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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글(Movie)

장고: 분노의 추적자 (Django Unchained, 2012)

by 김곧글 Kim Godgul 2013. 2. 11. 16:45


  

어렸을 때 텔레비전의 주말의 명화 중에서 홍보를 진하게 했던 영화가 종종 있었는데, '장고(Django, 1967)'의 경우에는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키워드였고 나로서는 당연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트레이드마크 서부영화 이미지를 상상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랐다. 시원하지도 통괘하지도 않고 흔한 서부영화의 근사하고 멋진 이미지와는 매우 달랐다. 칙칙하고 처절하고 잔인하고 비열하고 껄끄러운 서부영화였다.

  

관을 질질 끌고 황야를 가로질러온 장고. 그때까지 그런 이미지의 서부영화 영웅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영웅상은 이후에 수많은 작품에서 재활용된 것 같다. 일본 애니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서부영화하면 흔히 먼지가 뽀얗게 쌓이는, 심지어는 '황야의 무법자'에서 북군의 남색 제복이 먼지로 인해 남부군의 연갈색으로 바뀌어버린 장면도 있을 정도인데, 이 영화에서는 마을의 중심대로인데도 장마가 지나고 난 후의 진흙탕길처럼 질퍽질퍽하며 이런 공간적 배경의 이미지는 기존의 건조한 사막을 배경으로 했던 수많은 서부영화의 이미지와는 차별화되고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라고 볼 수 있는 처절하고 칙칙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저런 극악무도한', '저런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같은 놈들' 이라는 말이 절로 뱉어질 만큼 이 영화에서의 악당은 잔인하다. 물론 요즘 시대 영화에는 더한 악당도 많이 나오지만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장고를 봤을 때를 말한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영화계의 이단아, B급 스타일의 귀재, 탈아카데미즘, 친동양적 세계관과 인물들로 유명한 퀀틴 타란티노 감독이 2012년에 발표한 '장고(Django Unchained, 2012)'는 과거의 장고와 전혀 다른 인물과 세계관이지만 그 심장과 혈관은 그대로 심어놓았다. 그것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악당을 응징하는 불굴의 영웅 이미지다.   

  

타란티노 감독이 전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에서 독일군에게 핏빡받은 유대인을 위로했다면, 이번 영화 '장고'에서는 과거 미국의 백인에게 핏빡받은 흑인을 위로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 방식은 독일인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던 것처럼 미국의 백인의 관점에서 보면 썩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는 분위기다. 통쾌하게 강렬하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 복수의 응징이기 때문이다. 결코 우아하거나 도덕적이거나 신사적이지 않다. 동양의 유교주의와 비슷한 개념의 기사도 정신 그 딴 것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이것이 최근 타란티노 영화의 특별한 매력일 것이다.


사실 이게 없다면 타란티노 영화는 그저 개성 강한 액션 영화일 뿐으로 기억될 것이다. 마치 영화의 명사들, 교수들, 전문가들, 매니아들에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칭찬받으려고 고진감래하는 고독한 영화학도 이미지 말이다. 그런데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이번 영화 '장고'에서는 다소 다르다.


쉽게 말해서, 윗선에서 구축한 기존의 사회적 관념에 대한 반항을 윗선의 점잖은 분들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우아한'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아랫선이 느끼는 사회적 관념에서의 그들이 진하게 만족할만한 반항을 담았다는 점이다.


작품이란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존의 잣대와는 반대되는 성격의 잣대로 봐줘야할 작품도 많아야하는데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전 세계 어디를 가나 그렇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 그것이 많이 달라지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거대자본과 거대권력이 어느덧 인터넷을 통제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인류문명이 그랬듯이 큰 변화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 달라지는 것으로 만족해야할 지도 모른다. 아직 진행 중이라 단정하기엔 이르지만 말이다.  

  

먼 옛날, '뿌리'라는 미국의 TV 미니시리즈가 국내 뿐만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크게 히트쳤었다. 흑인 노예 가족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였다. 그 당시 사회분위기상 어쩔 수 없었지만 그 당시만해도 파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백인의 윗선에서 편안하게 반성하는 듯한 느낌의 영화이지 흑인을 뼈속에서 위로하는 영화로 볼 수 없었는데,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는 그냥 대놓고 흑인의 속마음을 통쾌하게 위로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과 관련된 장면은 주로 후반에 나온다.

  


전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소름돋을만큼 잔인한 독일 게쉬타포 장교가 잔인한 악당을 대표했다면, '장고'에서는 미국 남부지방의 부유한 지주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이 잔인한 악당을 대표한다. 게쉬타포도 그랬지만 타란티노 감독이 악당을 독보적이게 잘 만드는 것 같다. 스타일은 서로 다르지만 캔디는 그 나름대로 특유의 잔인함을 가진 악당이다. 디카프리오가 이 배역을 인상적으로 잘 해낸 것이 영화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캔디가 게쉬타포만큼 카리스마가 있지는 않았다. 괜찮았다 잘 연기했다의 정도이다. 그 약간의 공백을 '스티븐(사무엘 L. 잭슨 분)'이 적절하게 보충했다. 스티븐은 당시 백인에게 인정받아 흑인노예를 이끌고 관리하는 영악한 집사 쯤 된다. 아마도 군대를 갔다온 대부분의 남자들은 군대에서 스티븐 같은 인물을 봤을 것이다. 또는 왠만한 회사나 직장에서 한번 쯤 봤음직한 인물상이기도 하다. 윗사람에게는 매우 유익하고 요긴한 부하, 아랫사람에게는 인간적으로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친분을 유지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영악한 관리자 정도의 상관 말이다. 짧게 나오는 스티븐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타란티노 감독이 얼마나 섬세하게 인물을 표현할 수 있는 뛰어난 감독인지 확인할 수 있다. 액션 영화를 잘 만드는 서양 감독 중에서 여러 인물들을 골고루 잘 표현하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이 영화의 백미는 후반부에 나온다. 좁은 공간에서 핏빛을 흥건하게 장렬시키는 총질은 서부영화에서는 빠질 수 없는 액기스인데 그것을 타란티노만의 영상미학으로 신명나게 표현했다.  

  


이 영화가 현시대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 것 같지는 않다. 현대사회가 인정하는 보편적인 가치관에 기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보통 관객이 즐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조금 이색적인 액션 서부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에게는 충분히 만족감을 줄 것이다. 비교적 단순한 리듬과 멜로디의 배경 음악과 영상 시퀀스가 매우 잘 어울리는 것도 이 영화의 매력 중에 하나다.

  

  

2013년 02월 11일 김곧글(Kim God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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