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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그래비티 (Gravity, 2013)

by 김곧글 Kim Godgul 2014. 1. 20. 20:09



2013년도에 가장 이색적이게 뜨거웠던 외국영화는 '그래비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소 시간차를 두고 나중에 관람했는데 소문 듣고 기대했던 것보다 감동의 심도는 낮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화라는 매체의 표현력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 충분히 치켜세워질 만했다.

  

떠들석한 만큼의 고도까지 감동의 질감이 도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실질적으로 온몸으로 연기한 배우는 두 명 뿐인데 그나마 남자 조연은 오래 못 가고 여주인공 혼자 영화의 절반 이상을 이끌어갔으니 거의 우주 모노드라마를 한 것 때문도 없지는 않다. 게다가 스토리는 구체적으로 없다고 봐도 좋을만큼 단순하다. 일종의 어떤 긴박한 위기 상황에 인물을 내던져주고 어떻게 살아남는지 실시간 페이크 다큐멘터리 같은 스타일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기승전결 스토리도 아니다. 형이상학적으로 어떤 모험에 대입하면 가위에 눌린 악몽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린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위에 눌린 악몽의 자신과 비슷하다.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면 그것도 스토리라는 범주에 속하지만 일반적으로 스토리의 짜임새와 구성을 통해서 감동을 느끼던 보편적인 관습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고 스토리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낮은 수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상하는 동안 내내 '산 넘어 산'이라는 속담이 떠오를 정도로 몰입해서 감상했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어떤 감동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고 '잘 살아났네!' 라는 정도의 표면적인 느낌 뿐이었다. 서바이벌 게임에서 도미노처럼 연속되고 롤러코스터처럼 혼을 빼놓을 정도의 위기를 천신만고 끝에 극복하고 용케도 살아남은 '라스트 맨 스탠딩'을 보는 느낌 뿐이었다. 순수하게 스토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명성만큼 그렇게 빼어나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명성이 전부 다 허세였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영화라는 매체의 독자적인 특징의 지평을 넓혔다는 공적이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라는 것을 핵심 뼈대로 활용하는 예술은 매우 많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야기가 있는 것에 더 많이 감정이입하고 몰입하는 편이다. 오죽했으면 현대에 대중미디어 마케팅을 할 때도 스토리 기법을 활용하라는 전략을 떠들어대겠는가. 좀더 범위를 좁혀서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예술 분야는 소설과 영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연극, 뮤지컬, 만화, 애니메이션도 있지만 큰 줄기를 생각했을 때 소설 또는 영화에 포함하기로 한다.

  

먼 옛날에는 이야기 자체가 중요했다가 세월이 많이 흐르고 사람들의 환경과 의식주가 바뀌고 다양한 개인적인 욕망도 공공연히 표면화되고,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이 익숙한 패턴의 이야기에서는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없고, 그래서 소설 또는 영화가 새로운 무언가를 창의적으로 만들며 발전해갔는데 단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넘어서 똑같은 이야기와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느냐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동의 농도가 천지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바로 그 창의적인 표현방법에 높은 가산점를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대개 각종 유명한 문학상 또는 유명한 예술 영화제에서 높은 평점을 받아 트로피를 거머쥔 작품이 보통 일반인들이 감상하기에 낯설고 불편하고 왜 이런 작품이 상을 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지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설이라면 소설이라는 매체의 특징을 발전시키는데 공적을 세운 작품이 단지 평이한 방법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쓴 작품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영화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기교만을 단순히 나열식으로 전시한 것에 불과한 작품만을 치켜세워주는 것은 아니다. 총체적인 외관과 뼈대를 무시한 세부적인 묘사만이 중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반적으로 20세기에는 좀더 기교적인 측면에 관심을 두었다면 21세기에는 이야기와 인물과 관련된 새로운 시도에도 비중을 두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그래비티'가 영화 매체의 새로운 지평을 넓혔다는 것은 앞으로 나올 대기권 밖 우주, 그러니까 그전까지의 우주 소재 영화는 대부분 진공의 우주를 날고 있는 우주선 내부 또는 우주선 외부 정도가 대부분이였는데 이 영화에서는 지구 중력의 영향이 희미하게 살아있는 대기권과 진공 우주의 경계지역의 환경을 배경으로 미래에 만들어질 수많은 영화들의 영상 교과서 또는 참고서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감을 갖췄다는 얘기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도 사실적인 우주여행 묘사로 훌륭한 명작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비록 우주선 내부 디자인과 우주복은 여전히 전설적으로 훌륭하지만 우주 유영 묘사는 다소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점도 있게 되었다. 요즘에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도 다양한 동영상을 통해서 한두 번 쯤 우주 유영 장면을 봤었기 때문에 눈높이가 높아졌다. 게다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는 '그래비티'의 주 활동무대인 대기권 경계지역에서의 우주 유영 장면은 없었다.

