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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뽕(1985) - 정치 풍자극

by 김곧글 Kim Godgul 2012. 3. 24. 00:26



이 영화를 모르는 한국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를 못 봤더라도 제목은 들어봤을 것이고 에로틱 해학 시대극이란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숨겨져 있는 정치 풍자적인 알레고리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겉은 에로틱 해학 시대극이고 속은 정치 풍자극이란 뜻이다.

솔직히, 필자는 이 영화를 최근에 봤다. 우연찮게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봤다. 그런데 에로틱하고 해학적인 영상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보여서 재밌게만 보고 지나칠 영화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것은 정치적인 알레고리이며 그 시대를 비판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원작 소설이 써진 1925년 시대, 그리고 영화가 제작된 1985년 시대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풍자극인 것이다. 아마도 이런 관점으로 이 영화를 리뷰한 글은 없었던 것 같다.(있었다면 죄송--;)

원작 소설은 1925년 발표되었다고 한다. 읽어보지는 못 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영화만을 보고 쓴 글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가 개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려는 제도나 체제를 비판하는데 인물들의 폭력성을 상징적 소재로 사용하여 영화적인 흥행과 이슈를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 '뽕(1985년)'은 한국의 어두운 정치 상황(원작 소설의 배경은 1925년 일제치하, 영화가 제작된 시기는 1985년 전두환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인물들의 에로틱과 해학을 상징적 소재로 사용하여 영화적인 흥행과 이슈를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에로틱과 해학은 독자나 관객에게 재미와 흥미를 주기 위한 외관이고 실제로 작가, 감독이 전달하고자 했던 숨겨둔 메시지는 우매하고 통탄할 어두운 정치적 현황을 뭇 사람들에게 알리고자하는 의도였다.


영화의 시작은 흔한 장편상업영화의 관습을 따른다. 주인공 안협(이미숙 분)과 남편 삼보(이무정 분)를 소개하고, 바로 이어서 황소처럼 힘이 센 삼돌(이대근 분)를 소개한다. 안협의 남편 삼보는 시작 부분과 끝부분에 비교적 비중 있게 다뤄지지만 실질적으로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안협과 삼돌이인 셈이다.

영화의 가시적인 이야기적 큰 목표는 '삼돌이는 자신을 극구 거부하는 안협의 사랑을 쟁취할 것인가?'이다. 에로틱 해학 영화에 딱 부합하는 이야기적 목표다. 관객이 영화를 끝까지 봐야하는 목표가 쉽고 본능적이다. 달리 말하면, 관객은 그 결말이 궁금해서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된다. 이 내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점은 대략 30분이 경과된 지점인데 요즘 영화를 기준으로 보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1985년 시대의 영화들은 대개 그쯤에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편, 다음 글은 네이버 지식사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오는 뽕 원작 소설에 대한 내용이다.

[내용]
강원도 철원(鐵原)에 사는 땅딸보ㆍ아편쟁이ㆍ노름꾼 김삼보(金三甫)와 그의 아내 안협집이 부부가 된 데 대해서는 억측만이 구구할 뿐 자세한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다.

안협집은 인물이 고운 대신 무식하고 돈만 알아 정조 관념이 약한 여자이다. 노름에 미쳐 집안을 돌보지 않는 남편을 대신해서 안협집은 동네 삯일을 하며 지내던 중, 어느 집 서방에게 당하고 쌀과 피륙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것처럼 좋은 벌이가 없음을 깨닫고 나자 안협집은 자진해서 그런 벌이에 나서게 되었다. 힘이 세어 호랑이 삼돌이라고 불리는 뒷집 머슴 삼돌이는 둘도 없는 난봉꾼인데 안협집을 노리나 성공하지 못한다.

삼돌이는 우연히 안협집과 뽕밭에 갈 기회가 생겨 그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으나 안협집이 뽕지기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김삼보가 귀가해서 부부싸움이 벌어졌을 때 앙심을 품고 있던 삼돌은 안협집의 행각을 일러바친다. 분격한 김삼보는 자백을 받으려고 안협집을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그 다음날 김삼보가 집을 떠나자 안협집의 생활은 전과 다름없이 계속된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물레방아」와 같이 농촌 사실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평가된다. 가난과 신고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도덕의식의 와해, 가정 내의 성질서 파괴 등이 작품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주인공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당면한 가난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 않으며 손쉬운 교환가치로서 성과 본능 충족 수단으로서 성에 탐닉한다.
윤리 의식이 빠진 본능 추구를 계속하는 주인공들을 냉정한 객관적 시선으로 따라가는 이 작품은 나도향이 도달한 사실주의의 극치라 하겠다.
 

