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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허삼관 매혈기 (소설 감상글)

by 김곧글 Kim Godgul 2011. 4. 18. 14:15
언젠가 중국어를 전공한 사람한테 '무라카미 하루키'와 닮은 스타일로 작품을 쓰는 중국 작가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그가 몇명의 작가를 나열하고나서 거두절미하고 '허삼관 매혈기'를 가장 추천한다고 말했다. 딱히 무라카미 하루키 스타일은 아니지만 매우 쉬운 문체를 쓰고 초심자가 읽기에 무난하면서 작품성과 예술성도 있다고 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구입한 지는 몇 년 됐지만, 막상 읽은 것은 최근이다. 읽어야지 하면서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책들이 내 방에 돌탑처럼 쌓여있는데, 그중 하나의 책탑은 방문이 활짝 열리지 않도록 막는 2차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는데(책들아 미안 --;) 어쩌다 책탑의 맨 아래 깔린 이 책이 부득이하게 약간의 파손을 입었다. 최근에 외부에서 틈틈이 책을 읽어볼까해서 어떤 책을 녹여줄까 고민하다가 '기왕이면 손때와 흠집이 묻어도 괜찮은 책부터 시작해볼까'라고 생각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 그렇게 '허삼관 매혈기'를 읽기 시작했다.

과거 20세기 중국의 어떤 인민 가족의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인생사다. 제목 그대로는 허삼관씨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피를 뽑은 이야기쯤 된다. 되게 칙칙하고 슬프고 신파조일 것 같지만, 억척스럽고 고단한 삶이 오히려 가볍고 유머러스하고 해학적이고 속도감 있게 표현되어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이나 주제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이고 보편적이지만 작가 특유의 간결한 표현력 때문인지 현대적인 재미가 담겨있었다. 해학적이고 간결하게 표현된 중국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쯤 되어 보인다고 말하면 다소 과장일지는 모르지만 문뜩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정도로 그리 존재감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어느 순간은 황당하고, 어느 순간은 웃음이 나오고, 어느 순간은 혀를 내두르게 하고, 어느 순간은 찡하기까지 했다. 가난한 중국 인민의 삶이지만 한국 문화와 정서와도 닮은 점이 많아 감정이입이 잘 된 것 같다. 그렇더라도 어느 부분에선 문화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일본 영화나 소설을 접할 때처럼 말이다.

특이한 점은 문체가 간결한데 단지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이 작가 특유의 무엇이 담겨있다. 소위 다른 여느 소설에서 느껴보지 못한 문체였다.
영화 시나리오적이지는 않고 어떻게 보면 픽션에서 파노라마 영상들을 문체로 풀어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키의 문체가 매우 쉬운 편에 속했던 것처럼 언젠가 중국어 전공자가 이 작품을 추천해준 것도 전혀 딴지는 아니었다. 다만, 이야기나 주제면에서 하루키적이지는 않고 보다 전통적이고 보편적이고 대중적이고 또한 문학적이기까지 했다. 쉽게 말해서 공중파 방송으로 설 또는 추석 특집 드라마로 만들면 아주 좋은 소재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중에 이 소설의 작가 '위화'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생각이다. 간결하고 다이나믹한 문체도 맘에 들고, 내용과 주제에서 완전히 내 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를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주제를 맛깔나게 표현한 이런 소설이 괜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2011년 4월 18일 김곧글


ps: 5월은 바다보다 더 깊고 하늘보다 더 푸르고 태양보다 더 화사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단지 완전한 봄이 왔기때문만도, 빨간날이 많기 때문만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