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The Birds, 1963)'를 단편소설처럼 써봤다. 몇 달 전부터 짬짬이 써왔는데 최근에 이곳에 포스팅할 정도로 완성한 것이다. 여전히 수정할 곳이 존재하지만 한도 끝도 없이 지연되고 말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이 있기는 하다. '데프니 듀 모리에' 여류작가의 소설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모티프를 제공했을 뿐 실제 내용과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일단 나의 작품을 쓰고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비슷한 작업으로 이전에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1977)'를 만들어봤었다. 그때보다 좀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분량도 긴 편이다.


관련글: 토요일 밤의 열기 (Saturday Night Fever, 1977) (A4: 12 pages)



이 영화는 단지 새가 인간을 공격하는 특이한 재난 영화는 아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그렇지만 그 속에 인간들의 이야기는 흔히 블록버스터에 사용되는 전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조차 명확히 보이지 않는 편이고 몇 번 보고 관련 영화책을 읽고 봐야 처음 볼 때는 몰랐던 부분들이 보여지는 작품이다.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영화를 단편소설로 써보는 작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뭔가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 울림이 있는 영화여야 고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10월 4일 김곧글(Kim God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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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The Birds, 1963)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기반으로 단편소설로 씀. 원작소설과 시나리오는 참고 안했음)

(분량: '아래한글'에서 10pt로 A4용지 27페이지)



이 도시의 공기는 매캐하고 습하다. 로마에 다녀온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리움이 맴돈다. 스쳐 지나친 수많은 관광객들이 아니라 뜨겁고 건조한 햇살과 이국적인 풍경이 뭉게구름처럼 기억의 저편으로 떠내려간다. 고대의 신화세계에 살았던 고래가 그녀를 집어삼켜서 깊고 푸른 대서양을 건너는 것도 모자라 태평양에 접한 샌프란시스코 도시에 내뱉어 놓았으리라. 어떤 무엇의 힘의 작용에 의해서.


굳이 지금 이 도시에 머물고 있을 이유는 없는데. 지루하고 따분해. 아버지의 눈치를 조금 살폈다가... 다음엔 어느 도시로 가볼까? 파리, 런던, 베니스, 취리히... 로마에 다시 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 창피한 가십기사 따위만 아니었어도 지금도 여전히 로마에 머물렀을텐데... 이젠 나만 의식하지 않으면 굳이 누가 들춰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어떤 무엇의 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녀를 완전히 흡수하는 것이리라.



한 여인이 신호등을 건너는 수많은 관광객스러운 인파를 가로지른다. 발걸음이 가볍고 상쾌한데 우아한 분위기로 인하여 일반인들과 달라보이게 한다. 마천루를 가로지른 어딘가에서 “휘이익!” 하는 소리가 그녀의 관심을 휘어잡는다. 그녀가 돌아봤더니, 어린 소년이 그녀의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휘파람을 날렸던 것이다. 그녀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미소로 화답해준다. 그녀가 유명한 셀러브리티는 아니지만 이런 일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먼 곳에서 다른 휘파람 소리가 메아리치듯이 귓전으로 날아온다. 좀더 깊고 강한 울림이다. 거리는 사람들로 번잡하지만 시가행진 따위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유니온 광장의 열린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범인을 알겠다. 수많은 새 떼가 환한 대낮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밀집해서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떼창이었다. 전혀 없는 일도 아니지만 흔히 보는 장면도 아니다.


뭐지? 그녀는 서둘러 애완동물상점으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배 나오고 짝달막한 아저씨가 애완견 두 마리를 앞세워 돌진해 나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이봐요! 숙녀가 입장하는 거 안 보여요? 뚱뚱한데 배까지 나온 아저씨는 고대 쌍두마차를 몰 듯이 거리 저편으로 사라지고 여인은 상점 내에 진열된 애완동물 사이를 가로지른다. 개, 고양이, 원숭이, 토끼 등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간다. 그 구역은 새들 전용 매장이다.


연로한 점원 아줌마는 그녀의 주문을 잘 기억하고 있다. “멜라니 다니엘스, 주문하신 구관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네요. 오후에나 도착할 것 같아요.” 인도에서 새끼를 부화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다는 둥 결코 구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며 행여라도 주문을 취소하지 않도록 애쓴다.


멜라니는 자신이 주문했던 것이 새끼가 아니라 다 큰 어미이고 게다가 인간의 말을 흉내낼 수 있는 새가 확실하냐고 재확인한다. 당연히 연습만 시키면 인간의 말을 잘 따라한다는 점원 아줌마의 설명에 안심한 멜라니는 집으로 배달해달라며 테이블에 있는 싸구려 연필을 집어서 비치된 이면지에 집주소를 적는다. 점원 아줌마는 운송업체에 연락을 해보겠다며 카운터를 비운다.


그때 1층 정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온다. 말끔한 그러나 어두운 색상의 양복차림에 양손을 번갈아가며 중절모를 만지작거리면서 중년 여인들이 대부분인 익숙지 않은 상점에서 쑥스러움을 달래본다. 주위를 쓱 둘러본다. 찾는 애완동물이 없어 보인다. 2층을 올려다보더니 곧바로 계단으로 올라온다. 발걸음은 시원스럽고 거침이 없다.


남자는 2층에 올라오자마자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그의 왼쪽에는 왕관 모양이 장식된 커다란 새장이 있고 그 속에는 검은 깃털의 새가 있다. 등 뒤에는 으리으리한 미니어처 궁궐 장식품이 있다. 그의 시선은 하이힐이 떠받드는 미끈한 각선미의 종아리를 타고 올라가 검은 옷을 입고 싸구려 연필을 끄적거리는 멜라니를 바라본다. 우아하고 고급스럽고 이지적인 외모. 저 여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겠다. 그러나 솔직히 아는 척 하고 싶지 않다. 대화하고 싶지 않은 타입이라서가 아니라 자칫 자신의 속마음이 들어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돌려 나가버리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전혀 그답지 못한 행동이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멜라니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마치 점원으로 알아본 것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다. “잉꼬 좀 볼 수 있을까요? 여동생한테 생일선물로 사줄 건데요. 얘가 11살이라서 가능하면 잉꼬의 성격이 너무 노골적이거나 무미건조하지 않은 적당히 애정 표현을 잘 하는 잉꼬 한 쌍이면 좋겠습니다.”


젠틀하고 준수한 외모의 신사가 자신을 점원으로 생각하는 것에 멜라니는 ‘어딜 봐서 내가?’라고 발끈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왠지 이 상황을 재밌게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남자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의 외모에 홀려서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에게 해명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베테랑 점원처럼 연기한다. 새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행동하더니 그럴 것 같다고 생각되는 새를 가리키며 잉꼬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새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들통 나고 만다.


남자는 새에 관해 젬병은 아니었다. 카나리아와 잉꼬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가 대뜸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기분이 나쁘지 않냐고.


멜라니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혹시 내가 점원이 아니란 것을 벌써 알아챈 걸까?


“아무런 잘못도 없는 새들이 영문도 모른 채 새장에 갇혀서 살아가야할 때 영 기분이 나쁠 것 같은데요.” 그 남자는 새장 속의 새들에 관해서 물은 것이다.


멜라니는 본의 아니게 활짝 미소 짓는다. “그렇다고 수많은 새들을 가게 안에 마음대로 날아다니게 풀어 줄 수도 없잖아요.”


남자는 같은 종만을 같은 새장에 넣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묻고 그녀는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상식적인 수준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털갈이할 때는 특히 더 그렇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매우 예민하고 위험한 시기라고 부연설명한다. 그는 털갈이하는 시기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고, 그녀는 표정이 창백해지고 처량해진다고 대답한다.


그 짧은 대화의 순간 멜라니는 자신도 납득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을 느낀다. 단지 새들의 털갈이에 관하여 얘기했을 뿐인데 그가 그녀의 옷을 벗기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단지 털갈이 하는 시기가 오면 새들의 표정이 창백해지고 처량해진다고 얘기했을 뿐인데 마치 그녀의 알몸을 음미하며 순백의 침대로 이끌어가며 욕망으로 가득 찬 그의 눈빛과 안색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다.


“카나리아로 선물하면 어떨까요?” 멜라니가 추천한다. 남자는 잠깐 생각해보더니 한 가지를 요구한다. 설마 새를 꺼내서 보여달라고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멜라니는 원래 새를 판매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일단 왼손에 쥐고 있던 연필을 귓바퀴에 꽂는데 하마터면 머릿결에 가려진 속살을 찌를 뻔 한다. 새장을 열고 카나리아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녀로서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생각만큼 쉽게 잡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서 점원이 아니었다는 것을 들키기는 싫다. 가까스로 새를 잡아서 새장에서 꺼내는데 필사의 몸부림에 놀라 손의 힘을 늦추었더니, 카나리아는 그녀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날아가 천장의 이곳저곳을 마음껏 날아다닌다. 마침 볼 일을 보고 나타난 점원 아줌마와 멜라니는 상점 천장을 휘저으며 날아다니는 카나리아를 올려다보며 안절부절 못 한다.


두 여인이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허둥대는 모습이 귀여운 고양이들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재밌는 상황이 즐겁기도 하거니와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할 전략이 유효적절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수처럼 남자는 지긋이 미소 짓는다.


한참 날던 카나리아가 창공으로의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테이블 위에 영수증과 메모지가 쌓여있는 재떨이에 내려앉는다. 남자는 카나리아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다는 듯이 새에게 다가가 들고 있던 중절모로 순식간에 재떨이를 덮는다. 두 여자는 거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것처럼 그에게 찬사하는 표정으로 화답한다. 


“황금 새장으로 들어가렴. 멜라니 다니엘스.” 남자는 중절모 안에서 카나리아를 꺼내 본래 있던 새장에 넣으면서 멜라니의 귀에도 잘 들리도록 명확하게 말한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멜라니는 왼쪽 귓바퀴에 꽂았던 연필을 빼 듣다. 무의식적으로 연필의 뾰족한 부분을 창으로 착각해서 그를 찌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죠?” 멜라니의 목소리는 날카롭다.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두 사람이 서로 법정에서 만나 적이 있다고. 멜라니는 심적으로 뜨끔했지만 일단 강력하게 부정하고 본다.


남자는 멜라니가 그저 장난을 치다가 누군가의 판유리를 깨먹어서 그 사람에게 큰 손해를 끼쳤는데도 법정 판사는 적절한 처벌로서 그녀를 감방에 보내지 않은 재판에 관하여 상세히 기억해낸다.


멜라니는 그의 말에서 반박할 만한 허점을 찾아내지 못 한다. 대신, 그의 본업이 뭔지, 처음부터 자신이 이 상점의 점원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장난을 친 이유가 뭔지, 따위를 따져 묻는 것으로 화제를 전환한다. 남자는 장난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어떤지 실제로 체험시켜주고 싶었다고 차분하게 대답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빠져나간다.


