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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배를 엮다 (舟を編む, The Great Passage, 2013)

by 김곧글 Kim Godgul 2014. 1. 17. 20:08



문뜩 제목의 낯설음에 끌렸다. 대개는 수식어와 주어로 영화제목을 정하는데 목적어와 술어라니. (국내에서는 '행복한 사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는데 여기서 '행복'은 넓은 의미로 해석해야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아주 없는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또한 핑계지만 일본영화를 구해놓고도 언젠가부터 잘 안보게 되었는데(아마도 국내 영화와 방송물 중에 골라서 봐도 동영상 볼 여유시간을 다 보내기 때문), '오다기리 조'가 나온다고 하니까, 또한 이 영화의 원작소설이 일본 서점가 베스트셀러였다는 홍보문구도 나름 호기심을 유도했다.

  

1995년 출판사가 배경이다. 대형 출판사에 귀속된 작은 출판사(회사는 같지만 건물이 따로 떨어져 있다)에서 사전을 전문적으로 만드는데 베테랑이 고령으로 정년퇴직을 하게되어 후임을 선택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인트로이다. 정년퇴직자와 마사시(오다기리 조 분)가 출판사 본관에서 사전을 잘 만들 것 같은 신입사원을 선택한다. 이때 마사시가 다소 자유분방하고 능청스런 성격인데 그런 배역을 했던 오다기리 조를 많이 못 봐서 그런지 신선하고 친근감이 들었다. 당연히 주인공 마지메(마츠다 류헤이 분)는 마사시와 전혀 상반되는 성격이다. 점심시간에 사내식당 구석에 홀로 앉아 밥을 먹고 뭔가에 골똘히 빠져있는 듯한, 마치 세미 자폐증에 걸린 것 같은, 그렇다고 병원에 갈 정도까지는 아니고, 소심한 성격인데 일본 영화, 만화, 드라마를 보면 종종 볼 수 있는 인물형이다. 정년퇴직자와 마사시는 그 마지메를 새롭게 사전을 편찬하는 업무에 신입으로 채용한다. 일종의 과를 옮김.    

  

여기까지만 봐도 어떤 관객은 이 영화를 계속 볼지 말지를 바로 판단할 것이다. 보통 한국관객은 지루해할 영화라고 보여진다. 평소 책이나 소설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 하더라도 헐리우드 스타일의 가족 어드벤처 영화라면 모를까 일본어사전을 편찬하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신선한 느낌도 들었고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영화를 봤지만 사전을 편찬하는 이야기가 핵심인 영화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오다기리 조의 색다른 모습도 만족스럽고 소심남 마사시에게 일어날 일들이 궁금해서 계속 관람했다.                                       

  

여담이지만, 이전에 국내영화 '관상'에 대한 감상글을 쓰면서 실제로 관상에 대한 심도있는 내용이 없어서 다소 아쉬웠다고 적었었다. 관상은 단지 주인공의 직업일 뿐이고 실제 이야기는 권력 암투, 부성애였다. 이때 어떤이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었겠다. "내가 보기엔 관상에 관한 전문지식으 그 정도면 괜찮게 표현되었다고 생각되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심도있게 표현되어야 제목을 관상이라고 했던 것에 불만이 없겠소?" 여기에 대한 답이 이 영화를 보면 대충 가늠할 수 있다. 사전편찬에 대한 어느 정도 심도있는 지식을 영화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야 흔한 업무에 불과하겠지만 보통 관객이 보기에 '사전을 편찬한다는 일은 저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

  

