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감상글(Movie)

[감상글] 더 킬러 (The Killer, 2023)

by 김곧글 Kim Godgul 2023. 11. 18. 17:13

 

 

90년대 말 즈음에 뮤직비디오나 CF 잘 찍기로 유명세를 떨쳤던 감독들 중에 몇몇은 영화계로 넘어와서 영화감독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랬다. 지금은 이런 사례가 거의 없는 편이다. 한두 작품을 만들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은퇴하는 감독이 대부분이지만 (물론 한 우물을 팠던 감독들도 한두 편 만들고 은퇴하면 부러움을 사는 업종이기는 하다) 뮤직비디오 또는 CF의 영상미로 이름을 떨쳤었고 영화감독으로도 이름을 떨쳤었고 여전히 현존하는 팬들이 많고 평론가의 평가도 호의적인 감독이 있었으니 바로 이 영화를 만든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다. (따지고 보면 ‘리들리 스콧’ 감독도 이런 길을 걸었지만 훨씬 오래 전에 걸어왔기 때문에 좀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국내외의 경우는 90년대 중후반 이후를 말하는데 ‘리들리 스콧’ 감독의 화려한 경력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의 현역 감독이기 때문에 주저리주저리 읊어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특이하게도 핀처 감독을 ‘상류층의 사고방식을 잘 표현하는 감독’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작품들을 돌이켜 살펴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그에 대한 이런 평가를 들었던 때는 ‘세븐’이라는 센세이션 작품을 발표한 이후 ‘더 게임’, ‘패닉 룸’으로 화려한 명성이 무르익던 시절이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케이블방송에서 ‘패닉 룸’을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끝부분에 두 모녀가 도둑들로부터 살아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덩치 큰 도둑 ‘번햄(포레스트 휘테커 분)’에 대한 짧은 에필로그성 언급조차 없었던 것도 핀처의 이런 성향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통상적인 한국 영화였더라면 (한국영화는 대부분 소시민적인 가치관이 주류이다. 비록 수익의 대부분은 투자자(자본가)가 많이 가져가지만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디 포스터가 신문을 읽는 장면에서 번햄은 비록 도둑 일당이였지만 두 모녀가 생존하는데 큰 도움을 제공했기에 정상참작으로 감형 어쩌구저쩌구... 짧게라도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 핀처 감독의 따끈하고 반가운 최신 영화 ‘더 킬러’를 감상하고 나서, 감독의 상류층 사고방식 취향 얘기를 꺼냈느냐하면 이 영화에도 그런 것이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영화 ‘더 킬러’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전문 킬러(마이클 패스벤더 분)이 의뢰받은 껀을 실패했는데 그로 인해서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죽이려고 했던 자들을 주도면밀하게 탐문해서 한놈 한놈씩 완전범죄를 꽤하며 제거하는 내용이다.


기대했던 것보다 영상미는 화려하지 않은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정도의 영상미를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아마도 현시대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작품의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눈치 빠른 감독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현시대에 느와르 같은 장르에서도 강렬한 것보다는 마틴 스콜시즈 감독의 ‘아이리시 맨’ 같은 스타일에 더 높은 작품성의 점수를 준다는 것을 핀처 감독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 ‘더 킬러’의 영상미는 강렬하지 않지만 매우 세세하고 주도면밀하다. 관객은 주인공 킬러와 함께 일거수일투족 동거동락하는 기분을 느끼며 감상하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킬러는 담백한 독백을 주저리주저리 중후하게 늘어놓는다. 그의 독백은 그의 생각, 내면,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독백의 내용은 그저 시시콜콜한 헛소리나 가벼운 농담 스타일은 아니다. 킬러의 독백의 상당수는 (앞에서 길게 언급한 것과 관련하여) 상류층 또는 자수성가하여 큰 부를 축적한 사람 또는 어떤 분야에서 매우 성공한 1% 사람의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듯한 사고방식에 가깝다. 


성공학을 다룬 베스트셀러 책에 나오는 명언이라기보다는 (이런 책에는 아무래도 보편성을 염두해둬야하기 때문에 비슷한 패턴의 한계가 있다) 자신의 무덤까지 가져갈 일기장에 적거나 또는 혈연 자식 또는 엄청나게 친한 극소수의 측근에게나 말할 법한 문구들이다. 때문에 말랑말랑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말을 돌려서 말했는데 간단히 쉽게 말해서) 수많은 한국 여자들이 싸이월드부터 인스타그램까지 가끔 올리는 글들과는 거리가 먼 (그러나 뼈를 때리는, 정수리를 치는) 문구라는 얘기이다. 분명히 유용하고 좋은 얘기지만 곧이곧대로 떠들고 실행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수도 있고 직장에서 왕따 당할 수도 있지만 나름 유익한 내용에 속할 수 있는 문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제치고 제치고 높은 자리에 오른 성공한 자의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주인공 킬러는 의뢰받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부를 축적해서 도미니카 공화국에 숨어서 잘 살고 있는 성공한 갑부 킬러이다)


한가지 내용을 더 첨부하자면 위의 내용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것이기도 한데, 킬러가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죽이려고 했던 자들을 처리하면서 가장 최상위 포식자까지 찾아가서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나름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그를 살려주면 더 이상 자신을 쫓아오는 자들을 방지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결정권자의 권좌에 있는 자이므로.) 비록 영화적 이야기의 결말일 뿐이지만, 최상위 책임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 대중 영화의 클리세에 가까운데 이 영화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고, 앞에서 말한 감독의 성향(상류층의 사고방식을 대변한다, 달리 말하면 상류층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거북스럽지 않은 영화를 잘 만든다)를 따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여러 계층이 혼재하고 있는 유명한 영화제들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데 조금이라도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한국 영화 ‘기생충’이 당시에 가장 큰 경쟁작 ‘조커’를 제치고 작품상을 받게 된 이유 중에 비록 결정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가산점을 받은 것 중에 이런 것도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커’에서는 영화 내에서 가장 성공한 최상위 포식자라고 볼 수 있는 유명 앵커(로버트 드니로 분)를 조커가 설마 했는데 정말 총으로 쏴서 죽였다. 이런 장면은 작품상에 감점으로 작용될 가능성이 높다. 점수를 매기는 투표 인단 중에는 뼈속까지 상류층도 충분히(넉넉히) 많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거북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도 수많은 소시민을 죽게 만든 게임 메이커 재벌 노인을 주인공이나 조연이 살인으로 복수한 것은 아니다. 노환으로 죽은 것이지. 또한 영화 ‘올드보이’도 그렇다. 주인공 오대수가 이우진(일종의 게임 메이커)를 직접 죽이지는 못했다. 아마도 이 논리는 겉으로 많이 떠벌리지 않는 잘 들어나지 않는 작품상 또는 시대를 넘나드는 명작 영화의 속성일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모든 명작들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슈퍼히어로물의 빌런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상류층의 사고방식으로 슈퍼히어로에 등장하는 최상위 빌런과 자신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영화 ‘더 킬러’에서도 최상위 포식자(일종의 게임 메이커)를 주인공이 죽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참에 관련 내용이 생각나서 적어봤다.


아무튼, 영화 ‘더 킬러’는 신선하고 고상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확실히 고급스런 맛이 있다. 그러나 강렬하게 맵고 짠 맛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매혹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예전 영화의 찐팬이라면 정말 반가운 영화가 아닐 수 없다.


2023년 11월 18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