멜라니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쌍욕으로 남자의 뒤통수에 내던지고 싶었지만 인내심과 자제심을 발휘한다. 천하의 내가 저런 하찮아 보이는 남자에게 굴욕을 당하다니. 저 남자 정체가 뭐야? 잉꼬를 구입하러 왔다고? 혹시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닐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이대로 잊어버리기에는 뭔가 께름칙하다.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생각이 떠오는 멜라니는 황급히 달려 내려간다. 남자는 상점 앞에 세워둔 자신의 포드 갤럭시 승용차에 올라타자마자 출발한다. 그녀는 재빨리 차량넘버를 확인하고 상점 현관 옆 계산대에 있는 전단지에 머릿속에서 증발해버리기 전에 적어놓는다. 점원 아줌마는 멜라니가 주문한 구관조가 걱정인가보다. 멜라니는 집으로 배달해달라고 재확인해주고, 전화기 좀 쓰겠다는 허락을 받아 싸구려 연필의 꽁무니로 익숙하게 다이얼을 돌린다. 연필을 쥔 손으로 수화기에 연결된 꼬인 선을 요염하게 조몰락거리는 멜라니의 모습은 영락없이 여러 남자를 쥐락펴락 해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이다.


통화상대는 데일리 뉴스 신문사 사회부에 근무하는 찰리이다. 찰리는 단박에 눈치를 까고 무조건 바쁘다며 끊을 태세다. 멜라니는 부담이 되는 부탁은 아니라고 미리 선수를 치며 안심시킨다. 차량관리부에 방금 알아낸 차량번호의 신원조회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형식적인 안부인사로 아버지와 통화하겠냐고 묻지만 그녀는 지금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온갖 일로 바쁘신 아버지는 다음에 만나러 가겠다고 전해달라고 말하고 끊는다.


멜라니는 점원 아줌마에게 추가주문을 한다. 잉꼬 한 쌍. 지금 상점에는 없고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준비할 수 있다고 점원 아줌마가 확인해주자 멜라니는 구입의사를 확실히 전달하고 자신의 마음을 향하여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다.      



다음 날 토요일 아침, 멜라니는 연초록 투피스 위에 고급스런 밍크코트를 걸치고 은빛 스카프를 어깨에서 가슴 아래로 늘어뜨린 스타일로 그녀만의 고급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애완동물상점에서 잉꼬를 구입해서 미첼 브레너라는 남자가 사는 아파트로 향한다. 미첼 브레너는 어제 그녀에게 굴욕감을 주었던 남자이다. 아버지 신문사의 찰리에게 부탁해서 알아낸 정보로 그의 실명과 거주지를 알아낸 것이다.


멜라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동승한 대머리 꺽다리 아저씨가 그녀와 잉꼬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화려하고 고급스런 의상을 입은 낯선 여인과 잉꼬 한 쌍이라니, 호기심의 시선을 잠재울 수 없었나보다. 하필 내리는 층도 같을 게 모람. 걷는 복도의 방향까지도 같다.


멜라니는 그가 혹시 괴한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한다. 다행히도 그는 미첼 브레너 집의 맞은편에 사는 이웃이었다. 멜라니가 미첼 브레너의 현관 앞에 잉꼬를 내려놓고 편지를 그 위에 올려놓고 가려는 순간, 자신의 현관 앞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대머리 꺽다리 아저씨가 그녀에게 말한다. “미첼 브레너 씨를 찾아왔나요? 주말에는 집에 없습니다.”



드넓은 푸른 초원이 하늘에 맞닿는 먼 곳으로 뻗는다. 크고 작은 언덕들로 인하여 구불구불한 지평선이 펼쳐진다. 언덕들 사이로 요리조리 휘청거리는 아스팔트 도로. 선 굵은 엔진 굉음과 거친 타이어 마찰음이 일궈내는 앙상블의 화음을 포효하며 질주하는 애스턴마틴 컨버터블 스포츠카. 조수석에는 잉꼬 한 쌍이 커브 길 마다 좌우 방향으로 쏠리는 현상을 즐기며 운전자와 일심동체가 된다.


멜라니는 오랜만에 상쾌한 전원 공기를 마시며 드라이브를 즐긴다. 번잡한 도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로마에서 돌아와서 도시 외곽을 달려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래 살았지만 이 교외지역도 처음 와본다. 조금 전 미첼 브레너의 이웃 집 대머리 꺽다리 아저씨가 주말이면 으레 미첼 브레너가 머무는 곳을 알려줬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100km 달리면 나올 겁니다. 대략 한두 시간 걸릴 거요.”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뻗은 도로를 1시간 넘게 달리고 있다. 구불구불하게 뻗은 한적한 도로를 자유롭게 운전하는 특별한 재미와 맛을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좋은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일도 그러하리라 기대한다.


머지않아 멜라니의 명품 오픈카가 도착한 곳은 ‘보데가 베이’라는 소도시이다. 어부들도 있지만 농부들도 함께 살아가는 형태의 작은 마을이다. 멜라니는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잡화점 앞에 정차한다. 그녀의 고급스런 복장과 스포츠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또는 당연하다는 듯 또는 즐기는 듯 전혀 개의치 않는다.


멜라니가 잡화점에 들어간 이유는 작은 마을이라 우편 업무도 같이 봐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안경을 쓰고 사무적일 것 같이 보인 잡화점 아저씨는 멜라니의 질문에 손수 문밖에 나가서 정확하게 알려준다. “바다 건너 두 나무가 있는 하얀 집 보이죠? 거기가 브레너 가족이 사는 집입니다.” 브레너 가족이라고? 멜라니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브레너 가족이라면 브레너 부부 말인가요?” “아뇨. 브레너 씨는 몇 년 전에 죽었고 지금은 리디아와 자식 둘이 살아요.” “자식이 둘이나 있어요?” “미첼과 여동생이요.” 피식... 멜라니는 속마음이 들키지 않을 만큼만 활짝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깜짝 놀래켜주려고 하는데 브레너 집의 뒷문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냐고 멜라니가 묻자 잡화점 주인은 보트를 타고 만을 가로질러 가는 방법 밖에 없다고 알려준다. 그녀는 보트를 빌리겠다고 예약주문한다. “혹시 미첼의 여동생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잡화점 주인은 ‘앨리스’일거라 하고 구석에서 코를 처박고 일하던 점원은 ‘로이스’일거라고 알려준다. 일거라가 아니라 확실한 이름을 알고 싶다고 멜라니가 말하자 잡화점 주인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호텔을 지나서 쭉 가다보면 학교가 나오고 그 옆에는 정글짐이 있는 놀이터가 있고 그 옆에 빨간 우체통이 서있는 아담한 집이 있어요. 그 집에 학교 선생인 애니 헤이워스가 살아요. 그 선생은 미첼의 여동생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거요.” 멜라니는 살면서 이런 타입의 아저씨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 친절에 대해 감사를 표현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왕이 열심히 일한 평민에게 하사하듯 90할의 의연함과 10할의 다정함을 섞은 미소를 던져주고 잡화점을 나온다. 잡화점 주인은 멜라니가 가게를 나가는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기 드문 아름다움에 푹 빠진 듯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한적하고 전원적인 시골길과 많이 어울리지 않는 컨버터블 스포츠카가 위풍당당하게 달린다. 오르막길을 지나서 보데가 베이 학교가 나온다. 아담한 교회를 닮은 소규모 건물이다. 초등학생들이 많지 않은가보다. 조금 더 가니까 잡화점 주인 말대로 빨간 우체통이 보이는 주택이 보인다.


멜라니는 정차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시죠?” 멜라니가 얼떨결에 대답한다. “저예요.” 이런! 내가 왜 ‘저’라고 대답했을까? 여기 사는 사람이 초등학교 선생인건 맞지만 까마득한 옛날의 우리 선생님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집안에서가 아니라 집주변 어딘가에서 들린다. “저가 누구죠?” 화단에서 젊은 여성이 뺨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걸어 나온다. 핏빛 붉은 옷이 인상적이다. ‘애니 헤이워스’구나. 멜라니도 여인 쪽으로 걸어간다. “실례합니다. 시내 우체국에서 알려줘서 왔어요. 브레너 씨의 따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해서요.” “캐시에요.” “우체국에서는 앨리스 아니면 로이스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 우편물이 제대로 배달되는 일이 없죠.” 화단의 흙이 뺨에 어렴풋이 묻은 애니는 멜라니에게 담배를 권하고 불을 붙여준다. 두 여인은 휴식을 취하는 군인들처럼 맞담배를 태우며 뿌연 연기를 흩날리고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서로를 탐색한다.


두 여인 사이의 고요함을 깨는 질문을 애니가 던진다. “캐시한테 볼 일이 있나 봐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애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반대로 돌려 시선을 전방으로 향한다. 냉랭한 묘한 기운이 담배 두 개비의 연기에 섞여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미치와 잘 아는 친구인가요?” “미첼 말인가요? 그와는 단지 조금 아는 정도에요.” 애니는 다시 등을 되돌려 멜라니와 시선을 마주친다. 애니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방금 전까지 화단을 손보고 있다가 담배 생각이 간절했는데 마침 딱 오시는 바람에 요긴하게 필 수 있어 좋네요. 이곳에 오래 머물 건가요?” “아뇨. 몇 시간 정도 될 겁니다.” “캐시만 보고 떠나겠군요?” “거의 그렇겠죠.” 멜라니는 뭔가 성의 없이 대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덧붙인다.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모호하게 대답했네요.” “괜찮아요. 어차피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닌데요 뭐.” 애니는 무심하게 시선을 돌린다.


애니는 담배불을 즈려밟고 멜라니를 배웅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왔겠군요?” “네.” “드라이브하기 좋은 곳이죠. 거기서 미치를 처음 만났나요?” “그런 셈이죠.” “다들 거기서 미치를 만나나 봐요.” 멜라니는 차문을 열려다 말고 애니를 바라본다. “헤이워스 씨, 이번에는 그쪽이 모호하게 말하는군요.” 애니는 활짝 멋적게 웃어넘긴다. “다른 뜻은 없어요. 제가 좀 돌려서 말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멜라니의 조수석에 잉꼬 한 쌍이 경쾌하게 지저귀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 귀여워라. 무슨 새에요?” “잉꼬에요.” 애니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새로 알아챈 사람처럼 멜라니를 빤히 바라본다. “아하! 그렇군요. 잘 되길 바랄게요. 멜라니 씨.” 애니는 굵은 저음의 엔진음을 포효하며 멀어져가는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시 잡화점으로 돌아온 멜라니는 애스턴마틴 후드 위에 카드가 든 봉투를 놓고 고급 금속재 만년필로 글자를 적는다. ‘캐시에게’. 그리고 차를 몰고 선착장으로 가서 주차한다.