  

또한 이 영화의 특징 중에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대부분 무중력 우주 유영이라는 점이다. 우주선 내부에 앉아있는 잠깐동안을 제외하면 상하좌우가 따로 없는 무중력 우주공간이 로케이션이다. 때문에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영화 촬영 컷에도 변화가 요구되었다. 필요가 발명을 낳는 경우이다. 지표면과 생판 다른 로케이션에서의 영화촬영 컷과 씬과 씨퀀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것에 관하여 새로운 영화논문들이 쏟아져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류의 영화가 실제로 무중력 상태에서 촬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사실적인 표현이 중요한 영화가 대세이기 때문에 실제로 무중력 상태의 로케이션에 있는 것처럼 가정해서 영화 전체를 어떻게 촬영하느냐의 문제는 영화촬영 이론에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영화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인상적인 촬영기술은 영화 '시민케인(1941)'에서 처음으로 체계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래비티' 이후에 새로운 영화 촬영기교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머지 않아 물론 전 세계 인구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기권 밖의 무중력을 경험하며 살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당연히 그곳에서의 삶과 모험에 대한 영화도 더 다양하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 로케이션에서의 사실적인 촬영은 지구상 지표면에서의 촬영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상하좌우가 근본적으로 와해되기 때문이다. 그 로케이션을 배경으로 만들어질 수많은 영화의 참고서가 될 작품이 '그래비티'라는 얘기다. 마치 현대의 수많은 영화학도들이 '시민케인'을 참고하며 영화촬영에 대해 심사숙고했던 것처럼. 

  

영화 매체만의 독특한 특징의 관점에서 '그래비티'가 '시민케인' 만큼의 위상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확실한 존재감의 이정표를 남겼다고 생각된다.  

  

  

여담이지만, 작년인가 서구권의 어떤 모험가가 성층권에서 우주복을 착용하고 스카이 다이빙을 해서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이것을 보면서 느낀 것은 '서구인들의 모험에 대한 스케일이 동양인과 다르구나!' 이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달에 가고 있고 인도에서도 화성에 가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먼 훗날이겠지만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모험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들의 의견도 인리가 있다. 다만, 인간의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 정신이 없었다면 현대 문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당연히 현대인의 필수품인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은 어떤 누군가의 모험의 산물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모험을 종용하고 실패를 위로하는 사회적 인식은 서구문화가 동양문화를 훨씬 앞선다고 생각된다. 

  

'그래비티'는 영화라는 매체의 표현력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모험을 했다. 솔직히 만든 제작자와 감독도 이렇게까지 좋은 반응을 얻을 거라고는 생각치 못 했을 것이다. 내용적으로 그렇게 큰 감동은 없었지만 영화라는 매체에 새로운 시각적 예술의 플랫폼을 창조했다는 관점에서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산드라 블록이 우주선을 조종하면서 "이제 드라이브는 정말 지긋지긋해!" 라는 비슷한 말을 했는데 이 대사는 이 영화에 속하기도 하지만, 산드라 블록이 신인 배우로 출연해서 전 세계적으로 대박을 쳤던 영화 '스피드(1994)'에서 LA 시내버스를 오금이 저리도록 운전했던 모습을 관객에게 상기시켜주는 영화 외적인 재미를 주는 대사이기도 했다.  

  

  

2014년 1월 20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