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메트로 2033 (소설 감상글)

by 김곧글 Kim Godgul 2013. 6. 5. 21:21

 


몇 년 전에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라 치면 그럴 필요까지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면서도, 버려야할 습관의 일환으로 괜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뻘쭘한 느낌을 스스로 만들어내곤 했는데 최근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책을 펼치고 읽는다. 심지어는 플랫폼 맨 앞에 서서도 읽는다. 주로 흥미롭게 몰입할 수 있는 소설을 읽는다. 꼭 소설이라서가 아니라 최근에는 이전과 다른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은 지하철을 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중팔구 뻘쭘하면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끄적거린다. 드물지만 태블릿에 몰입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인지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편안하게 독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저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나 내가 책을 읽는 것이나 같은 행동이다.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쓸데없이 신경쓰지 말고 책이나 읽자. 뻠쭘하게 멍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소설은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On The Road)'도 좋았지만, 개인적인 취향이 가미된다면 단연코 '메트로 2033'이다. 러시아 출신 '드미트리 글루코프스키'라는 작가가 2007년에 쓴 처녀작인데 러시아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번역출간될 정도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작가의 직업이 저널리스트라서 유명한 스웨덴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 또는 '월드 워 Z'처럼 백과사전 같은 사건, 인물, 배경을 펼쳐주는 복잡한 소설이 아닐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는 확실히 예상된 측면이 없지는 않았다. 낯설고 길죽한 러시아의 지하철역명, 러시아 현대사와 관련된 고유명사들, 군사 매니아가 아니고서야 낯설기만 한 각종 총기류 명칭... 그러나 낯선 초반부를 이겨내고 어느 순간부터 폭풍적으로 몰입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아르티옴'이 인상적으로 등장하면서 부터다. 영화나 소설이나 일단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되면 그 세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기 마련이다. 


멋있거나 카리스마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 세속적으로 멋있는 인물은 아애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조커나 한니발 같은 극악무도한 악당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현실적인 인물이고 어두운 지하철 터널이 배경인 만큼 인물들의 성격도 연통의 검댕 처럼 짙은 회색 같은 느낌이다. 현재의 젊은 아르티옴이 어렸을 때 겪은 인상적인 장면은 읽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닭살이 돋았다. 이후에도 닭살이 돋았던 적이 몇 번 더 있었다. 총 서너 번 있었다. 뭉클하거나 찡한 감정에 기인한 닭살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전 세계적으로 핵전쟁이 발발했고 그 이후에 러시아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인간 생존자들의 이야기다.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 그러니까 몇 년 전에 그냥 문뜩 어떤 이유로 지상에서는 살 수 없는 미래의 서울 지하철에서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SF소설을 쓰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나만 해본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배경이기에 국내에서는 일부 매니아층만 좋아할 법하다.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다룬 SF소설 또는 영화는 냉전시대를 주도했던 미국과 소련에서는 흥미로운 주제일지는 몰라도 국내 관객에게는 그렇게 매혹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배경은 그렇다치고 이 소설이 비록 이슈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국내 독자에게도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소설 자체가 완성도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단순하지도 않고 너무 복잡하지도 않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러시아 지하철 도시국가들이라는 배경, '아르티옴'이라는 3인칭 인물을 중심으로 그 세계를 여행하는 쉬운 플롯(치고 빠지기, 약올리기, 뒤통수 때리는 반전 같은 것은 없음), 작위적인 냄새가 거의 없는 현실적인 인물들과 러시아 특유의 얼음장 같은 사건들, 주인공 아르티옴의 현실적인 심리묘사를 생동감 있게 묘사한 작가의 뛰어난 글솜씨로 인하여 소설의 완성도는 거의 장르소설의 명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덤으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판타지 장르 소설과 큰 맥락에서 많이 닮아있는 점도 있어서 판타지 소설에 익숙한 현대 독자를 매료시키기에도 충분했다. 배경만 핵전쟁 후의 러시아 지하철이지 그것을 판타지 소설의 동굴세계로 바꾸면 이것저것 죄다 매핑될 수 있을 정도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SF장르 소설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다, 라고 말하면 순수문학 전문가들에게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문학의 고전처럼 시대를 바운스하며 감동을 줄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현실을 은유하는 숨겨진 상징이나 메시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다소 노골적인 게임이나 영화 같은 소설일지라도 전체적으로 잘 써진 작품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란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몰입되고 빠져들 수 있다, 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작가가 쓴 다른 소설도 읽고 싶지만 이 소설의 후편 '메트로 2034' 외에는 아직 없다는 점이 아쉽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이런 느낌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말이다. 

  

국내에서 인기있는 스타일, 투명하거나, 청명하거나, 순수하거나, 쾌활하거나, 열정적이거나, 가족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이거나 하는 느낌과 전혀 다른 세계관이다. 혹시 괜히 이 감상글을 읽고 이 소설을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가 너무 심심하고 지루해서 중도에 책을 먼지에 묻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보통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잔인하다거나 전율적이거나 깜짝 놀래키는 쇼킹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암울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앞도하기 때문에 흔한 공포영화 같은 깜짝쇼는 없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 암울한 미래 사회에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려는 주인공 아르티옴의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에 매핑하면 평범한 어떤 인간의 삶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동명 게임으로도 출시되었고, 조금 해봤는데 분위기는 정말 책에서 읽은 것을 제대로 표현했다, 헐리우드에서 영화로도 제작된다고도 하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담이지만, 메트로에서 흥미로운 점은, 태양빛이 안 들어오니까 주로 버섯류를 재배해서 먹는다. 심지어는 말려서 차를 끓여먹기도 한다. 그래도 유일하게 육식으로는 돼지를 먹는다. 어떤 역에서는 쥐를 요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화패로서 총알이 사용된다. 물건을 살 때 동전이나 지폐가 아니라 총알로 지불한다. 이 설정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암울한 미래 세계의 본보기이고 그것은 어떤 측면에선 현대 사회의 냉혹함을 은유하는 것일 것이다.

  

  

2013년 6월 5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