아무튼 줄거리와 기존의 의의와 평가는 위와 같고 원작을 정치적인 풍자극으로 인식한 것 같지는 않다.


어떤이는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극사실주의(소설) 또는 에로틱 해학 시대극(영화)가 아니라 정치적 풍자극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숨겨져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필자가 생각하는 첫번째 이유는 안협이 마을 남자 중에 유일하게 삼돌이를 거부한다는 점이 소설이 써진 시대나 영화가 제작된 시기의 사회상에 비춰볼 때 비상식적이다. 안협이 삼돌이만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가 머슴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안협의 어린 시절 장면에서 쌀이 없어서 솔잎을 끓여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그녀가 단지 머슴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일하게 삼돌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어떤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현시대에는 간지나는 늘씬한 남자가 인기남이지만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나 소설이 써진 시대에는 듬직한 남자(삼돌이)가 아낙들에게 인기 있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직 그런 현상이 잔존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강호동 방송인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경우나 우량아 선발 대회 등이 그렇다. 젓가락처럼 날씬한 몸매의 아기를 좋아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상식을 깨고 자신도 하층민 출신인 안협은 단지 머슴이라는 이유로 삼돌이만을 극구 거부하는 이상한 설정이 나오는데 이것은 영화가 극사실주의가 아니라 정치 풍자극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별다른 에피소드도 없이 일본순사가 삼보를 따라 다닌다. 영화의 전반 뿐만 아니라 영화의 후반부에도 등장한다. 그 순사가 왜 삼보를 뒤쫓아 다니는지 또는 은밀히 동행하는지 엔딩까지 제시되지 않는다. 어떤이는 삼보가 독립군이고 순사는 그를 쫓는 중이라고 해석하는 것 같다. 전혀 아니라고 볼 수도 없지만, 그랬다면 홀로 자전거를 끌고 순사 제복을 입고 쫓지는 않을 것이다. 게쉬타포같은 사복차림의 순사 2명이라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또한, 막판에 삼보와 삼돌이가 싸울 때 그것을 빌미로 체포하여 고문할수도 있지만 그냥 외면한다. 단지 독립군과 추격자로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이것은 이 영화가 단지 에로틱과 해학만을 주는 영화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즉, 정치 풍자극임을 암시하는 알레고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 아래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정치 풍자극으로 해석하면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여주인공 '안협'은 '신흥지식세력'을 상징한다. 일종의 개혁, 신제도,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신흥지식인들(개혁자)를 상징한다. 원작 소설의 시대 1925년에 대한 상징도 그렇고 영화로 제작된 1985년에 대한 상징도 그렇다. 쉽게 말해서 가난하고 백(back)도 없지만 형설지공으로 지식을 높게 쌓은 젊은 지식인들을 상징한다.

'뽕'은 '책', '지식'을 상징한다. 영화에서 뽕으로 키우는 누에를 별다른 투자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효자덩어리로 묘사된다.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이다. 안협은 뽕을 적극적으로 구해서 누에를 키운다. 이것은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 적은 비용으로 책을 구해서 탐독하고 열독하는 것을 상징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의 '지식'이란 '순수한 앎'의 측면보다는 신분상승(과거급제)나 안정적인 기업체에 취업하기 위한 수단의 측면이 강한데 그런 의미에서의 지식을 상징하는 뽕이라 말할 수 있다. 삼보의 대사 "뽕을 따야 님도 따지."에서 그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뽕은 지식이고 님은 누에이며 이것은 곧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

안협의 남편 '삼보'는 '왕권' 또는 '최고 권력자'를 상징한다. 1925년 배경에서는 일제치하에 실제 권력이 없는 꼭두각시 같은 국내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고, 1985년 배경에서는 군사정권에게 억압되어 힘겨운 사투를 벌리던 순수한 정치세력을 상징한다. 삼보가 애지중지 사랑하는 아내 안협과 자신의 집을 떠나 전국팔도를 떠돌며 놀음이나 일삼는 것이 상징하는 것은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헛짓거리(또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권싸움)이나 일삼는 최고권력자를 풍자한 것이다.

