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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샐러리맨 초한지 (TV드라마, 2012)

by 김곧글 Kim Godgul 2012. 5. 19. 13:59




홍보문구만큼 진정으로 샐러리맨의 마음 속을 감흥시켜주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확실히 재밌었고 흥미로왔다. 주인공 유방(이범수 분)은 초반에 샐러리맨으로 시작했지만 핵심 내용은 기업 전쟁이었다. 중소기업 부대를 이끄는 다윗 유방 장수가 재벌기업 제국을 대표하는 골리앗 최항우 장수 그리고 최후에는 클레오파트라 모가비 여왕을 무찌르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장수들의 전쟁에 초점이 맞춰졌다. 만약 진정한 의미로 샐러리맨을 위로하는 이야기라면 병사들의 애환이나 희로애락 여정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유방(이범수 분)의 코믹연기는 왠만한 개그맨을 능가할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국내 TV 드라마에서 할 수 있는 코믹연기의 교과서라고 말할 수 있다. 최항우(정겨운 분)의 젠틀한 악역도 인상적이었고, 새침때기면서 낮에는 열혈 인텔리 도시녀이면서 밤에는 순박한 시골녀 같은 차우희(홍수현 분)의 연기도 좋았다. 그리고 초반에는 존재감이 없었는데 후반에 막강한 존재감을 보여준 모가비(김서형 분)의 광기어린 악녀도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 묵직한 중견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가 드라마를 살찌우고 윤택하게 했다. 그리고 독특한 캐릭터 백여치를 연기한 정려원은 물고기가 연못에 다이빙한 것처럼 단순히 잘한 것을 넘어선 연기를 보여주었다.


정려원은 '두 얼굴의 여친(2007)'에서 다중인격 '아니' 역을 놀랄 정도로 잘 했었다. 솔직히 '아니'가 내면의 또 다른 인격 '하니'로 변했을 때 무서웠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지? 그만큼 연기를 리얼하게 했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너무 강렬하게 나쁜여자 연기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영화는 로맨틱 코메디인데 딱히 말로 표현하기 뭐하지만 하니는 정말 폭력적이고 나쁜여자일지라도 어딘지 모르게 연민이 느껴지는 그 미묘한 구석을 느낄 수 없던 점이 살짝 아쉬웠다. 그 미묘한 것을 아니가 대신하기 때문에 이해는 가지만 말이다. 데이빗이 헐크로 변했을 때 헐크가 어린 아이를 보자마자 분을 가라앉히고 멀뚱히 아이의 눈을 쳐다보는 장면같은 사소한 대칭 성격 포인트가 없었다는 얘기다. 아무튼 왠만한 여배우가 소화할 수 없는 인상적인 연기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초한지에서는 그 하니와는 조금 다르게 나쁜여자 백여치를 잘 연기해서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니와 백여치는 본래 정려원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김씨표류기', '적과의 동침', '통증'에서 정려원의 배역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하고 고지식하고 청순한 성격이 본래 모습과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수많은 관객들은 정려원이 하니와 백여치를 연기할 때 거의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바라본 것 같다. 작품의 흥행성과 별개로 말이다.


어떤 배역이 있을 때 그 배역을 실력있는 연기자들이 비슷한 수준으로 해낼 수 있을 때, 어떤 연기자는 그 대동소이한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연기를 해낸다. 그런 이유가 피나는 연습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삶의 경험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타고난 재능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선입견이나 아우라나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튼 누군가는 어떤 배역을 월등히 잘 한다. 이것을 어떤 배역과 어떤 배우가 궁합이 맞는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정려원 배우는 하니와 백여치 같은 배역이 본인의 본래 성격이나 선호와는 무관하게 궁합이 맞는다고 생각된다(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이 궁합도 변한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다른 배우가 백여치를 연기해서 용(dragon)을 그릴 수 있다면, 정려원이 백여치를 연기해서는 '화룡점정'까지 그려낸다는 얘기다.


이전에 올렸던 글에서 배우 송강호를 바라보는 보통 관객의 입장에 대해서 적었었다. 정려원도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다. 수많은 대중들은 어떤 배우에게 딱 맞는 배역에 대한 무의식적인 느낌이 있다. 그렇다고 배우가 계속 똑같은 배역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을 피하는 방법은 적절한 범위 내에서 변주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관객들은 재탕에 대한 거부감이 은연중에 녹을 것이다.


정려원의 독보적인 악녀 연기에서 약간의 포인트를 더하자면 그것은 정말 악녀처럼 보여지도록 연기하는 것에만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현재만으로도 충분하고 넘친다) 어딘지 모르게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대칭 성격에서 매혹의 점(신체에 점을 분장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추상적인 의미로서의 점)을 어떻게 첨가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이 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혀 다른 배역, 예를 들어, 순수하고 청순한 인물을 연기할 때도 점만한 뜨거운? 기질을 살짝 첨가해주는 것도 인물을 빛나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대부분 대본이나 시나리오 상에서 작가가 해야하는 일에 속하지만, 그것 외에 오직 배우만이 할 수 있는 순간 연기, 대사의 톤, 뉘앙스, 속도, 얼굴 표정, 눈동자 투명도, 시선처리, 고개의 각도, 입술의 움직임, 손짓, 포즈,... 등등을 말한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찰떡궁합인 배역만을 해야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슬럼프에 빠졌거나 매너리즘을 느낄 때 자신에게 찰떡궁합인 배역을 인지하고 참고하면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연기자로서의 삶을 설계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샐러리맨 초한지는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놀라울 정도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지닌 것은 아니다. 흥행하는 국내 TV 드라마의 패턴을 인식하고 향상시키고 발전시켜서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현재 시점에서 잘 만든 드라마였다. 사소한 단점들이 눈에 띄였지만 그것은 국내 TV 드라마 제작 여건을 생각하면 충분히 간과할 수 있는 세부적인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인물이나 이야기의 굵은 줄기가 짜임새있게 잘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내 공중파 TV 드라마 중에서 가족, 멜로, 로코, 사극 장르가 아니면서 이정도 만큼 시청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2012년 05월 19일 김곧글(Kim God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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