했다는 설이 거의 정설도 인정되었다고 보도된 기사를 읽었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의 문명도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시에 찾아온 자연 재앙에 의해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더 로드'에서의 종말적인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암울한 세상이 전혀 판타지만은 아닐 것이다.

먼 옛날 아틀란티스 대륙에 살았던 인간들에게는 그 대륙이 파멸된 것이 세상의 종말이었을 것이다. 현생 인류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지만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어떤 과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잡아먹어서 멸종했다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다. 더 로드의 암울한 세계에서도 어떤 인간이 어떤 인간을 잡아먹는다. (현시대에 대한 은유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쉽게 말해서 대형마트가 구멍가게나 재래시장을 잡아먹는 것에 대한 은유다) 아버지와 아들은 해안가로 향해 이동한다. 하이에나 같은 인간 사냥꾼의 위험을 절체절명으로 모면하는 장면들이 긴장되고 현실적이었고 감정이입되어서 좋았다. 오락거리용 영상미는 없지만 감정이입되는 인물과 실제적인 상황의 흥미로움때문에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이 영화가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어도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면의 감동적인 측면에서 아주 좋았다. 다만, 오락적인 재미가 약했는데 어쩌면 그것 때문에 지루했을 관객도 있었을테지만 이 영화의 전체적인 윤곽에 오락적인 액션과 스펙터클은 어울리지 않았을 것 같다.

상복과 흥행복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깊은 내면의 감동을 기준으로 했을 때 최근에 봤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다. 기분이 울적할 때, 불연듯 세상과 삶에 대한 어두운 측면을 느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위로 받기 위해서 선택하는 영화 Top 10 목록에 간직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의 암울한 세상을 단지 불운한 미래일 뿐이라고 치부한다면 너무 겉으로만 보는 것이다. 지금 현대적으로 은유해서 바라보면 신과 인간과 문명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이지만 은유적으로 보면 신과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확대해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그런 의도가 여기 저기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독자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이런 류의 영화를 감상한 것 같다. 우울하고 암울하고 묵직하면서도 깊은 내면의 감동의 여운을 남겨준 영화였다. 자극적이거나 오락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이 영화를 순수하고 높은 경지에 올려놓은 것 같다.

2010년 3월 15일 김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