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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by 김곧글 Kim Godgul 2013. 3. 19. 21:35



답답하고 고리타분할 정도로 사랑에 순수하고 순진한 남주인공, 젊은 시절 화려했던 직업과 결혼에 실패하고 현실에 고독하게 안주한 비련의 여주인공, 관객의 치열하고 고단한 생계로 인해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두고 살았던 순수한 감수성을 어루만져주는 지고지순한 복고풍 사랑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듯 한 느낌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뭘까? 원래 수많은 인간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감동해 온 전형적인 줄거리이거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런 인물과 로맨틱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이 영화 이후에 텔레비전 드라마, MBC 베스트셀러 극장 또는 KBS TV 문학관 같은 단막극, 국내 만화, 소설 등에서 간간히 접할 수 있는 줄거리 패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에서 낯설지 않은 순수한 로맨틱 멜로다.

  

처음에는 마치 술집 여종업원과 남자의 사랑인 것처럼 관객이 상상하게 만드는데 그 장면은 여주인공 혜린(황신혜 분)이 연극 무대에서 연기하는 장면이었다. 어디까지 지고지순할지 종잡을 수 없는 희대의 순진남 영민(안성기 분)은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보다 이전부터 혜린의 연극을 관람하며 꽃다발을 주며 짝사랑을 해왔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그 이후에도 영민이 늙어 죽을 때까지 혜린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야말로 극한의 지고지순한 인물상이다. 익스트림 퓨어 러버(extreme pure lover, 극순진남)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방금 필자가 만든 용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민과 혜린이지만 실질적으로 한 명을 꼽으라면 영민이다. 이야기의 핵심 줄기는 영민이 얼마만큼 언제까지 지고지순한 사랑을 해내는가이다. 아마도 이 방면에 있어서 그 당시까지 없었던 인물, 또는 그런 인물상을 그 당시의 시대에 가장 깊이 있게 공감을 끌어낸 새로운 시대적 인물이었기에 수많은 한국 관객이 영화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반면에 혜린은 아주 젊었을 때 주목받던 배우인데, 영민의 프로포즈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고,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성공하는 꿈을 품고 미국에서 자리 잡았다고 허풍을 떨었던 재미교포와 결혼했는데, 그 당시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에 건너간 사람들 중에 거의 노가다 같은 생고생을 하며 성공한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터, 고단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귀국해서 사는 사람도 없지 않았는데, 즉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측면을 경험하고 허풍꾼 남편과 이혼하고 브로드웨이 배우의 꿈을 접고 귀국하여 영어 번역업에 종사하는 사무직원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혜린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영민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의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고 영화는 영민의 편에서 그의 굳은 절개를 계속 보여준다. 혜린의 거부와 외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현대의 영화와 다른 점이자 약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영민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거나 또는 인상적으로 시도하지는 않는다. 창조적이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순수한 마음을 표현한다. 반드시 다양하게 시도해야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보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마침내, 혜린은 영민의 사랑을 받아주게 되는데, 신혼 여행을 가서도 답답한 순진함은 여전하다 못해 현대를 기준으로 보면 심각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아마도 혜린의 입장에서는 이미 허풍꾼 재미교포라는 전남편에게 된탕 당해봤고 가슴을 쓰라려봤기 때문에 연애를 잘 하는 남자한테보다는 오히려 잘 못하는 영민 같은 남자한테 진실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이야기의 한국 영화에서 감동을 더 깊게 주기 위해서 남주인공 또는 여주인공이 비련의 십자가를 쥔다는 것은 이미 예상된 결말의 화룡점정이다. 끝장면에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정도가 크지는 않았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순수한 감수성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괜찮았다. 일종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물들의 섬세한 감수성 연기도 좋았고 그것을 잘 표현한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약간의 옥의 티가 있다면 지나치게 눈에 티나게 영상 기교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신선한 기술이었는지 모르지만 요즘 시대에는 눈에 띄는 기교가 관객이 이야기와 인물에 몰입하는데 방해되면 안좋다는 평론이 지배적인데 그런면에서 거슬리는 기교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그 당시에는 물론 요즘 시대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가뭄에 콩 나듯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극한의 지고지순한 순수한 사랑을 오랜만에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요즘 시대에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팜므 파탈 또는 매혹적인 가면을 쓴 순수한 여자, 나쁜 남자 또는 수컷성이 강한 탈을 쓴 지고지순한 남자가 인기 있는 것 같은데 당연히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각자의 심층적이고 개인적인 취향 중에 실락 같은 한줄기의 빛이니까 말이다. 다만, 세상 만물이 환상이 아니 듯, 사랑 또한 환상적인 것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사랑할 때 비로서 사랑의 오묘한 생명력을 오래도록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3월 19일 김곧글(Kim God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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