일본 순사는 초반부와 끝부분에 잠깐 등장하는데 공교롭게도 남편 삼보가 등장하는 시기와 같다. 이는 후반부에 마을 아낙네들도 일본순사가 나타날 때마다 삼보가 돌아온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이것이 의도적임을 관객에게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삼보는 또다시 길을 떠나는데 어떤 마을남자가 "삼보 팔자가 제일이구먼."라고 말했을 때 옆에 있던 남자가 "그렇지도 않은가벼."라고 말하고 그 다음 장면이 일본순사가 그를 뒤따라가는 장면이다. 이것은 최고권력자가 자주적이지 않고 일본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볼 수 있는 삼보와 삼돌이가 신명나게 싸움을 했을 때 마을 남자와 이장이 지켜보고 있는 순사에게 말려달라고 부탁하지만 순사는 이 영화에서 유일한 대사 한마디를 한다. "너희들 일이니 죽이던지 살리던지 너희 맘대로 해라" 그리고 유유히 싸움판을 떠난다. 이 장면에서도 이 영화가 정치 풍자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남정네들'은 기득권자, 중상류층, 지방유지, 보수세력, 현실주의자를 상징한다. 이들은 어쨌거나 묵묵히 현실에 순응하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마을 남정네들의 '아낙네들'은 영화에서 자신의 남편을 유혹한 안협을 처절하게 혼쭐내준다. 이것은 안협을 제외한 마을 아낙네들은 안협과 같은 신흥지식세력에 속하지만 차이점은 노선을 달리하며 기존의 제도와 보수세력에 편입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들이 안협을 공격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영역에 안협이 침입했기 때문이다. 남편들(기득권자, 재력가)의 지지를 안협이 빼앗아가려한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다.

그러면 마을에서 황소같이 힘이 가장 센 '삼돌'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군인이다. 1925년에는 오직 파괴와 군사력만을 압세워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급진적인 독립군이고, 1985년에는 최고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을 상징한다. 영화 초반에 삼돌이는 춤을 추며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술을 마시러 가다가 일본 순사와 마주친다. 삼돌이는 "나리, 왕림하셨습니까요!"라고 말하며 넙죽 인사한다. 그러나 그 외 마을사람들은 인사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있을 뿐이다. 이 장면에서 작가가 전달하고자한 메시지는 삼돌(군부세력)은 친일적이라는 점이다.

영화 후반부에 삼돌이는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안협에게 달려드는데, 안협은 굴하지않고 끝까지 저항하고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싫은 것은 억만금을 줘도 싫은거여." 이것은 신흥지식세력이 군부세력, 군사정권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강력히 재확인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왜 그토록 안협(신흥지식세력)이 수많은 마을 남정네들에게 정을 통하면서(보수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돈독히 하여 지지기반을 넓히려고 노력하면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장 힘이 센 삼돌(군부세력)에게는 결코 정을 주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신흥지식세력은 군부세력과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여 동맹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신흥지식세력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일제치하에서 무력으로 빼앗아 건설한다고해도 그 이후에 강한 파괴력을 지닌 군부세력이 무력을 사용해서 정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는 국사뿐만아니라 세계사에 많이 증명되어 있다. 때문에 안협(신흥지식세력)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코 황소보다 힘이 센 삼돌(군부세력)과 정을 통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질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아랫마을 촌시어른을 불러서 안협을 따끔하게 훈계하고 그녀를 추방하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기득권자 입장에서 골칫거리 신흥지식세력을 잠재우려고 외국의 힘(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을 끌어들이는 것을 풍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보와 삼돌이의 싸움에서 삼보가 일방적으로 이긴다. 여기에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군부세력이 소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최고정권을 장악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주제의식이다. 이것은 또한 무력만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도 반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흥지식세력의 생각에 무능력해도 어쨌든 최고권력자는 최고권력자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 이전까지는 그를 인정해줘야한다는 의식이다. 서구 사상으로 말하면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팔도를 유랑하며 놀음이나 해대는 무능하고 한심한 남편이라도 안협은 결코 가정을 깨트리지 않고 언젠가 남편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희망을 꿈꾸며 힘겨운 일상을 억척스럽게 살아간다. 이런 결론이 상징하는 것은 비록 일본의 지배에 억압되어 자주 국력을 잃은 최고 권력자들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복귀할 것이고 신흥지식세력은 힘겹지만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군부세력에 의지하지는 않겠다는 의사표명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 '뽕'을 단순히 에로틱 시대극 또는 사실주의적 작품이 아니라 정치 풍자극으로 감상한다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고상한 해석을 전혀 모르고 보더라도 이 영화는 매우 흥미롭고 재밌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마도 20세기 한국영화 100편 중에 당당히 포함될 가치가 있다.

어떤 영화가 명작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기준 중에 하나는 고상한 깊은 의미 따위를 전혀 모르고 봐도 흥미진진한데, 숨겨진 의미를 알고 보면 색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명작일 것이다. 그렇다고 상징성을 갖춘 영화가 반드시 좋은 작품이란 뜻은 아니다. 현대 영화일수록 상징성은 다소 조심스럽게 다뤄져야할 크리스탈 재료일 수도 있다.


2012년 3월 24일 김곧글(Kim God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