히키코모리 같지만 괴상한 성격이거나 이상한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소심한 성격이며 하숙집에 책이 쌓여있고 덩치 큰 누런 고양이에게 음식을 주며 출판사와 하숙집 만을 오가던 마사시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회집에서 일하는 카쿠야(미야자키 아오이 분)와 사랑을 키워나가는데 당연히 마사시 같은 성격에 진도가 잘 나갈리가 없다. 이 부분에서 많은 한국 남자 관객은 "으~ 답답해! 그냥 남자답게 표현해." 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야기적으로 조력자에 속하는 마지메가 영화를 활기차게 분위기를 환기시키기도 하면서 연애조언도 하지만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카쿠야라는 여성의 본래 성격이 마사시 같은 소심남 성격의 남자를, 그러나 그 속에서 세속적이지 않은 어떤 진실됨을 알아봤기에, 좋게 보는 성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카쿠야와 마사시는 소박하게 답답하게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그런 와중에도 마사시의 사전편찬업무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핵심 이야기가 주인공의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 사전편찬이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를 보면 두 남녀 주인공의 연애 이야기가 연상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일부 에피소드일 뿐이지 전체 이야기는 아니다) 어느 덧 사전편찬을 착수한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덩치 큰 누런 고양이와 친절했던 하숙집 할머니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로 떠났고 마사시와 카쿠야는 그 집에서 부부로 산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시간대는 꽤 긴 편이다. 무려 13년 정도이다. 그 기간 동안에 오로지 독자적인 사전(전부다 새로 쓰는 사전)을 만드는 주인공과 주변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인터넷과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액세서리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현대에 가뜩이나 책도 안 팔리는데 그까짓 일본어대사전을 만드는데 무려 13년이나 열정을 쏟아붓는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하나는 무릇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이지만 (분명히 의미가 있는 사전을) 무려 13년이나 꾸준히 열정을 쏟아서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잔잔하게 감동을 준다. 

  

또 하나의 미덕은 요즘 현대사회에서 선망하는 인물상은 사회적으로 발이 넓고 입신양명하고 성공해서 돈 많이 벌고 가방끈이 길고 성격이 쿨하고 스타일이 세련되고 운동으로 다부진 몸매를 지니고 피부가 뽀드득하고 달변가이고 유머감각도 있고 연애도 잘 하고 여유롭게 풍유를 즐길 줄 아는 인물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 마사시는 전혀 상반된 인물에 속한다. 단지 어떤 일에 대한, 이 영화에서는 사전편찬에 대한 집요하고 지속적인 인내와 열정만이 유일한 특징이며 매력의 요소이다. 이런 인물상을 가지고 현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업종의 어떤 일본인들을 위로하는 영화라는 점이 미덕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마사시 같은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개인차가 천차만별이겠지만, 마사시 같은 사람이 사회 곳곳에 회사 곳곳에 있다면 정말 유익하리라는 생각은 (이 영화를 다 본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인정할 것이다. 어떤 조직에는, 비록 공개석상에 나서서 스티브 잡스처럼 프리젠테이션을 인상적으로 해치우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없어서는 안될 인물상이라는 의견에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자신의 직업을 비록 세속인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천직으로 생각하며 순박하고 성실하게 몰뚜하며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A급 사람들을 잔잔하게 위로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연출적인 측면에서 화면을 꽉 채우는 벽장과 책상 위의 책과 문서가 인상적이었다. 일본의 어떤 대도시니까 좁은 건물에 꾸역꾸역 들어찬 책상이며 수북히 쌓인 서류들이며 벽장의 책들이 화면 가득히 채웠는데 영화의 장면들이 마냥 비슷한 화면구도의 나열이 아니라 정교하게 여러 각도에서 인물들을 촬영해서 영화가 지루하지 않고 보는 맛이 있었다. 즉, 영상 자체만을 살펴봐도 영화가 꽤 풍부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숙집도 그렇고 출판사도 그렇고 좁은 공간에서의 여러 각도에서 인물들을 촬영하려니 많이 지루하고 귀찮았을텐데 마치 영화 속 인물들이 오래동안 사전을 편찬하는 인내와 고뇌의 정신을 스텝들이 싱크로라도 한 것처럼 결과적으로 안정적이면서도 풍부한 느낌의 화면을 만들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살아가면서 현실에 다소 지루해하고 의욕이 상실될 때 이 영화를 본다면 개인차가 있겠지만 열정이 살아나는데 보탬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2014년 1월 17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