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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천재감독, 명작 들고 하산 -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

by 김곧글 Kim Godgul 2009. 1. 14. 21:29
어떤 영화제에서 상 받았다고 모든 관객의 심금을 울리지는 않는다. 특히 어떤 면에서 문화적 이질감이 적지 않은 미국 영화제의 수상작들이 국내인에게 그쪽의 소설, 수필의 수상작들처럼 종종 거리감 느껴진다. 대니 보일(Danny Boyle) 감독을 천재라고 불리우게 했고 수많은 극찬이 쏟아졌던 영국 영화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을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현란한 영상미는 알겠고 약간 재밌기는 한데 뭐가 그리 놀라운지 원..." 내가 영국인 또는 서구인이 아니라서 그 느낌을 제대로 몰랐을 것이리라.

'트레인스포팅' 이후 대니 보일은 천재 감독 꼬리표를 달고 행운의 투자 마차로 질주하며 수많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영화 보는 눈이 살짝 높은 관객에겐 그저 '재능꾼 감독'의 작품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마치 한때 유명했던 칼잡이가 깊은 산을 떠돈 후 하산한 것 같다. 특출난 자신의 재능에 인간적인 감수성의 깊이를 융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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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는 2008년 골든글러브 드라마부분 작품상을 받았다. '어떻게 만들었길래...?' 궁금해서 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 감독상도 받을 만하게 뛰어난 영상미와 연출미가 돋보였지만 무엇보다도 깊이 있고 은유적이고 재밌는 이야기 자체다.

인간, 삶, 사랑을 은유적인 자본주의 현대 문명사의 배경 위에 현란하게 펼쳐보이고 심금을 울리기까지 한다. 자칫 감상적이고 신파적으로 빠져서 익숙한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부분에서 대니 보일의 특출난 재능과 내공을 발휘한다. 그 연출력이 현대적인 감각이다. 영화학교, 영화전문서적, 과거 명작영화 유산에서 단순히 얻을 수 없는 자신만의 끊없는 노력으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영상 스타일을 창조했는데 그것이 꽤 현대적이고 밝고 경쾌하고 신나고 재밌다. 그리고 심금을 울린다.

굳이 단점을 꼬집어서 이 영화가 별로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숲을 안 보고 숲 속에 썪은 나무, 독버섯, 동물 시체를 찾아보고 숲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도를 서구적인 문화권에 기반해서 표현한 점이 이 영화의 단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전 세계에 걸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그늘진 삶을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이 피라밋의 아래부분 만큼 많다는 것이 배경의 일부이기 때문에 납득할만 하다. 급변하는 현대 인도가 산업화가 급발전했던 전 세계 수많은 국가들의 대도시와 무관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 영화 '올드보이'가 프랑스 소설 '철가면'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영국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가 떠오른다.

아무리 훌륭한 천재 예술가라도 대표작은 대개 10년에 하나씩 나온다고 한다. 강산이 변하면서 인간의 내면과 재능도 큰 변화를 겪는 게 세상의 이치인가 보다. 이 영화는 대니 보일 감독이 늙어 죽더라도 꽤 오래동안 언급될만한 수준의 영화다.

2100년에 영화 잡지의 편집장이 마지막 폐간호의 특집으로 '2000년부터 2100년까지 가장 훌륭했던 영화 100편'을 뽑는다면 이 영화는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아카데미 영화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생각에 이 영화가 작품상을 타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을 것 같다. 다른 작품이 훌륭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권위있는 영화제답게 훌륭한 작품이더라도 너무 오락적이면 다소 껄끄럽고 그렇다고 보통 관객을 무시한 평단들을 위한 고급 요리여도 껄끄럽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보통 사람의 심금을 울리면서 평단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을만하고 그렇게 오락적이지도 않고 무겁지 않을 정도로 현대 문명 사회를 살짝 꼬집고 인간의 삶과 사랑을 진지하면서도 재밌게 그린다. 그 조화가 절묘하고 아름답다.

현대 예술은 바야흐로 신고전주의 강물을 달린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고전문학 스타일을 현대적 영상미로 훌륭하게 재창조했다. 인도를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배경음악도 훌륭하다. 사물놀이처럼 신난다.

너무 무겁지 않게 너무 가볍지 않게 그 조화와 균형을 어떻게 조절해서 심금을 울리는 영화를 만들지를 고민한다면 이 영화는 좋은 본보기다.

2009년 1월 14일 김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