잉꼬 한 쌍이 든 새장을 들고 크고 작은 보트들이 정박한 곳으로 가서 예약한 보트를 찾는다. 선원이 모터의 시동을 걸어주고 멜라니는 홀로 보트를 타고 만을 가로지른다.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의 바다에 피라밋 형태를 꽁무니에 그리며 모터보트는 브레너 가족의 집으로 유유히 이동한다. 물위에서 마을을 바라보니까 이색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거의 도착할 무렵, 멜라니는 모터를 끄고 전방을 탐색한다. 마치 상륙할 지점을 확인해보는 그리스 전사 같다. 그렇다면 새장에 든 잉꼬는 트로이 목마일 것이다. 브레너 가족의 집 앞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와 여동생 캐시가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가버린다. 미치는 헛간으로 들어간다. 주택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멜라니는 조심스럽게 노를 저어 보트를 선착장으로 이동시킨다. 서프라이즈를 위한 잠입 상륙 작전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멜라니는 황급히 새장을 들고 내려서 브레너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초인종을 누를 필요도 없이 은밀하게 들어간다. 마치 잠입하는 놀이를 즐기는 듯하다. 실내는 다소 고풍스런 가구를 제외하면 여느 가정집과 많이 다르지 않다.


짧은 복도를 지나면 넓은 거실이 나온다. 거실에서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고풍스런 은빛 장식물이 가로막고 있다. 식탁 옆 선반에는 은빛 촛대가 2개 있는데 근엄하게 멜라니의 잠입을 반기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각 촛대는 세 갈래도 나뉘어져 있다. 그러고 보니 고대 그리스 신 포세이돈의 삼지창이 떠오른다. 왜 그런지는 멜라니도 설명할 수도 없고 지금은 바쁘다.


새장을 벽난로 앞 소파에 내려놓는다. 애초에 샌프란시스코의 브레너 집에 놓으려했던 카드는 찢어버리고 새로 쓴 캐시에게 보내는 카드를 새장 위에 올려놓는다. 창문으로 가서 커튼을 살짝 열어본다. 문이 열린 붉은 외벽의 헛간이 보인다. 아직 그 안에 미치가 있을 것이다.


멜라니는 브레너 주택을 나온다. 선착장으로 가서 타고 온 보트에 승선한다. 카누 노로 방향을 돌려서 마을의 선착장으로 귀환할 준비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푹 숙이고 브레너 주택 주변의 동태를 살핀다.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 아주 흥미롭고 재밌어 죽겠다.


미치가 헛간을 나와 주택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온다. 멜라니가 소파에 놓은 잉꼬를 발견한 것이다. 미치가 허겁지겁 주변을 돌아보니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다. 바다 쪽을 쓱 훑어보더니 멜라니가 탄 보트를 발견한다. 주택으로 달려 들어간다. 멜라니는 모터에 시동을 건다. 잘 걸리지 않는다. 다시 밖으로 나온 미치의 손에는 쌍안경이 들려있다. 쌍안경으로 보트를 살펴보니, 밍크코트를 입은 웬 여인이 허둥대며 시동을 걸고 있다. 그녀가 누군지 기억이 나자 활짝 미소를 짓는다.


멜라니의 보트 주변에는 갈매기 몇 마리가 지저귀며 날아다닌다. 대여섯 번 시도된 후에 마침내 멜라니의 보트는 시동이 걸린다. 보데가 베이 선착장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중대한 미션을 완수한 장수처럼 위풍당당하게 보트에 앉아 있다. 보트의 속도는 그녀의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비하면 토끼와 거북이의 수준차이지만 엔진소리 만큼은 위풍당당하게 살아있어 그녀의 체면을 살려준다.


미치는 자신의 차에 올라타더니 저택을 나와 도로를 달린다. 보데가 베이 선착장으로 최대한 속도를 높인다. 미치와 멜라니가 경주에 돌입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먼저 도착할 것인가? 응원하는 관객은 오로지 갈매기떼 뿐이다. 승자에게는 승리의 월계관이 수여될까? 사랑의 지배권은 부상으로 첨부된다.



보데가 베이 도시가 그리 크지 않고 고전영화 벤허의 전차경주처럼 여러 바퀴를 도는 것도 아니어서 경주는 금방 종료된다. 특별히 교통이 막힐 일이 없는 도로를 과속으로 질주한 미치가 보데가 베이 선착장에 먼저 도착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치의 표정과 행동은 영락없이 먼 옛날 험난한 길을 생고생하며 찾아온 신부를 온몸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신랑의 들뜬 모습과 다르지 않다.


멜라니의 보트도 선착장에 정박하려고 유유히 서행한다. 선착장 위에서 미치가 기다리는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흡족케 한다. 예상했던 대로 잘 됐다고 만족하는 표정을 머금은 그녀는 의젓하게 내려서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이 어촌을 떠날 것이다.


그 순간이다. 난데없이 날카로운 송곳 같은 것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한다. 선착장 주변을 맴돌던 갈매기 한 마리가 딱딱한 부리로 그녀의 머리를 쫀 것이다. 그녀의 반듯한 금발머리도 흐트러지고 만다. 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검지로 만져본다. 애완동물상점에 있던 싸구려 연필을 귓바퀴에 꽂은 쪽의 반대편이다. 그 연필의 주술적인 힘이 갈매기를 미치게 해서 그녀를 공격하게 했을까? 그러고 보니 그 연필도 갈매기 부리와 같이 노란색이었다. 이런!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이런 곳에서 피를 흘리다니. 그것도 얼굴에. 그것도 생전 처음 겪는 갈매기의 공격으로 인하여. 이런 사태가 발생할 줄은 멜라니의 입장에선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선착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미치는 너무 놀라서 좀 더 바닷물에 가까운 곳으로 뛰어내려가 대기한다. 멜라니가 탄 보드가 접근하자 익숙하게 정박시킨다. 멜라니의 손을 붙잡고 보트에서 내리는 것을 이끌어준다. “괜찮아요?” 멜라니는 애써 덤덤한 척 처신한다. “그런 거 같아요. 근데, 새가 왜 저러죠?” “저도 이런 건 처음 봐요.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 같던데요. (멜라니의 얼굴을 살펴보고) 이런! 피가 흘러요. 빨리 치료해야겠어요.” 미치는 얼굴에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멜라니를 귀부인처럼 에스코트하며 선착장을 빠져나온다. 두 사람은 공중전화박스를 지나서 타이즈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들어간다.



타이즈 식당은 보데가 베이 마을을 대표하는 식당이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광장을 내다볼 수 있는 전망도 좋은 편이다. 식사 시간만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것은 아니다. 식사 외에도 커피, 음료수, 와인, 맥주, 위스키, 담배, 다양한 메뉴를 구비하고 있어서 거의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많은 손님들이 멜라니를 쳐다본다. 외지에서 온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여자는 그곳에선 좀처럼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치는 식당 주인에게 응급치료약을 부탁해서 멜라니의 상처부위에 하얀 솜으로 과산화수소수를 발라준다. 소독하고 응급처치하는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멜라니가 몇 달 전 로마로 여행갈 때 파상풍 예방접종을 받은 적이 있다는 점이다. 당장 대도시의 큰 병원으로 달려가야 할 만큼 위급상황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와중에 식당 주인은 멜라니가 혹시 주차장이나 식당 근처에서 다친 것은 아닌지 확실히 하고자 한다. 지난번에 어떤 사람이 주차장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을 식당 주인에게 소송을 건 일이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미치는 멜라니가 보트를 타고 가다가 다쳤기 때문에 소송을 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식당 주인을 안심시키다. 식당 주인은 미치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멜라니는 두 사람의 짧은 대화를 통해 막연하게 추측했던 대로 미치의 직업이 변호사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현실적으로 실감한다. “법을 어기거나 장난치는 사람을 교도소에 보내는 일을 하는군요?”, “맞아요.” 미치는 똑바로 서서 앉아있는 멜라니를 내려다보며 이마의 상처부위를 소독한다. “여기는 웬일이에요?” “잉꼬를 봤을 텐데요.” “아하... 그걸 주려고 여기까지 와준 거군요?” “여동생이 생일이라고 했잖아요. 마침 다른 볼 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이런 한적한 어촌에 무슨 볼 일이요?”


멜라니는 순간적으로 새로운 장난이 떠오른다. 굳이 자신한테 굴욕을 준 남자가 어떻게 사는 인간인지 구경하러 왔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으리라.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순발력을 발휘하여 거짓말을 꾸며댄다. “친구를 만나러 왔어요. 애니 헤이워스라고 이곳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죠.” “애니 헤이워스. 그렇군요. 세상 참 좁네요.” 미치는 잠깐 무언가를 생각해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애니와는 어떻게 알게 된 친구죠?” “학교 동창이에요. 대학교요.” 멜라니의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좀더 파고들다가는 공작새라도 만들 기세다. 이것을 어느 정도 예감했는지 미치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의 직업으로 인한 경험상 백프로 확신은 못하지만 그녀의 말에 어딘가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다는 것은 직감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좀더 파고들어서 정확히 따질 필요성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 얼마나 머물 거죠?” “주말동안만요.” 미치는 멜라니의 상처부위에 소독을 잘 해주었다.


만약 앉아서 머리를 보여주는 멜라니가 여왕의 발현이라고 한다면 선 채로 머리를 조몰락거리는 미치의 모습은 영락없이 왕관을 씌워주는 교황의 발현이다. 사회적으로 고귀한 상류층의 멜라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미치가 그녀에 대한 지배권을 쥐고 있는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치는 멜라니를 마주보고 앉아서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던진다. “솔직히 말해볼래요. 날 만나러 왔죠?” “생사람 잡으시네.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당신을 만나러 왔다고 장담하죠?” “나에 대해 알아보는데 고생 좀 했겠는걸요?” “전혀요. 아버지 신문사에 전화 한 통화 했을 뿐이죠.” “솔직히 말해 봐요. 날 좋아하죠?” “예? 전혀. 오히려 혐오해요. 무례하고 오만하고 잘난 체 하는 남자는 딱 질색이거든요. 당신 동네 갈매기도 싫고요.” 멜라니의 표정은 홍조를 띠며 안색은 굳어진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고 중년 여성이 들어온다. 카키색 오버코트 차림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지만 얼굴의 주름살은 짙지도 많지도 않다. 그녀는 앉아있는 뒷모습만을 보고도 자신의 아들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다가온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미치의 자동차를 발견한 모양이다.


미치는 두 여인에게 서로를 소개한다. “어머니. 이쪽은 멜라니 다니엘스에요. (멜라니를 향해) 멜라니 씨. 우리 어머니에요.” 두 여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지만 거의 미치의 어머니가 먼저 탐색하는 시선으로 상대를 살펴보며 무미건조하게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는다.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가장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탐색하려는 듯이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멜라니를 살펴본다. 결코 평소의 열정적인 눈빛도 환대하는 다정한 눈빛도 아니다.


