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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고래사냥(1984)

by 김곧글 Kim Godgul 2013. 3. 21. 17:37


고래사냥 OST : 김수철 - 나도야 간다



80년대 국내에서 영향력이 컷던 영화 중에 국내 국외 계급장 때고 대표하는 영화 10편을 뽑으라면, 애마부인(1982), 어우동(1985)과 함께 이 영화도 포함될 것이다.   

  

최근 한류의 영향으로 국제적으로 티켓 파워를 거머쥔 아이돌 가수 출신이 연기를 하는 경우가 자연스런 사회현상이다. 인기 가수가 연기도 병행하는 경우는 최근의 특별한 트렌드는 아니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고, 국내에서도 이 영화의 경우처럼 과거에 없지 않았다. 이 영화의 남주인공 김수철이 그런 경우다.

  

김수철이 국내 대중음악 팬들에게 끼친 영향력 면에서는 조용필과 비교할 바가 안되겠지만 대중음악에 대한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적인 재능 그리고 화려함을 뒤로하고 한국 전통 음악과 현대 음악을 접목하는 실험적인 시도를 생각하면 한국의 대중음악사에서 굵직한 획을 그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기도와 흥행도를 별개로 했을 때 말이다. 

  

김수철이 나중에 심오하게 대중들이 느끼기에는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게 자신의 음악성 탐구에 빠져들었지만 그 전에 한창 젊은 나이에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고 그 때에 이 영화의 주연도 하게 됐을 것이다.  

  

배창호 감독이 만든 영화들의 남자 주인공의 특징은 순수한 소년의 감수성을 지녔지만 다소 어리숙하고 사회적으로 약한 남성상이 많은 것 같다. 김수철이 연기한 병태라는 대학생도 그렇다.


반면에 이 영화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은 민우(안성기 분)인데 배우 안성기의 재능과 실력과 존재감을 가장 잘 들어내준 인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능청스럽고, 영리하고, 관습적 윤리를 쉽게 외면하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고, 자존심과 자아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 인물상이다. 민우 같은 인물은 국내외를 통틀어 수많은 명작 소설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때로는 약방의 감초 때로는 악당으로 때로는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언젠가 텔레비전으로 본 것 같은데 주요 인물 세 사람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엇그제 다시 보면서 이런 이야기였구나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일종의 한국식 로드무비라고 볼 수 있다. 요즘에는 로드무비 장르가 별로 없는 편인데 언젠가 로드무비 영화가 어렵지 않게 나왔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최근에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더 이상 다른 지역에 대한 호김심이 그리 많지 않고, 있더라도 사진과 영상으로 호기심을 달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어려서부터 경제적인 고민과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야하는 현대문명이라는 미로에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로드무비 같은 다소 비현실적인 측면도 있고 의도적인 청춘의 방황 같은 일상 탈출 영화에 매료되지 않는 것 같다. 또한 일상탈출을 컴퓨터 게임 속 가상세계에서 때우는 경우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리숙하고 답답하고 순수한 극단적인 순진남 병태는 자신의 동정을 바치는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여자를 어떻게 사귀어야하는지 잘 모르는 성격이기 때문에 당연히 대학교 댄스 파티에서 생각했던 여인과 잘 될 리가 없다. 욱 하는 성격은 있어가지고 길거리에서 생면부지 사람들과 실랑이가 붙지만 민우가 말려준다. 민우는 그 시대에 남자들이 적어도 군대에 가기 전에 떠밀려서라도 가게 된다는 조선시대로 치면 기생집에 병태를 데려간다.


여기서 만난 춘자(이미숙 분)에게 동정을 준 순진남 병태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이런 영화의 클리세에 가깝다. 춘자도 그곳에 끌려온 지 얼마되지 않았다. 아직 그 직업을 강력하게 거부하는데 조폭 이대근에게 혼쭐이 난다. 그 장면을 보게 된 병태는 민우를 왕초로 섬기기로 하고 춘자를 현대 기생집에서 탈출시킨다. 그리고 춘자가 돌아가고 싶다는 고향, 우도로 향한다. 세 명의 주인공은 우도를 찾아 하얀 눈으로 뒤덮힌 시골길로 도주하고, 이대근과 쫄따구들이 그들을 쫓는 한국형 로드무비가 영화의 중후반을 차지한다.

  

잡힐 듯 말듯 한 도주와 추격의 묘미가 그 당시에는 관객에게 큰 재미와 감동을 준 것 같다. 오늘날 봐도 어느 정도는 재미는 있는 편이다. 다만, 리얼리티는 떨어지는 편인데 이 영화의 장르가 로맨틱과 청춘드라마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폭 이대근은 추격자 치고는 치밀하지 못 하고 어설프기까지 하다. 끝에 가서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개과천선하는 중요한 장면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어울려 완성도를 갖췄다는 점이다.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현대 도시 판타지 같은 느낌도 든다. 그만큼 낭만적인 인물과 세계관이 들어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복선이 있는데 그것은 벙어리인줄 알았던 춘자가 우여곡절 끝에 고향집에 도착해서 어머니를 만나고나서는 말문이 트인다는 점이다. 원래 벙어리가 아니라 그 외딴 시골에서 돈을 벌러 서울에 왔다가 조폭을 만나 현대판 기생집으로 납치되면서 그로인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소위 실어증에 걸린 셈이다.


이것은 그 당시에 전국토가 급속도로 산업화되고 도시화되면서 서울로 몰려드는 농촌 출신의 순수한 사람이 불행해진 것에 대한 위로, 좀더 크게 보면 자연주의 또는 전원생활을 그리워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의 대부분이 하얀 눈으로 뒤덮힌 농촌을 걷는 것도 이런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봄, 여름, 가을도 아니고 하필 영화촬영하기 힘든 추운 겨울이어야 했던 이유는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겨울과 통하는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면에선 이 영화보다 10년 정도 앞선 명작 국내영화 '삼포 가는 길(1975)'의 청춘판이라는 생각도 든다. 눈덥힌 하얀 농촌길을 도보로 걷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말이다. 적어도 배경이 주는 토속적이고 인상적인 분위기는 닮은 점이 있다.

  


영화 초반에 아직 춘자를 만나기 전의 병태가 민우에게 자신은 고래를 잡으러 가야겠다고 말한다. 그 고래란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영화상으로는 끝날 때까지 정확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제목에 사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냥 흘려지나가는 대사도 아니다. 관객 각자가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 것 같다. 필자의 경우에 떠오른 생각, 병태가 잡겠다는 고래란 것은 '삶의 의미를 가리키는 무엇'이다. 또 하나, 오즈의 마법사에서 사자가 원했던 '용기'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태의 입장에서 넓은 의미의 용기란 매우 갖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 후반부에 민우가 사랑과 시기(질투)의 차이점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같은 것인데, 19금 내용이기도 하고, 글로 후딱 읽는 것보다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지는 않는다.


8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영화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영화답게 세월이 흘러 강산이 변해버린 세상에 다시 봐도 충분히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다소 남자 관객 취향이라는 점은 고려하고 봐야할 것이다.



2013년 3월 21일 김곧글(Kim God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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