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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칼럼, 단편

(시) 드래곤라이더(Dragonrider)

by 김곧글 Kim Godgul 2009. 5. 1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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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라이더(Dragonrider)



하늘을 찢고 포효를 쏟아내는

쾌쾌한 화산재의 검은 안개가 깨어나자

시큰둥이 내리꽂는 대왕 드래곤의 눈길

안구의 강렬한 섬광이 눈꺼풀을 벌려 만물의 명암을 짙게 칠하고

천둥을 잡아먹는 하품을 관통하는 트림

된장, 간장을 다 꺼내고 방치된 오래된 항아리 속 냄새가 대기를 진동한다


말 만한 발톱 앞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그림자 인기척

"찾으러 왔다."

태초의 위압감 기류에 굴하지 않고

눈길도 피하지 않고 차분히 말하는 용자

"공주 중에 공주"


코끼리만한 철퇴가 돌풍처럼 날아와 대지를 찢는다

간발의 차로 높이 뛰어오른 용자, 그의 부름에 응답하는 명검

태초의 우렁찬 금속성 울부짖음이 공기를 채 진동하기도 전에

명쾌하게 공간을 접는 날카로운 직선을 긋는다


트림하던 주둥이로 찢어지는 비명이 천지를 요동치고

백년 묵은 아나콘다처럼 대지를 출렁이는

꼬리를 잃은 대왕 드래곤의 꼬리 뿌리는 붉은 폭포수를 사방에 흩뿌려댄다

마침내 만물은 붉은 드레스로 갈아입는다

"갚았다 지난 빚"


용자는 질퍽한 홍해를 가로질러 이끼 먹은 계단을 까마득히 오른다

한없이 철통같은 금속 자물쇠를 갈대 파헤치듯 갈라버리고

수없이 즐비한 옥문이 거미줄처럼 빼곡한데

사방에서 조여오는 조무라기 간수 도롱뇽 전사들

아직 선혈이 흘러 선명한 녹슨 쇳조각 냄새를 내뿜는 명검을 높이 치켜들자

용자의 오른팔은 흥건히 붉게 염색되고

사태를 파악한 눈치빠른 놈부터 줄행랑친다


출중한 섬광이 터질듯이 삐져나오는 옥문을 명검으로 깨부수자

한동안 눈이 부셔 실명한 것은 당연

쾌쾌한 습기를 단번에 잠재우는 순수한 체취는

꽃을 찾는 꿀벌의 판단력을 흐트러트릴 뿐만 아니라

태양빛을 놓쳐 대지의 심연으로 실신해버린 수목을 마침내 각성시키고

온갖 들짐승 날짐승이 찬연하게 환대한다

"운명을 완수하러 왔습니다. 공주님"

용자는 무릎 꿇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한다


우뢰를 앞세운 불기둥이 복도를 관통하고

수많은 옥문의 강철이 녹아내리고 벽과 천장에 균열이 폭주하고

상층을 죄다 쓸어버린 대왕 드래곤의 발톱

뚫린 천장 위로 걸죽한 먹구름이 장대비를 쏟아부어

용자의 칼날을 씻겨내고

달음박질하는 두 사람의 땀방울을 희석시킨다


"여기까지 왔던 기사는 많았지만..."

공주는 용자의 손을 뿌리치고 시선을 외면한다

"갈기갈기 찢겨지는 기사를 더 이상 못 보겠어요

전 괜찮으니까 그쪽만이라도 목숨을 부지하세요."

용자는 공주의 시선을 붙잡는다

"함께 갈 수 없다면 차라리

갈기갈기 찢겨져 죽는 편이 행복할 겁니다."

용자는 공주의 손을 움켜쥔다


비명소리, 장대비 장막을 뚫고 세상에 울려퍼지고

녹아내린 강철 옥문을 빠져나와 갈팡질팡 헤매는 아낙네들, 여인들, 공주들

때아닌 낯선 혼란에 허둥대는 도롱뇽 전사의 성깔이 스며든 칼날이 비열해지려 할 때

사방에서 온갖 검은 인기척이 자욱하게 에워싼다.


"저기 봐요! 전갈들이 여인들을 ... " 공주는 소리쳤다 "어떻게 좀 해봐요."

"자세히 보세요" 용자는 차분했다 "전갈이 아닙니다.

검은 색 위장복을 입고 매복해서 기회를 엿보던 기사들입니다.

용감한 자는 도롱뇽 전사를 물리치고 운명의 여인을 구하겠지요."

도롱뇽 전사들의 칼날과 기사들의 칼날이 불꽃을 터트린다

짙은 먹구름을 뚫고 별빛이 쏟아져내린 듯한 불꽃이 아비규환에 기름 붓는다


"그들의 운명은 그들의 몫이지요. 우리는 저것으로."