이제껏 멜라니를 당당하게 지배하는 데 몰두했던 미치는 왠지 모르게 두 여인들의 보이지 않은 팽팽한 기운에 눌려 위축되어 버린다. 그는 멜라니의 거짓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도 지배권을 활용하여 멜라니를 쉽사리 도망치지 못하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단단한 밧줄로 그녀를 포획하여 옴짝달짝 못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어머니. 멜라니 씨가 캐시에게 새를 전달해주려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왔어요. 잉꼬 한 쌍이에요. 그래서... 오늘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그는 멜라니의 의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저녁식사 약속을 잡아 버린다. 어쩌면 본의 아니게 또는 의도적으로. 그런데 멜라니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무표정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이성적으로는, 내가 왜 그랬지? 설명하지 못 한다. 비록 사소한 거짓말이 포함되긴 했지만 내심 그의 리드를 뿌리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또는, 주말에 시간을 쪼개서 몇 시간 달려와 잉꼬를 배달해주는 사서 고생을 했는데 그 정도 저녁응대쯤이야 받아들여줘도 나쁘지 않겠지, 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이리라. 어쩌면 미치가 영험한 힘을 지닌 보이지 않은 마법의 밧줄로 그녀를 꽁꽁 묶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효과일지도 모른다.


멜라니의 입장에서는 미치의 첩자 갈매기에게 왕관을 파괴당해버리고 본연의 권위가 실추되었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미치의 지배력에 의해 사로잡힌 포로가 된 셈이다. 갈매기에게 평정심을 빼앗긴 그녀의 무의식은 일단 상황을 관망하며 정상으로 복귀되기를 바라며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자신을 미치에게 의지하는 전략을 따른다.



미치 집에서 저녁 7시에 저녁 식사를 약속했으니 오늘은 부득이하게 이 마을에서 1박을 할 수밖에 없다. 멜라니는 차를 몰고 애니 집으로 향한다. 처음 방문했을 때 창문에 써 붙여진 ‘월세방 있음’ 광고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멜라니의 손에는 핸드백 외에 누런 봉지가 들려있다. 잡화점에 들러 잠옷을 구입했다. 애니 집의 현관문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초인종을 누른다. 낮과는 달리 짙은 카키색 옷을 입은 애니가 나온다. 단지 온몸에 밀착시킨 의상 때문일까? 애니의 가슴이 불룩해서 육감적인 매력이 뿜어져 나온다. 멜라니에게 같은 여자로서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고 여성적인 육체로만 따진다면 자신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단지 도외지 여자가 대도시 여자에게 느끼는 일시적이고 무분별한 열등감과는 전혀 무관하다. 애니도 얼마 전까지는 대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도시 출신 여자에 대해 막연히 동경하는 시골여자는 아니었다. 멜라니는 애써 시선을 다른 쪽으로 회피한다. 애니의 불룩한 젖무덤을 바라보지 않으며, 하룻밤만 묵어갈 수 있겠냐고 양해를 구한다.


애니는 여자의 직감으로 멜라니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음을 간파한다. 그녀가 멜라니를 특별히 문전박대할 만큼 경계할 이유도 없고 본래 성격이 매몰차거나 결벽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오래 머물지는 않고 하룻밤만이라니까 흔쾌히 멜라니를 집안으로 인도한다.

그때 어디선가 새들의 지저귐이 애니의 귓가를 진동시킨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수많은 철새 무리가 이동하는 경관이 예사롭지 않다. 이맘때에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그녀는 무심결에 내뱉는다. “언제까지 이동하려는 건지?” 멜라니는 혹시 자신에게 한 말인 줄 알고 움찔한다. 애니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철새 무리가 이동하는 게 뭔 잘못이람. 지들 본능일 뿐인데.” 애니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새들에게 지껄이는 것 같아 살짝 민망한 느낌이 든다. 새들이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겠어. 멜라니가 미치 집을 찾아와서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을 철새들이 이동하는 모습에 투영시킨 애니는 멜라니가 미치에게서 하루속히 떠나주기를 바라며 새들의 이동을 바라본다.



저녁 7시가 되자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은 미치 집의 앞마당에 적막을 깨뜨리며 정차한다. 어느 덧 보데가 만 주변 경관은 땅거미가 들어가며 어두컴컴해진다. 멜라니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메이크업을 점검하고 미치 집 현관문으로 걸어간다.


하얀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밖으로 실내등의 빛이 환하게 뿜어져 나온다. 멜라니는 초인종을 누른다. 집안에선 누구의 목소리도 인기척조차도 없다. 오히려 집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헛간 또는 양계장 쪽에서 세 사람이 걸어온다. 멜라니는 그들이 알아볼 수 있게 조금 걸어 나가서 인사를 건넨다. 세 사람 중에 어린 아이가 멜라니를 발견하고 폴짝폴짝 뛰어온다. 미치의 여동생 캐시이다. 활기차게 멜라니를 반겨준다. 미치는 활짝 웃으며 손을 높이 들어 반가움을 표현한다.


반면,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는 무표정하고 건조하고 냉정하게 멜라니를 맞이한다. 어머니의 굳은 표정을 자칫 멜라니가 오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미치는 멜라니의 안색을 살핀다. “양계장의 닭들이 모이를 전혀 먹지 않아서 살펴보고 오는 길입니다.” 비록 리디아에게 미치는 다 큰 아들이라지만, 어떤 여자를 만나는지 조목조목 관심을 두고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리디아의 예민해진 촉각을 헤아리면서 미치는 멜라니가 불편한 심기를 느끼지 않도록 평소보다 친근감 있고 다정하게 대화를 이끌어간다.


모두 미치의 주택 실내로 들어온다. 이미 그곳은 멜라니에게 완전히 낯설지는 않다. 몇 시간 전에 잉꼬를 몰래 가져다 놓을 때 넌지시나마 둘러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찬찬히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비록 리디아가 다정한 성격도 아니고 집안을 그렇게 매력적이거나 인상적으로 꾸민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잘 따르는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인테리어라고 멜라니는 생각한다.


미치는 멜라니의 밍크코트와 스카프를 받아주며 젠틀하고 다정하게 손님 대접을 해준다. 반면, 리디아는 다짜고짜 거실의 수화기를 들고 다급하게 다이얼을 돌린다. 닭 모이를 구입한 ‘프레드’한테 전화를 걸어 닭들이 전혀 아프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모이를 하나도 먹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프레드는 다른 사람한테도 똑같은 모이를 많이 팔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모이의 문제는 아니라고 반박한다. 다만, 다른 회사의 모이를 구입한 댄 포셋 씨의 닭들도 오후부터 모이를 안 먹는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리디아는 내일 근방에 거주하고 가깝게 지내는 이웃인 댄 포셋 씨의 집에 가서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아프지도 않은 닭들이 모이를 전혀 먹지 않는 일은 이제껏 한 번도 있었던 일이 아니라 매우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평일 동안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미치가 농부로 살아가고 있는 리디아의 마음을 속 깊게 헤아리지는 못할 것이다. 미치는 닭들이 하루 이틀 그러다 정상으로 되돌아가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멜라니가 초대된 미치 가족의 저녁식사는 오붓하고 즐겁고 행복했다.


저녁 식사 후, 멜라니는 부드럽게 피아노를 연주한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이란 곡이다. 그녀가 이런 고상한 음악을 전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우아하게 치장할 유용한 음악이라는 것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피아노 건반에서 흘러나온 조용하고 감미로운 선율은 멜라니의 담배 연기를 타고 집안 곳곳으로 흩어진다. 연기처럼 그녀의 실체는 이 집안에 스며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아노가 놓인 벽에는 마치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의 분위기를 닯은 미치의 아버지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 집안을 항상 지켜보면서 동고동락 하고 있다는 눈빛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멜라니가 몰래 들어와 잉꼬를 놓고 갔을 때 미치의 아버지는 일거수일투족 지켜봤을 것이다. 멜라니는 미치의 아버지 면전에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피아노 선율에 담아서 연주한다. 미치의 아버지는 멜라니를 며느리로서 흡족해한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띠며 내려다보고 있다.


캐시는 피아노 옆에 서서 멜라니의 말벗이 되어준다. 미치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는 일에 관하여 거침없이 풀어낸다. 미치가 변호하고 있는 피의자 신분의 어떤 남편이 아내의 머리에 총으로 여섯 발이나 쫘서 죽였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아내가 남편이 야구경기를 보고 있던 텔레비전 채널을 바꿨기 때문이었다는 반인륜적인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듯이 들려준다. 멜라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캐시의 이야기에 반응해준다. 캐시는 멜라니를 마음에 들어 한다. 아름답고 이지적이고 도시적인 외모. 자신에게 살갑고 다정하게 대화해준다. 그래서 캐시는 내일 친구의 서프라이즈 파티를 하는데 멜라니에게 참석해달라고 영특하게 애원한다. 멜라니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야 한다며 미안하다고 대답한다.


멜라니의 피아노 연주와 캐시의 법률 사건 이야기가 뒤섞여 흐르는 동안 리디아와 미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멜라니를 알게 된 경위를 묻는다. 아들은 애완동물가게의 에피소드를 간단히 말해준다. 어머니는 좀더 캐내려 노력하지만 아들은 어머니가 기분 상하지 않게 만류한다. 어머니는 신문지상을 통해 멜라니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풀어놓는다. 아들은 멜라니가 유력한 샌프란시스코 신문사의 공동대표의 딸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멜라니가 지난여름 로마에 여행 갔을 때 알몸으로 분수에 뛰어든 가십기사를 얘기하며 내심 아들이 멜라니에게 홀딱 반하지 않을까, 심사숙고해서 현명하게 판단하라고 충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아들은 어머니의 의중을 눈치 채고 있으나 자신의 여자는 자신이 잘 선택하겠다고 단언하고 어머니의 볼에 다정하게 키스를 건넨다. 어머니는 더 이상 멜라니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수많은 별들이 깊어지는 어두운 밤을 헤집고 나와 반짝일 때, 멜라니는 미치의 집을 나선다. 미치가 멜라니의 애스턴마틴까지 다정하게 배웅한다. 멜라니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고 할 때 미치가 말한다. “조먄간 다시 만나서 수영을 같이 하면 좋겠군요.”


멜라니가 미치의 뜬금없는 수영 얘기가 무슨 의미인지를 간파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애써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난여름 로마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가십기사는 사실과 많이 달라요. 저는 단지 누군가에게 떠밀려 분수대에 빠졌을 뿐이죠. 그래서 실제로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버지 신문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신문사가 알몸이었다고 거짓기사를 발표한 겁니다.”


미치는 변호사 직업에서 우러나오는 몇 마디 질문을 던지고 멜라니는 마치 거짓말을 한 사람이라도 된 듯이 궁지에 몰려버린다. 멜라니는 속이 끓어 올랐지만 끝까지 자제심을 잃지는 않는다. 반면, 미치의 감정과 표정은 별다른 변화 없이 다정하고 차분하다. “다시 또 만날 날이 기대됩니다.”


그러나 멜라니의 시선은 그를 외면하고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있고 속도가 붙어있다. “글쎄요. 그날이 올 거라 단정 짓지는 말아요.” 멜라니는 힘차게 운전대를 돌려 미치의 집을 떠난다.


