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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써니(2011) - 통속적이지만 잘 만든 영화

by 김곧글 Kim Godgul 2011. 10. 27. 17:41


생각해보면 현재를 기본으로 하고 80, 90년대를 교차편집하는 여고생들의 우정 드라마는 현대 한국영화에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 남학생 위주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신선한 느낌으로 볼 수 있었다.

영화 자체는 영상미도 수준이상이고 균형있게 잘 만들어졌다. 여러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현재, 과거, 판타지를 왔다갔다하는 영상서술도 매끄럽고 부담스럽지 않고 좋았다. 어떤 웃음 코드들이 나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모든 장면들이 모든 관객의 입맛에 딱 맞을 수는 없는 노릇) 초반에서 후반까지 늘어지지 않으면서 그 통속적인 현대 로맨틱 드라마의 수위를 잘 유지했기 때문에 뒤끝도 깔끔하고 통일성이 있어서 좋았다.

어떤 장면에선 너무 지나치게 좋은 쪽으로만 판타지를 만든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관객들이 좋아했으니까 문제될 건 없는 것 같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뿐이고 그것을 얼마나 어떻게 즐기고 받아들이느냐는 관객의 몫일테니까.

영화 매니아가 아니라 보통 국내 관객들이 좋아할 수 있는 코드들이 적절히 잘 베어있어서 재미도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개인적으로 내 삶이 이렇게 파란만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남학생 버전으로 만들었을 경우에 그렇다는 의미)
마음 깊이 울림을 받지는 않았다(나 자신과 동떨어져 있는 느낌 때문). 나는 그저 심심하게 그 시대를 보냈던 것 같다. 어쩌면 최근 몇 년 동안의 내가 그때보다 덜 심심할지도 모른다. --;

옥에 티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흘려봐도 될 정도인 것 하나는 80년대 의상 중에 상의는 그런대로 그 시대에 맞는 것 같은데(정말 그때는 약간 큰 청자켓을 흔하게 입었던 것 같다) 하의 중에 청바지는 영화에서처럼 세련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색상 자체가 좀더 촌스러웠고 (스판도 있었지만 나팔청바지, 완전 일자, 펑퍼짐 청바지도 많았고 즉 현대처럼 맵시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러 번 세탁해서 색이 바랜 청바지를 많이 입었는데 그 바랜 색 자체도 현대와는 많이 다르게 촌스런 느낌이 많았는데 그 느낌을 살리는 의상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그 시대 인물들이 입었던 청바지가 지나치게 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그 시대에 주변 사람들한테서 이런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학생시절에 소위 진짜 생날나리로 살았던 여학생은 오히려 어중간한 애들 또는 세상 물정 모르고 공부만 하던 애들보다 나중에 시집도 잘 가고 잘 산다고, 그 이유는 그때 충분히 놀아봤기 때문에 사회에 들어가서는 더이상 노는 것들에 대한 환상같은 것이 없어서 오히려 성실하게 가정 생활 또는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어느 정도 들어맞는지는 나는 (사귀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춘화'라는 인물이 그런 류에 속하는 것 같다. 영화상에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로 표현됐다.

상대적으로 심심하게 젊은 시절을 보낸 나 같은 사람에겐 약간의 동경, 환상이 있는 것 같다. 파란만장한 것에 대한. 그래서 그런지 영화, 게임(온라인게임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고 혼자하는 게임), 소설, 만화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심심하게 자란 모든 사람이 나와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일상인 여자'에게도 동경, 환상이 있는 것 같다. 매력적으로 보이고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인 것 같이 보인다. (실제로는 그들도 화장실 가고, 코딱지 후비고, 발뒤꿈치에 굳은 살 정리하고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지만, 감성적으로는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 증상이 요즘 잘 나가는 kpop 걸그룹에 깊이 (또는 은근히) 빠져있는 삼촌부대 아저씨들의 감성 상태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화 '써니'는 보통 관객들이 부담없이 보고 즐기기에 충분히 잘 만들어졌다. 내가 마음 깊이 좋아하는 영화 분위기, 코드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적어도 국내에서는 승승장구할 것 같아 보인다. 현대 관객들을 끌어모으는 어떤 코드를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원활하게 작품에 녹여내는 실력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얘기지만 최근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를 읽고 있는데 이 소설의 배경도 1980년대인데 내 입장에서 인물들의 감성 코드에 몰입이 잘 되었다. 소위, 마음 깊이 좋아하는 소설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2011년 10월 27일 김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