용자가 가리키는 절벽 아래로 아담한 배 한 척이 정박중이다

"그럴 수 없어요. 저들을 모른 채 하고 우리만 살 수 없어요."

가느다란 발길을 대지에 붙박은 공주의 입술은 떨었지만 단오했다

"그럴 시간이 없다니까요." 막무가내로 공주를 업은 용자,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날개만 달렸을까? 너무 가벼워 발걸음을 재촉했을 뿐인데

그 날개 무게감 조차 느닷없이 사라진다

익숙한 포효와 함께

칠흑같은 암흑의 엄습과 함께

전의를 예지하는 명검의 떨림에 용자의 혈액은 순식간에 끓어오른다


빗줄기 장막 저편에 상승하며 멀어지는 공주의 비명

흉직한 손가죽이 움켜쥔 꽃잎 한 장, 가냘퍼 구겨질 듯 하자

끓던 혈관이 터져버리고 명검을 뽑아 달려드는 용자의 울분

'다급한 흥분은 감지력을 눈멀게 한다' 전설적인 옛 영웅들이 강조했거늘

대왕 드래곤의 비장한 손길질에 용자는 강가로 곤두박질 친다

짜릿함을 즐기는 대왕다운 술수, 허파의 불기둥으로 강 상류 댐을 무너뜨리자

어마어마한 범람이 정박했던 용자의 선박을 삼켜버린다

죽을 힘을 다해 뿌리 깊은 물푸레나무 가지를 붙잡은 용자

간발의 차로 수마의 살기를 회피한다


흥미로운 눈길로 대왕 드래곤은

도롱뇽 전사들과 전갈 기사들의 아비규환을 참관하다가

어느 순간 가장 비열하고 용감하지 못 한 놈을 골라잡아

범람해서 세상을 쓸어버리는 수마에게 던져버린다

도롱뇽 전사도 전갈 기사도 공평한 놀잇감일 뿐

여자들의 비명 소리는 대왕 드래곤에게 그저 옥구슬 구르는 노랫가락일 뿐


성난 수달이 물푸레나무 가지를 활시위처럼 당기고 당긴 도움으로

대왕 드래곤 등짝에 올라 탄 용자, 사력을 다해 몸통을 찢지만

인간의 힘으론 뚫을 수 없는 금속 비닐 갑옷의 꺼풀을 긁어댈 뿐이다

용자가 공주를 붙잡은 용의 손아귀에 올라타 그녀의 이마에 땀을 닦아주자

키스를 받은 용자는 깊이 빠져듬을 절제하지 못 하다가

명검이 격렬한 떨림으로 경고했건만

용의 왼손아귀에 포획되는 용자

두번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저편으로 내던져질 찰나에

용자의 명검은 대왕 드래곤의 엄지 손가락을 찢고

그 기세로 대가리까지 단숨에 올라가

마침내, 전설적인 옛 영웅들의 권고대로


대왕 드래곤의 대가리 전두엽에 명검을 꽂았다

깊이, 더 깊이, 더 깊숙이


불똥같은 열기가 온 세상을 태워버릴 듯 천지에 방사되고

전두엽에서 쏟아져 뿜어지는 뇌액을

온몸에 뒤집어 쓴 용자

깊은 심연에서 깊은 우주까지

인간 밖 온 세상의 지혜까지 담겨있는, 짙은 푸른색 뇌액

용자는 뼈속까지 푸른 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대왕 드래곤의 흉악한 본능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그 영역을 꽤차고 들어앉은 태초의 온순한 야성은

이브를 유혹한 과일을 먹기 이전의 순수한 야성

용자가 이끄는대로 그의 의지에 순응하여

공주를 태우고, 도롱뇽 전사를 항복시키고, 수많은 여인들과 기사를 구하고,

범람한 강물을 막아 수달에게 보은하고, 세상을 진정시킨다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조상들이 남긴 전설에 탄복한다

'푸른 옷을 입은 용자가 용을 타고 날아와 세상을 구하리라

후대인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고 자자손손 기억하리라

드래곤라이더(Dragonrider)'


드래곤라이더와 공주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고

이들의 왕국은 대왕 드래곤의 도움으로

수세기 동안 태평성대를 이뤘다


새로운 전설도 추가되었다

'누구든지 대왕 드래곤의 전두엽에 꽂힌 명검을 뽑는 자는

그 자리에서 대왕 드래곤에게 잡혀 먹히지 않는 한

세상을 지배할 절대적인 힘을 얻으리라'

아직까지 그 누구도 명검을 뽑지 못 했다

오직 드래곤라이더에 버금가는 자만 명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9년 5월 16일 김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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