멀리 사라지는 멜라니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던 미치는 대뜸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길게 늘어선 전봇대의 전선 위에 수많은 까마귀들이 촘촘히 줄을 지어 앉아있는 것이다. 이런 기괴한 광경은 처음 본다. 불과 한두 시간 전에 양계장에 들렀다 나올 때만 해도 전혀 이렇지 않았었기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멜라니는 애니의 집에 도착한다. 애니는 쇼파에 편하게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다. 애니의 거실 겸 서재는 혼자 사는 여자답게 소박하고 아담하면서 곳곳에 세련미가 돋보인다. 눈에 띄는 점은 유명한 현대 화가들의 복사본 그림들이 심심찮게 걸려 있다는 점이다. 모딜리아니의 창백하고 일그러진 인물화는 애니의 삶이 평탄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해준다.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의 갓등과 서재의 고급스런 표지의 책들은 그녀가 원래 이 시골마을의 토박이가 아니라 대도시에서 이주했음을 말해준다. 멜라니의 기분은 다소 가라앉아 있다. 오늘 하루 내내 많은 일들을 겪었기에 온몸이 피곤한 것도 있지만 조금 전에 미치와 말다툼을 하며 헤어진 것이 후회스러웠기 때문이다. 좀더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을 텐데. 멜라니는 기진맥진해 있다.


애니는 브랜디를 가져와 멜라니에게 따라주고 자신의 잔에도 리필한다. 애니가 리디아에 관해서 얘기를 꺼내려 하자 멜라니는 다른 얘기를 했으면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애니는 자신에 관한 소사를 솔직하게 들려준다. 그중 멜라니에게 중요하게 인지된 내용은, 애니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 보데가 베이 마을까지 굳이 이사 와서 살고 있는 이유는 예전 남자친구였던 미치의 곁에 살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4년 전, 애니와 미치가 헤어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미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심적으로 외적으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어머니는 이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나 다름없는 아들 미치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애니와 미치가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일이 아무래도 순탄하게 진행될 리가 없었다. 현재는 연인관계가 끝난 사이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관계로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애니는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미치와 다시 연인사이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완성되지 못한 애니의 러브스토리를 들은 멜라니는 같은 여자로서 그녀의 선택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존중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라면 결코 애니처럼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애니의 서재에 있는 전화벨이 두 여인들의 대화를 가로막으며 울려 퍼진다. 미치한테서 온 전화이다. 애니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멜라니와 통화하고 싶어서였다. 애니는 같은 지역주민이며 캐시의 담임선생 입장에서 공적인 톤으로 미치와 짧게 통화하고 멜라니를 바꿔준다.


미치는 멜라니에게 좀 전의 무례함을 사과한다. 그리고 내일 캐시의 서프라이즈 파티에 꼭 참석해달라고 초대한다. 멜라니는 내일 아침 곧장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애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알게 모르게 애니와 경쟁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냥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면 미치와의 어색한 관계가 풀어지지 못해서 다시 만나기 껄끄러워질 것이 염려되기도 했고 진득하게 미치의 사랑이 복귀되기를 바라는 애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하루 정도 더 머물면서 미치와 좀더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내일 캐시의 서프라이즈 파티 초대를 수락한다. 멜라니는 캐시의 서프라이즈 파티에 참석하는 것과 관련하여 리디아의 허락을 받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애니의 의견을 물어본다. 애니는 리디아는 상관하지 말고 미치를 만나라고 같은 여자입장에서 솔직히 조언해준다.


멜라니는 잡화점에서 구입한 잠옷을 애니에게 보여주고 서로 품평을 나눈다. 이 순간 두 여자가 좀더 친근해지는 분위기로 바뀐 것은 미치와의 통화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현관문을 강하게 때리는 파열음이 들린다. 누가 늦은 밤에 문을 두드리는 걸까?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애니는 현관문을 열어본다. 아무도 없다. 그런데 바닥에 한 마리의 새가 쓰러져 죽어 있다. 어두운 밤이지만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어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왜 새가 방향을 잃고 현관문에 부딪쳐 죽었을까? 미치의 양계장의 닭들이 모이를 먹지 않는 것도 그렇고 새들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애니와 멜라니는 죽은 새 앞에서 물끄러미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잊는다.



다음날, 캐시의 서프라이즈 파티가 미치의 집 뒷마당에서 성황리에 진행된다. 파티장 주변에는 언뜻 보면 남자의 성기가 연상되는 길쭉하고 둥글둥글한 풍선이 알록달록하게 매달려 있다. 파티장에는 여러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참석해서 화기애애하게 즐기고 있다. 애니는 학생들을 이끌고 재밌는 게임을 진행한다. 리디아는 케이크와 다과를 날라주며 바쁘게 오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애니와 리디아는 흘끔흘끔 미치와 멜라니의 동태를 살펴본다.


아이들의 생기발랄하고 활동적인 웃음으로 가득한 파티장을 뒤로 한 채 미치는 마티니 한 병과 유리잔을 두 개 들고 멜라니를 동행하여 언덕 위로 올라간다. 그곳은 보데가 만을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명당이다. 미치는 멜라니에게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파티가 한창 무르익은 무렵, 뒷마당의 리디아와 애니는 언덕 위에서 다정하게 마주보며 대화하고 있는 미치와 멜라니를 각자 자신만의 사념이 개입된 시선으로 바라보곤 한다.


미치는 멜라니에게 마티니를 따라준다. 두 사람은 건배하고 홀짝이며 입술을 적신다. 마티니가 촉촉하게 녹아든 두 사람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대화를 풀어낸다. 미치는 금수저인 멜라니의 일상이란 마냥 한가롭게 유흥이나 즐기며 무료한 나날을 덜 지루하게 보내는 것쯤으로 예상했었다. 그런 미치의 추측과 달리 멜라니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나름 의미와 목표가 있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여행자를 돕는 일을 하고, 대학교에서 언어론 관련 수업도 듣고, 한국인 학생의 장학금 마련도 돕는다.


한편, 그녀가 엊그제 애완동물센터에서 구관조를 구입한 것은 고지식하고 엄격한 고모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였다. 구관조에게 모욕적인 말이나 쌍욕을 가르쳐서 고모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당혹스러워하는 고모의 얼굴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짜릿한 기분이 든다. 멜라니가 11살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한 맺힌 불만을 고모에게 화풀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준다고 해서 멜라니가 쉽게 고모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대할지는 확실치 않다. 멜라니는 돌연히, 어머니가 기억됨으로 해서 감성적으로 우울해지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상황을 모면하려고 언덕을 내려와 파티장으로 향한다. 미치는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뒤따라 언덕을 내려간다. 나란히 내려오는 두 사람의 표정을 애니와 리디아가 흘끔 살펴본다.



애니의 참여 하에 캐시와 아이들은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 수건으로 두 눈을 가린 캐시는 두 팔을 휘저으며 엉금엉금 걷고 있고 아이들은 깔깔대며 주변을 맴돌면서 회피한다. 바로 그 순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갈매기 한 마리가 쏜살같이 곤두박질쳐서 캐시의 머리를 때리고 하늘로 치솟는다. 캐시는 눈을 가렸기 때문에 아이들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미소 지으며 계속 양팔을 사방으로 휘저으며 엉거주춤 걷는다. 좀 전의 그 새가 다시 활강해서 다른 남자 아이를 공격한다. 다행히 남자 아이는 본능적으로 민첩하게 고개를 푹 숙여서 다치지는 않는다.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마리의 갈매기들이 일제히 아이들에게 달려들어 공격한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애니는 가장 먼저 캐시의 허리를 끌어안고 넘어뜨려서 새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 순식간에 파티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집안으로 대피시킨다. 애니와 리디아도 공격하는 새를 피하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을 집안으로 피신시킨다. 미치와 멜라니도 공격하는 새들로부터 아이들을 구조해서 집안으로 데려간다.

다행히 전원 무사하다. 찰과상 정도로 다친 아이는 있지만 심하게 다친 아이는 없다.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의 새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한 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미치는 잠시 후 떠날 예정이었던 멜라니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출발하라고 위로해준다.


어른들은 아이를 데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미치 가족도 멜라니와 동행하여 집안으로 들어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간단히 저녁을 차려먹는다. 캐시는 잉꼬가 유난히 우렁차게 울어대는 것을 걱정한다. 그러나 미치와 리디아와 멜라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대화를 자제하고 음식에 정신을 빼앗긴 듯이 형식적인 저녁을 먹는다.


식욕과 맛을 망각한 듯이 음식을 씹던 멜라니는 문뜩 벽난로에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한다. 아직 불이 지펴지지 않은 장작더미 앞에 새 한 마리가 두리번거리며 서성이고 있다. 멜라니가 미치에게 알려주려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진다.


굴뚝으로 수많은 새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침입해 들어온다. 이번에는 몇 시간 전에 아이들을 공격했던 갈매기들이 아니다. 참새나 메추리인 것 같고 다른 새들도 섞여있다. 수많은 새떼가 굴뚝을 통해서 미치 집안으로 들어와 미치 가족과 멜라니를 공격한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저녁을 먹고 쉬려고 했건만 난데없이 침입한 새들에게 저녁 식사 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인다.


멜라니는 소파에서 캐시를 꼭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공포에 질린 리디아는 구석진 곳에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머리 위를 휘젓는다. 미치는 작은 테이블을 끌어서 벽난로를 막아놓는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서 새들을 밖으로 쫓아낸다. 멜라니는 리디아와 캐시를 이끌고 옆방으로 들어가 새떼들의 공격을 피한다. 오래지 않아 새들은 모두 집밖으로 달아나고 사태는 진정된다. 여기저기 집기류가 부서져서 널부러져 있다. 집안은 쑥대밭이 따로 없다.


미치는 밤이 깊었지만 보안관을 불러서 직접 집안을 살펴보게 한다. 그러나 보안관은 새떼들이 공격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의 오랜 경력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사건을 신고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뭔가 밝혀지지 않은 다른 뭔가가 있는데 그게 과연 뭘까 다양하게 추리해볼 뿐이다. 미치는 고사하고 멜라니, 리디아, 캐시가 아무리 사실대로 증언해도 보안관은 자신이 직접 보지 못 했기 때문인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리디아는 바닥에 떨어져 깨진 찻잔을 수거하며 안타까운 감정을 추스른다. 비뚤어진 남편 초상화를 똑바로 정돈하는데 죽은 새가 떨어져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멜라니는 캐시를 재워주겠다며 자리를 일어선다. 그리고 밤이 늦었으니 내일 떠나겠다고 한다.



멜라니는 이층 방에서 잠을 청한다. 난생 처음 겪은 공포의 여운 때문인지 타인의 집에서 첫 취침이라서인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에야 겨우 눈을 붙였고 점심에 가까운 아침에 깨어난다.

