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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판의 미로(Pan's Labyrinth) - 여자들의 성인식 잔혹동화

by 김곧글 Kim Godgul 2009. 8. 8.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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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보기엔 다소 잔인하고, 어른이 보기엔 노골적인 훈시다. 얼핏 이렇게 분석할 수 있지만 실제 영화는 훨씬 풍부하고 암시적이다. 소문 보다 좀 더, 보는 내내 흥미로왔고 재밌었다. 잔혹동화가 끝났을 때는 실제 같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 좋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2개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킨다. 서로 연관이 있는 듯 없는 듯 하고, 동화나 신화의 요소를 차용한 것들의 의미를 알 듯 모를 듯 하다. 만약, 소설로 써졌더라면 훨씬 깊고 풍부한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집중분석하며 꼼꼼히 다시 보면 은유하는 것들이 뭔지 윤곽을 들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문하는 장면이나 전쟁의 잔혹한 현실성 때문에 영화를 재미있게 여러 번 보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다.

현대인에게 인간을 공격하는 외계인 하면 의례적으로 영화 '에일리언'의 에일리언이 떠오른다. 비슷한 맥락으로 뭔가 중요한 실마리를 품은 미로에서 '추격 시퀀스' 하면 영화 '샤이닝'에서 호텔 앞 미로에서 추격 장면이 떠오른다. 물론, 서구문화권에서 의미심장한 미로하면 그리스신화에서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를 감금한 미궁이 전무후무한 원형이긴 하다.  판의 미로에서도 거의 끝부분에 숲속에 버려진 고대의 미로에서 추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샤이닝에서만큼 위용도 긴박감도 없었던 이유는 감독의 연출력이 별로여서가 아니라 제작비 문제였을 것 같다. 판의 미로의 이야기에서 숲속의 미로는 중요한 요소지만 영화적인 시각적 쾌락을 주지는 못 했다. 규모가 너무 왜소했다. 판의 미로가 좀더 웅장했거나 또는 오묘한 깊은 맛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끄는 힘은 마법처럼 강력하다. 저건 뭘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떻게 결론지어질까? 관객을 끝까지 흥미롭게 지켜보도록 화면 앞에 붙들어멘다.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판타지 세계에 사는 젊은 공주에게 어른들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훈육시켜서 정신적으로 성인 의식을 치러주려고 인간들이 사는 세계관의 잔혹동화를 차용한 통과의례가 전체 이야기인 셈이다. 물론, 충분히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영화를 국내에서 리메이크한다면 일제시대에 독립군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은 일본장교와 전례동화에 푹 빠져있는 어린 여자의 한지붕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서상 잔혹한 고문, 전장에서 부상자 사살을 빼고 좀더 코믹스럽고 환상적인 요소를 가미할 것 같다. 어떤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과 중남미 문화의 차이일 뿐이다.

권선징악은 인간의 염원이지 현실은 아니다. 인간 세상의 대다수의 이야기는 인간에게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 목적이므로 권선징악이 많다. 그러나 현실은 얼음 위의 안개처럼 모호하다. 신화와 잔혹동화는 현실을 좀더 대변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현실의 모호함을 반영하는 작품만 좋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지만 직관적으로 혀에서 침이 솟아나게 하는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 맛있는 음식은 권선징악, 반드시 승리하는 영웅 이야기일 것이다. 로맨틱 코메디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진실된 사랑을 찾는 여주인공일 것이다. 권성징악이건 모호한 것이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알 수 없는 끌림이다. 어떤 이야기에 매혹되는 원인은 이런 구분 밖에 있다. 한편, 각자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각자에게 가장 유익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불변의 진리다. 

영화 판의 미로가 훌륭한 영화이고 각종 영화제,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히트치지 못 한 이유는, 물론 중남미와 서구권에서는 국내와는 달리 훨씬 흥행했겠지만 적어도 국내에서 전문가들에게 극찬을 받았지만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 한 이유는, 작은 요소지만, 일반인이 생각하기에 통상적으로 기대되는 동화풍 판타지에서 과도한 잔혹 장면 때문일 것이다. 람보1편에서 나올 법한 고문 장면은 분필로 벽에 문을 그리고 들어가 미션을 수행하는 흥미로운 동화풍 판타지와 왠지 부조화스러웠다. 어쨌거나 사소한 불만은 불만이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빼어나고 훌륭한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2009년 8월 8일 김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