둥근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고 있을 때 창밖에서 리디아가 미치에게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캐시를 등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닭이 모이를 먹지 않는다고 했던 댄 포셋 집에 들렀다 올 거라고. 멜라니가 창문을 열어보니 리디아가 캐시를 트럭에 태우고 마을 방면으로 향한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공터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곳에서 미치가 무언가를 불태우고 있다. 어제 죽는 새들의 시체와 파손되 집기류 그리고 생활 쓰레기이다.



캐시를 학교에 등교시켜준 리디아는 곧바로 댄 포셋 농가로 향한다. 리디아의 트럭은 한가로운 전원풍경을 가로지른 지평선을 따라 달린다. 비포장 도로라 심하게 덜컹거리고 먼지가 많이 날린다. 리디아는 댄 포셋 집의 널널한 앞마당에 대충 정차한다. 마침 인부가 농기계를 수리하고 있길래 댄 포셋씨가 집에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오늘 아침에는 아직 못 봤지만 아마도 집안에 있지 않겠냐고 대답한다.


리디아는 댄 포셋 주택으로 걸어간다. 현관문을 노크해보지만 응답하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리디아는 그냥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집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댄, 집에 있어요?” 아무런 대답도 없다. 리디아는 거실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서 발걸음을 멈춘다. 거실의 선반에 걸려 있는 커피잔 여러 개가 모두 깨져서 흩어져 있는 것이다. 혹시 새들이... 리디아는 나쁜 생각을 떨쳐내려 애쓴다. 그렇다고 댄 포셋씨가 지금까지 늦잠을 자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게으르거나 나태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가까운 이웃인 리디아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리디아는 거실을 지나서 방들이 있는 복도를 걷는다. 어느 방이 댄 포셋의 방일까? 마침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방이 있어서 리디아는 들어가 본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아담한 침실이다. 실내는 온갖 집기들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다. 창문이 깨지고 갈라져있는데 갈매기가 들어오려고 하다가 유리에 낀 채로 죽었다. 벽에는 파손된 그림들이 비뚤비뚤 걸려 있다. 책들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여기 저기 새들의 시체와 깃털들이 흩어져 있다. 침대 위는 헝클어져 있고 사람은 없다.


리디아는 사방으로 둘러보다가 침대 옆으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잠옷 차림인데 여기 저기 찢겨지고 할퀸 자국이 있고 그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리디아가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살펴봤더니 댄 포셋이다. 얼굴은 할퀸 자국으로 흉측한 몰골이 되었다. 게다가 그의 두 눈은 검붉고 가운데는 시커멓다. 새들이 두 눈동자를 파먹은 것이다.


리디아는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 한다. 숨을 헐떡이며 비틀비틀 참혹한 현장을 빠져나온다. 복도를 지날 때 핸드백을 떨어뜨린 것도 인지하고 못 할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다. 집밖에서 일하고 있던 인부에게도 아무런 말을 못 한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있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댄 포셋 농가의 한가로운 전원풍경을 깨부수는 우레와 같은 기계음이 울려 퍼진다. 리디아가 운전하는 트럭의 엔진 굉음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비포장도로의 먼지 구름 속에 천둥처럼 메아리친다.


리디아의 트럭이 집에 도착할 쯤 미치와 멜라니는 앞마당에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리디아는 트럭을 급박하게 정차하고 차문을 열고 휘청거리며 내린다. 미치와 멜라니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을 직감하고 굳은 표정이 되어 리디아에게 달려간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리디아는 여전히 일시적인 실어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한다. 호기심과 걱정으로 가득 찬 미치와 멜라니를 뿌리치고 흐느껴 울며 허겁지겁 집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침대에 눕는다. 미치와 멜라니는 리디아를 뒤따라간다.



멜라니는 몸져누운 리디아를 위로하기 위해 따뜻한 홍차를 준비하며 부엌을 서성인다. 미치가 다가와 보안관이 댄 포셋 집으로 와달라고 해서 가봐야겠다고 한다. 멜라니는 다정한 시선으로 미치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자신이 잘 보살피고 있겠다고 안심시킨다. 어느덧 미치와 멜라니 사이에 고난과 역경을 함께 극복한 전우애가 흐르는 듯하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이로 발전하려는 기미가 엿보인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솔직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몸짓으로 서로에게 안부의 키스를 주고받는다. 이제까지 두 사람 사이에 처음 생긴 일이다. 짧은 어색함을 활기찬 동작으로 떨쳐내며 미치는 밖으로 나간다. 멜라니는 따뜻한 홍차를 조심스럽게 티트레이에 옮겨놓으며 그녀 측에서 생성된 작은 어색함을 떨쳐낸다. 티트레이를 들고 리디아의 방으로 향한다.

리디아는 자신의 침대에 기대고 앉아 멜라니가 마련해 준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는다. 이제 멜라니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인다. 언론에 보도된 로마의 관광지역 어떤 분수대에서 무분별하게 행동했던 부유층 2세라는 선입견이 기억의 안개 속 저편으로 많이 사라진 셈이다. 과거에 어쨌거나 지금은 아들과 교제를 진행하고 있으니 색안경을 쓰고 미리 판단할 것이 아니라 좀더 여러 가지를 지켜보자고 생각하며 식어가는 홍차를 달콤하게 홀짝인다.


그러자 문뜩 4년 전에 사별한 남편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사사껀껀 의지되었던 그이가 죽고 나 혼자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가끔씩 편하게 쉴 수 있는 여유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만 한답니다.” 리디아는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다가 다시 활짝 뜬다. “캐시! 캐시가 괜찮을까요?” 멜라니는 침착하게 대답한다. “애니가 있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괜찮을 거예요.” 리디아의 표정은 온화해진다.


멜라니는 벽쪽에 있는 작은 아기의 사진들을 둘러본다. 그 모습을 본 리디아는 또 다른 회상에 잠긴다. “아직 아기였던 프랭크가 죽었을 때, 그이는 남아있는 애들 맘을 잘 이해했어요. 애들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재능이 그때부터 생겼거든요. 그건 아주 특별한 재능이에요. 나도 그이처럼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따라 그이가 그립네요.” 리디아는 홍차를 마시며 먼 곳에 시선의 초점을 맞춘다. 

“요즘도 가끔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프랭크가 먹을 아침을 만들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다가 현실을 깨달아요... 그이랑 대화하던 순간들이 아련하게 생각나는군요. 지금은 캐시는 아직 애이고 미치는 다 커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바쁘죠. 그래도 오늘 미치가 집에 같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오.”


멜라니는 리디아의 담요를 고르게 만져준다. “이제 좀 푹 쉬세요.” 리디아는 멜라니의 시선을 붙잡는다. “아니. 아직이요. 아가씨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요.” 멜라니가 왜 그런지 묻자 리디아는 침착하게 대답한다. “아들이 아가씨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아직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아가씨가 좋은지 싫은지조차 잘 모르겠어요.” 멜라니는 침대에서 창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제가 좋은지 싫은지가 중요한가보죠?” 리디아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물론이죠. 미치는 내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니까요. 미치가 선택한 여자가 내 맘에도 들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멜라니는 리디아의 침대로 다가간다. “만약 맘에 안 드시는 아가씨라면요?” 리디아는 시선을 떨구며 한숨을 내쉰다. “어차피 아들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요, 뭘.” 멜라니는 미치도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고 말한다. 리디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미치는 늘 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리디아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가 촉촉해진다. “혼자 남겨지는 건 싫어요. 너무 비참하고 참담한 심정이라 상상조차 하기 싫어요.” 리디아는 울상이 된 얼굴을 양손에 파묻는다. “미안해요...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미친 새들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오늘 미치가 없었다면 나 혼자 얼마나 망막했을지.”


멜라니는 침대 위의 티트레이를 치워주고 리디아를 편안하게 눕혀준다. 머리를 베개에 아늑하게 기댄 리디아는 멜라니를 바라본다. “캐시가 정말 학교에서 괜찮을까요?” 멜라니는 잠깐 생각하고 대답한다. “제가 가서 데려오면 어떨까요?”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전 정말 괜찮아요.” “그럼... 그래줄 수 있겠어요? 그래준다면야 한결 마음이 놓일 거예요.” 리디아의 표정은 밝아지고 멜라니는 믿음직스럽게 미소 짓는다. “지금 다녀올게요.” 멜라니가 티트레이를 들고 방을 나서는데 그녀의 등 뒤로 리디아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멜라니!” 멜라니는 뒤돌아서고 리디아가 지긋이 미소 짓는다. “따뜻한 홍차 정말 고마웠어요.” 멜라니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려서 응답하고, 리디아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한다.  



멜라니는 애스턴마틴을 몰고 캐시가 등교한 보데가 베이 학교로 향한다. 학교 앞에 도착해서 차를 세운다. 아이들의 합창곡이 학교 밖으로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다.


멜라니는 학교로 들어가서 교실 뒷문을 열어본다. 교단 한가운데 위엄 있게 서 있는 애니가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은 애니의 지휘에 따라 햇병아리처럼 쾌활하게 합창을 한다. 노래의 가사는 어떤 순박한 시골 여인의 결혼생활을 다룬 내용인 듯하다. 멜로디는 아이들이 합창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매우 동요스럽고 유쾌하다. 자신을 알아보고 시선을 마주친 애니에게 멜라니는 뭐라고 묻는다.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합창곡 때문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애니는 십중팔구 감을 잡는다. ‘아직 멀었나요?’ 라고 물었을 거라고 짐작한 애니는 목에 걸고 있던 시계를 흘끔 쳐다보고 멜라니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세워서 보여준다. 또한 멜라니도 대충 감을 잡는다. ‘20분 정도 남았어요.’ 라고 대답한 것이다. 멜라니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학교를 나온다.


정문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편안히 잠시 기다릴만한 적당한 장소는 보이지 않는다. 학교 바로 옆에 놀이터가 보여서 그곳으로 향한다. 놀이터를 둘러싼 나무 울타리 앞에 떡갈나무로 만든 벤치가 있다. 멜라니는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무 울타리에 등을 기대자 한결 온몸이 편해진다. 멜라니는 담배연기를 날리며 눈동자의 긴장을 풀어준다. 담배 연기 사이로 아이들이 열창하는 합창곡의 가사가 그려지는 듯하다.



리슬티 로슬티 헤이 도니도슬티
니키티 내키티 러스티컬 퀄러티
윌로우티 왈로우티 나우 나우 나우

난 아내와 6월에 결혼했어요
달빛을 받으며 아내를 집으로 데려왔지요

아내는 머리를 빗었죠, 1년에 한 번만
그 빗질 한 번에 눈물을 왈칵 쏟았어요

아내는 마루를 손으로 훔쳤죠, 1년에 한 번만
빗자루는 소중해서 쓸 수 없었대요

아내는 버터를 만들었죠. 아버지의 낡은 부츠에
급할 때는 발로 밟았어요
버터는 완성되었어요. 거무칙칙한 회색으로

치즈로 말할 것 같으면, 발이 생겨서 달아났어요
아내는 달아나는 치즈를 그냥 내버려뒀어요

내가 아내에게 마루 좀 닦아달라고 했더니
아내는 내게 모자를 주며 현관문으로 나가라 했어요

아내와 결혼한 날은 6월이었어요.
달빛을 받으며 아내를 집으로 데려왔지요

리슬티 로슬티 헤이 도니도슬티
니키티 내키티 러스티컬 퀄러티
윌로우티 왈로우티 나우 나우 나우



멜라니의 뒤쪽에 있는 놀이터의 중앙에는 정글짐이 있다. 마치 그녀를 의식하고 그러는 듯이 새까만 새 한 마리가 조용히 날아와 정글짐에 내려앉는다. 곧바로 다른 한 마리가 뒤쫓아 정글짐의 어디에 자리를 잡는다. 차근차근 느릿느릿, 어느 덧 정글짐은 날아온 새까만 새들로 인하여 검정 색상의 애드벌룬처럼 몸집이 커져간다.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멜라니는 푸석한 담배연기를 연거푸 내뿜으며 빨리 수업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합창곡은 생동감을 잃을 줄 모른다. 어느덧 정글짐에는 새까만 새들로 빼곡히 북새통을 이룬다. 더 이상 비집고 들어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맹수가 남기고 간 앙상한 코끼리 골격의 살점을 뜯어 먹으려고 날아든 시체청소부 대머리 독수리 떼가 따로 없다. 니코틴의 체내 흡수로 멜라니의 감각이 예민해졌기 때문일까? 왠지 뒤통수가 캥기고 꾸르륵꾸르륵 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서 날아오는 새까만 새 한 마리의 궤적을 따라 멜라니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칠흑 같은 암흑의 거대한 물체가 짙은 먹구름처럼 꿈틀거린다. 멜라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굳어버린다. 정글짐을 빈틈없이 메운 수많은 새까만 새들이 그녀를 지켜보며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뱉고 있다. 소름 돋고 징그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이 그녀의 온몸에 닭살을 퍼트리고, 그녀는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본 죄인처럼 소금기둥이 된다. 새떼로부터 백병전을 앞둔 전사들의 전운조차 느껴진다. 멜라니는 가위 눌린 듯이 굳어버린 몸뚱이를 가까스로 움직인다. 그녀의 동작은 평소와 달리 무의식의 영향으로 매우 부자연스럽다. 내지를 수 없는 비명을 입술만 뻐끔거리는 시늉으로 뱉어내며 천천히 그러나 허겁지겁 학교로 피신한다.



어느덧 수업시간이 끝나고 애니는 아이들에게 정리하고 나가서 놀아도 괜찮다며 밖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막 교실 뒷문으로 들어온 멜라니는 그런 애니를 보자 황급히 달려간다. “빨리 문 닫아요! 어서요!” 애니는 멜라니의 당혹해하는 표정을 보고 얼떨결에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다. 멜라니는 애니를 창가로 데려가 놀이터를 가리킨다. 여러 마리의 새들은 놀이터의 정글짐뿐만 아니라 주택의 지붕과 가로수와 전신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많은 새들이 몰려든 걸까? 혹시 아이들이 나오기를 미리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새들이 학교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애니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애들을 무사히 귀가시키는 일이라는 생각한다. 교단에 올라가 그저 흥겹게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모두 조용! 이제부터 소방훈련을 할 거야. 잘 듣고 따라야 돼. 모두 학교를 나서자마자 아주 조용히 이동하는 거야. 집이 근처인 학생은 곧장 집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언덕을 내려가서 호텔까지 이동한다. 잘 알겠지?” 아이들은 일제히 합창한다. “네, 선생님!” “다시 말하지만, 내가 달리라고 하기 전까진 절대로 소리 내면 안 돼. 달리라고 하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거야. 잘 알겠지?” “네. 선생님!”


애니는 멜라니를 아이들의 선두에서 이끌도록 한다. 애니는 혹시라도 뒤처지는 아이들이 있을까 후방을 맡는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될 것이다. 애니는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조용히 이동시킨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었다. 설령,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수많은 새떼들이 비상식적으로 여기저기 모여 있는 기괴한 장면과 맞닥뜨리게 되면 극소수의 특별히 담력이 크거나 아애 무신경한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비이성적인 충동이 솟구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대부분은 어른들이라 사태를 직시하고 인내력을 발휘하여 질서 있게 단체행동을 할 테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꼭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 즉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 아비규환으로 치달을 터인데, 얘네들은 초등학생들이라 애초에 침착한 질서정연함을 기대하지 말고 학교 건물 내에 대기하고 있다가 부모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앗을 것이다. 애니는 후회가 막심했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딱히 어느 아이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이들은 학교를 나오자마자 조용히 이동하라는 애니의 주의사항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는데 수많은 아이들의 뛰는 발자국의 합창이 가만히 앉아있던 새까만 새들의 전의를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새까만 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하늘로 치솟는다. 아직 환한 대낮인데 예고 없이 들이닥친 일식처럼 쾌청한 하늘에 검은 커튼이 드리워진다. 새까만 새떼가 하늘을 뒤덮는다. 온 세상이 어둡고 캄캄해진다. 화학물질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서 거무죽죽한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먹구름으로 변한 듯하다. 그 속에서 먹물 같은 우박이 찢어지는 우레를 동반하며 쏟아져 내려오다 새로 변하는 듯하다.


새들은 내달리는 아이들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딱딱한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아이들의 머리와 목덜미와 복숭아 같은 피부의 얼굴을 가격한다. 고통스런 아이들의 날카로운 비명은 더 많은 새들을 불러 모으며 동시에 그 어떤 희열을 새들에게 모이 주듯이 뿌려주는 셈이다. 피로를 물리치며 열정적으로 즐기는 파티 참가자들처럼 새들은 지칠 줄 모르며 기세등등하게 맹렬히 아이들을 공격한다.


아이들은 애니의 지시를 따라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전력을 다해 달린다. 도로는 직선으로 길게 뻗은 내리막길이라 자연스럽게 속도를 낼 수밖에 없어서 아이들에겐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뛰는 속도가 아무리 빨라봐야 창공을 자유롭게 활강하며 달려드는 새들의 공격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아이들은 만신창이가 되거나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달려간다. 새들의 노랫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불협화음처럼 교차되며 울려 퍼진다.



멜라니는 캐시의 손을 꼭 붙잡고 뛴다. 캐시의 다른 손은 단짝친구의 손을 붙잡고 이끌고 있다. 갑자기 캐시의 친구가 넘어진다. 캐시는 새들의 공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를 도우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멜라니가 캐시를 뒤따라간다. 캐시의 친구를 일으켜 세웠는데 전력해서 달릴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근처에 누군가 주차시켜놓은 빈차 안으로 무작정 들어가 위급한 사태를 모면한다. 창문을 모두 올려서 새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한다. 새들이 사방의 차창으로 요란하게 부딪쳐대지만 깨지지는 않고 그들의 피자국만 남긴다. 멜라니와 캐시와 친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멜라니는 부득이하게 포악한 새들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차안에 머무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그녀의 예측대로 새떼는 오래지않아 뿔뿔이 흩어진다. 창공은 언제 무자비한 새들의 폭격이 있었냐고 발뺌하듯이 따사로운 햇살을 내리쬘 뿐이다.



멜라니는 캐시를 학교 옆에 있는 애니의 집에 맡겨놓는다. 캐시의 친구도 집에 데려다준다. 그리고 보데가 만의 타이즈 식당으로 향한다. 거기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자신이 겪은 일을 낫낫이 알려준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하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무려 여러 마리의 새떼들이 인간을 공격한 사건이 머나 먼 아프리카 내지 아마존 정글도 아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도시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쩌면 딸이 관심을 끌기 위해 지어낸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멜라니가 한참 상세히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인상적인 옷차림의 어떤 할머니가 식당으로 들어온다. 베레모 모자를 쓰고 젊은 복장으로 한껏 멋을 부린 번디 부인이다. 식당 주인에게 잔돈을 바꾼 번디 부인은 자판기에서 담배를 구입하더니 곧바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는다. 그 와중에 본의 아니게 멜라니가 아버지와 통화하는 내용을 엿듣지 않을 수 없었고 새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술술 풀어낸다. 번디 부인의 새에 관한 지식은 거의 백과사전에 버금간다. 그녀의 지식에 따르면 지구상의 그 어떤 새떼들도 인간을 공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어쩌다 한두 마리가 인간을 공격한 보고는 아주 드물게 있었지만 수많은 새떼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인간을 공격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만약 그랬다면 인간은 벌써 멸종되었을 거라고 설명한다.



잠시 후 미치와 경찰서장이 함께 들어온다. 둘은 댄 포셋 집에 들렀다 오는 길이다. 경찰서장은 현장을 살펴보고서도 새떼들이 공격했을 거라고 단정짓지 않는다. 누군가 댄 포셋을 살해하고 마치 새들이 공격한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새들이 인간을 공격했다는 얘기는 수십 년간 경찰직에 몸담고 산전수전 다 겪어봤지만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미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로서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식당손님 중에 선원 차림의 어떤 남자가 미치에게 다가온다. 그는 최근에 갈매기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다고 털어 놓는다. 미치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대책논의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 선원은 그다지 내켜하지 않아 보였지만 미치는 열의를 갖고 설득해본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멜라니가 언뜻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간다. 뭔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식당의 커다란 창문 밖으로는 주유소가 보인다. 동네 주민이 차를 정차하고 휘발유를 넣고 있는데 갑자기 갈매기 한 마리가 곤두박질쳐 하강하더니 그 남자의 머리를 후려치고 날아가 버린다. 그 남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이 때문에 바닥에 떨어진 호수에서 휘발유가 콸콸 뿜어져 나와 내리막길로 흘러간다. 마치 방금 전 새가 포문을 열기라도 한 듯이 다른 새들도 일제히 저공비행하여 주유소 주변의 사람들을 공격한다.


바닥의 경사를 타고 가까운 주차장으로 마치 시냇물처럼 흘러내려간 휘발유를 못 본 어떤 남자가 차에서 내리면서 담뱃불을 불이다가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화재가 발생한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다른 차들도 연쇄폭발하고 불길은 순식간에 주유소로 옮겨가더니 폭격이라도 맞은 듯이 큰 폭발음과 함께 먹물처럼 짙은 검은 연기를 뿜어낸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화재를 진압하고 다친 사람을 구해주려고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오는데... 사방에서 달려드는 새떼들의 공격이 워낙에 거세서 각자 제 몸을 피신하기에 급급할 지경이다. 그나마 남자들은 새들의 거친 공격을 뿌리치며 나아가지만 여자들은 다시 식당으로 되돌아간다.


멜라니는 휘청거리다가 식당 앞 공중전화 박스로 피신하는데 유리를 금가게 할 정도로 새들이 공격하기 때문에 다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혼비백산한 거리를 창공에서 전쟁의 신이라도 된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갈매기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수많은 새들이 의도적으로 즐기기라도 한다는 듯이 산발적으로 미친 듯이 인간들을 공격한다. 큰 화재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새들의 공격으로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허둥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보데가 만의 주요 거리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위험에 처해진 주민들을 돕던 미치가 공중 전화박스에 갇힌 멜라니를 뒤늦게 알아본다. 그는 새들의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자신의 신체에 상처를 입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중 전화박스로 내달려 그녀를 구출해서 식당으로 피신시킨다.


외부와는 전혀 딴판으로 식당 안의 공기는 매우 조용하다. 아니 섬뜩할 정도로 정숙하다. 아무도 없는 듯이 인기척도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미치와 멜라니는 한쪽 구석에 모여서 겁에 질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발견한다. 자녀를 애지중지 다루던 아줌마가 멜라니를 발견하고 원망하는 시선으로 쏘아붙인다. 새떼들이 공격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모두 멜라니의 탓으로 돌리는 듯이 쏟아낸다. 그녀가 마녀라는 것이다. 멜라니는 충동적으로 아줌마의 뺨을 후려친다. 싸늘한 정적이 사방으로 퍼진다. 모여 있던 다른 여인들은 누구 한 명 나서서 어느 쪽 편을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아줌마의 의견에 공감하고 지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기운을 알아챈 미치는 멜라니를 데리고 식당을 빠져나와 애니의 집으로 향한다. 캐시를 데리러 가기 위해서이다.


보데가 만 학교와 애니의 집으로 향하는 도로의 주변에는 수많은 새들이 휴식이라도 취하는 듯이 앉아있다. 언제 다시 날아올라 인간들을 공격할지 예측할 수 없다. 미치는 멜라니의 어깨를 감사안고 새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한 걸음으로 애니의 집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현관문 앞에 애니가 쓰러져 있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고 온몸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멜라니는 처참하게 죽은 애니를 보고 비명을 지른다.


미치가 달려가 애니를 살펴보지만 이미 죽어 있었다. 애니의 집안에서 캐시가 창문으로 내다보며 흐느껴 울고 있다. 미치가 캐시를 안고 정차해 있던 멜라니의 스포츠카에 태운다. 멜라니의 부탁으로 미치는 애니의 시신을 안고 집안에 들여놓는다. 더 이상 새들의 먹이감이 되거나 훼손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미치와 멜라니와 캐시는 수많은 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사히 애니의 집을 빠져나온다.



얼마 안 있으면 어두운 밤이 찾아온다. 이제까지 정황으로 볼 때 새떼들이 잠자코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든다. 집으로 돌아온 미치는 모든 창문을 나무판자로 막는다. 기다란 판자대기를 2층 창문에 대고 못질을 할 때는 마치 로마제정시대에 십자가형을 거행하는 것이 연상된다. 멜라니는 미치의 곁에서 그의 작업을 돕는다.


거실로 들어와서도 미치는 구석구석 꼼꼼히 점검하고 확인한다. 혹시라도 허술한 곳을 방치하면 새들이 침투할 것이다. 벽난로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전처럼 새들이 굴뚝으로 침입하지는 못할 것이다. 리디아, 캐시, 미치, 멜라니는 거실 소파에 둘러 앉아 서로를 위로해주고 있다. 리디아는 남편의 사진 아래 앉아있다. 공포에 휩싸인 지금 이 순간 수십 년 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의지하며 동거동락했던 남편이 그립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건장하고 듬직하게 자란 아들 미치가 곁에 있어서 천만다행이지만 남편만큼 의지되는 것은 아니다. 캐시는 멜라니를 잘 따른다. 그녀의 품에 안겨 두려움을 달래고 있다. 멜라니는 새떼들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과는 별개로 미치의 집에 친숙감과 익숙함이 생겨났다. 어느 정도 자신의 집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에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미치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것도 아닌데 너무 앞서가는 것은 아닐까? 현재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냉정하게 되돌아볼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본다.


미치의 가족과 멜라니는 마치 제 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 전투기의 야간 공습에 떨며 잠 못 이루던 모습처럼 밤은 깊어지지만 쉽사리 잠들지는 못한다. 그렇게 고요한 밤을 지새우던 어느 순간, 갑자기 새떼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다. 미치 집의 사방에서 집안으로 침입하려고 온갖 발버둥을 친다. 어떻게 새들이 그럴 수 있는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새들은 미치가 놓친 허술한 부분을 뚫고 집안으로 들어와 미치 가족과 멜라니를 공격한다. 리디아와 캐시와 멜라니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새들의 공격을 뿌리치며 공포에 휩싸인다. 미치는 뚫린 부분을 찾아내서 피땀을 흘리며 보수작업을 한다. 그 와중에 미치의 손은 새의 부리에 쪼여서 붉은 피가 흥건히 흘러내린다. 새들이 문짝을 쫄 때 세로 방향으로 만들어진 균열의 흔적은 마치 서부개척 시대에 인디언들이 손도끼로 찍어 놓은 자국 같다. 미치는 커다란 진열장을 이동하여 현관문 앞에 막아놓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강상태가 된다. 새들의 공격이 잠잠해진 것이다. 놈들도 쉴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오늘 밤 다시 공격해 올까? 아니면 오늘밤은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을까? 밤은 깊어지고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치의 가족들은 하나 둘 씩 눈이 감기며 잠들어 버린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육체적 본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언제 잠들었었지? 멜라니의 눈은 슬며시 떠진다. 실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세 사람도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다. 앞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리디아가 잠들어 있다. 미치는 하얀 붕대를 감은 손을 머리에 대고 잠들어 있다. 소파에 누워서 잠든 캐시에게서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멜라니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이 고요한 적막이 자신을 깨운 목적이라도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두컴컴한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걸어간다. 자신이 데려온 잉꼬 한 쌍이 인간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심히 지저귀고, 그 고음대의 노래는 부엌의 적막을 파헤치며 흩어진다.


멜라니는 부엌을 되돌아 나오다가 금속성으로 반짝이는 물체에 시선을 사로잡힌다. 이 집에 머문 지 시간이 꽤 흘렀건만, 줄곳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전기가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은빛으로 밝게 빛나는 천칭의 존재를 알아본 것이다. 천칭은 은빛 갑옷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며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로막고 있다. 찬란한 은빛의 초자연적인 유혹일까? 멜라니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몽유병 환자처럼 천칭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의 끝에는 2층 다락방이 있다. 멜라니는 다락방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바라본다. 지금 이 시간에 혼자서 열어보는 것이 잘 하는 짓일까? 현명한 판단력을 내릴 만큼 멜라니의 정신은 온전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행동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꿈속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가 내린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잡고 돌린다. 천천히 문짝을 열고 안쪽으로 밀자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고막을 할퀸다. 다락방의 천장에는 유리창이 깨져서 뚫려 있고 새들의 시체가 그 위를 뒤덮고 있다. 사방은 온통 새들 천지다. 죽어서 널브러져 있는 새들, 구석구석 앉아서 꿈틀대며 주변을 관찰하는 새들. 인간을 공격하느라 기진맥진 해진 몸을 재충전하고 있다.



멜라니는 절대로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실수를 하고 만다. 본인만의 의지는 아니었을 터이다. 그녀를 홀로 다락방으로 이끈 그 어떤 힘의 작용이었을 것이고 그 힘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나아가서 이탈리아 로마에서 휴양을 보내며 소일하고 있던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어온 그 어떤 힘의 작용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얼떨결에 소음을 발생시키고 만다. 마치 공격 명령을 알려주는 나팔 소리를 들은 고대 병정들처럼 새떼들이 일제히 깨어나 멜라니를 덮친다. 멜라니는 문밖으로 도망가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매우 급박하게 발생한 참변이라 이렇다 할 손도 못 써보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워낙에 많은 새떼들이 그녀에게 맹렬히 달려들어 부리로 그녀의 육체를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퀸다. 멜라니의 양손은 붉은 피범벅이 된다. 새떼에게 십자가 처형을 받는 것이다.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멜라니는 실신하여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진다. 뒤늦게 다락방의 참변을 알아채고 뛰어올라온 미치와 리디아는 혼신의 힘을 다해 멜라니를 구출한다.



멜라니는 거실 소파에 의지해 앉아 안정을 취하고 있다. 충격이 컸던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이다. 그녀 곁에서 미치가 응급처치를 해주고 리디아가 간호해준다. 미치는 멜라니를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미친 새들이 지배하고 있는 집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결단을 내린다. 잠시 심호흡을 들이키며 해야 할 일을 되새겨본다. 집밖은 미쳐 날뛰는 새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래도 나서야 한다고 결정한다. 미치는 여기저기 흩어져서 서성거리는 새들을 홍해 가르듯이 헤집고 조용히 헛간으로 이동한다. 멜라니의 애스턴마틴의 시동을 건다. 리디아의 트럭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새들의 공격을 피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치와 리디아는 제 정신이 아닌 멜라니의 양어깨를 부축해서 차에 태운다. 캐시는 집안에 있는 물건 중에 유일하게 잉꼬를 가져가겠다고 생떼를 쓴다. 그 한 쌍의 잉꼬는 멜라니가 캐시에게 생일선물로 준 것이다. 미치는 마지못해 허락한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멜라니는 리디아의 품에 기대어 심장의 따뜻한 박동을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유년시절 그리웠던 어머니에 대한 보상심리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미치가 운전하고 리디아와 캐시와 멜라니는 새떼들이 뒤덮고 있는 주택을 유유히 떠난다. 사방에는 서로 다른 종의 수많은 새떼들이 뒤죽박죽 서성거린다. 다음 공격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재충전을 하고 있을 터이다. 잔뜩 먹구름이 뒤덮인 어두침침한 잿빛 하늘을 화폭에 담아 세상의 종말을 부르는 어둠의 집회가 따로 없을 것이다.



미치 가족과 멜라니는 보데가 만을 떠나 안전한 지역으로 향한다. 머지않아 새떼들의 공격은 무슨 일 있었냐고 되묻기라도 하듯이 예전의 본능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화제거리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미치 가족과 멜라니도 차차 악몽에서 깨어나 안정을 되찾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제 멜라니에게 새 가족이 생긴 것일까? 11살 때 자신과 아버지를 버리고 낯선 남자와 도주해버린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라는 이중성의 앙금이 리디아를 통해서 다소나마 치유될 수 있을까? 리디아는 그럴 능력이나 의지를 발현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멜라니의 약점을 악용하여 집안의 권력을 독점하는 어두운 전래동화의 고질적인 시어머니가 될까? 미치는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이 매우 다른 멜라니를 고령임에도 아직 녹녹치 않은 어머니 리디아의 그늘 아래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일궈나갈까? 미치 가족의 새 보금자리에는 그들이 함께 겪고 극복한 고통과 번뇌의 시간이 보데가 만의 집에서 캐시가 데려온 잉꼬 두 마리가 지저귀는 노래처럼 아련하고 흐릿한 추억이 되어 맴돌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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