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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칼럼, 단편68

[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New Coronavirus) 텍스트 동영상으로 읽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그 녀석 덕분에, 우리 인간은 서로 떨어져야 살 수 있잖아 그러고 싶어 하잖았어? 아니었던가? 서로를 더 멀리 멀어지게 하면서 동시에 더 밀접하게 연결시켜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녀석, 참 징글징글해 너에게 우리 인간은 한낮 속수무책이구나 누가 진짜 미물인지 모르겠다 그저 너의 무자비한 잔악에 피폐되지 않기만을... 다소 뽑기에 의존해야하는 인간의 삶이라니 안 그래도 요즘 세상이 그런데 더욱더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 따로 없구나 무자비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신과 악마가 어느 날 마주앉아 차를 홀짝이며 장기와 체스로 소일하던 와중에 느닷없이 동시에 상대방의 속임수와 교활함에 빡친다며 천둥 같은 고성을 내뱉을 때 튀겨 나온 이종의 침들이 뒤얽히며 인간세상으로 떨.. 2020. 3. 12. 18:27
[시] 사기꾼과 호구 텍스트 동영상으로 읽기 사기꾼과 호구 사람은 본능적으로 친절한 목소리에 마음을 내려놓는다 추가로 환상적인 거래가 제안된다면 효과는 곱절로 뛴다 마치 사실인 양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는 사기꾼의 언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산타클로스를 만나 선물을 받고 행복감에 젓는 호구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놈의 미끼에 걸려들 수 있다 호구는 ‘설마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며 사리분별의 시력이 멀게 된다 오로지 이 만족스런 거래를 잘 성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지상목표일뿐이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잘 개미지옥으로 빠져버리는 개미의 참상처럼 일시적으로 마비된 눈먼 호구의 정신은 사기꾼의 수렁의 심연으로 익사한다 얼마 후 우여곡절 끝에 호구는 제 정신을 차리고 전후 상황을 파악하지만 이미 사기꾼은 지 볼 일을 잘 .. 2020. 3. 11. 19:09
[단편] 내 사랑, 러브돌(Lovedoll) (시나리오) 내 사랑, 러브돌(Lovedoll) #1 이성호 아파트 (오전) 자명종이 울린다. 자동으로 시끄러운 음악이 CD데크에서 시작된다. 침대 위에 이성호가 여자M을 부등껴안고 자다가 눈을 비비며 깬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여자M은 계속 자고 있다. 그는 욕실로 향한다. 이불과 혼합되어 있는 여자M의 관능미가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잠시 후, 성호는 세미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메고 나가려다 말고 침실로 다시 되돌아와서 잠자고 있는 여자M에게 가벼운 키스를 하고, 침대 위 베개에 붙어있는 어떤 여자 얼굴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집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2 도시 풍경 (오전) 빠르게 달리는 지하철, 버스, 택시, 승용차. 으리으리하고 빽빽하고 차가운 마천루 사이로 무뚝뚝하게 바삐 걷는 정장차림의 남자, 여자. .. 2020. 2. 23. 15:14
[단편] 사이버 여배우의 누드 사진집 사이버 여배우의 누드 사진집 쾌적하고 안락한 느낌을 풍기지만 어딘지 모르게 인공적인, 화학약품 냄새를 내뿜는 현대식 병원이었다. 창밖으로 초록의 녹지를 따라 터벅터벅 걷는 환자들, 보조하는 간호사들, 부드럽게 굴러가는 전기 휠체어, 묵묵히 걸으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의사들, 어느 쪽에선가 들리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 주차장 안내원의 마이크 소리. 나는 창문을 닫았다. 그러나 방금 잠들은 12살 딸내미의 얼굴을 보자마자 창밖을 내다보기 전의 침울한 느낌으로 되돌아왔다. 또한 그건 옆에서 조용히 안쓰럽게 환자용 침대 주변을 정리하는, 지금은 딴 남자의 아내가 된 전처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전처와 나는 개인적인 가치관과 인생관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 하고 몇 년 전에 이혼을 했는데, 우리는 별 무리 없이 .. 2020. 2. 17. 17:50
[단편] 변신(Transformation or Metamorphosis) 변신(Transformation or Metamorphosis) 어느 날 문뜩 깨어나 보니 자신이 한 남자가 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몇 달간의 풍요로운 포식 생활을 마친 바퀴벌레는 꽤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방금 전 깨어나 보니 자신이 인간이 되어 있던 것이다. 음침하고 칙칙하고 구수한 곰팡이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이 아파트로 원정을 와서 정착한 것은 6개월 전이었다. 바퀴벌레는 이곳에 미리 머물고 있던 몸집이 작은 동족을 몰아내고 더불어 개미녀석들, 쥐며느리, 설레벌이도 쫓아냈다. 마침내 이 넓은 에덴의 땅을 홀로 차지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번식을 하고 자손을 널리 번창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나름대로 차근차근 인생 목표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의 집주인이 어느 날 이상한 알약을 한가득 .. 2020. 2. 10. 21:31
[시] 밥알 밥알 삐~삐~, 전기밥통이 작업을 끝냈다고, 이젠 느슨히 보온만 하겠단다. 그 소리를 정확히 언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 딴에는 좀 무거운 단어들로 채워진 신문의 칼럼을 힘겹게 끝까지 읽는다. 밥공기와 플라스틱 주걱을 집어 전기밥통에게 다가간다. 첫잔의 맥주에서 느낄 수 있는 달콤함 같은 새하얀 드라이아이스처럼 뿜어져 나오는 김. “성인병에 안 걸리려면 잡곡밥을 먹어야 된대요.” 라는 내 제안에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어머니의 미간에 주름살이 짙어진다. “돈 내놔. 당장 사다 줄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새하얀 쌀밥이다. 어르신들이 젊었을 때는 흰쌀밥을 먹는 게 큰 기쁨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지. 주걱에 찰싹 달라붙은 몇 개의 밥알, 미안해, 싱크대 수돗물에 씻겨 보낸다. 플라스틱 주걱을 밥통 안에.. 2020. 2. 5. 19:01
[시] 지하철에서 페티시(fetish) 지하철에서 페티시(fetish) 먼지와 매연이 콘크리트 벽을 휘어 감싸는 대도시 덜커덩거리는, 붐비는, 어두침침한 객차. 신문을 활짝 펼쳐 읽는 양복 신사, 청바지를 꽉 끼여 입은 젊은녀, 커다란 보따리를 지고타는 주름살의 아줌마, 이어폰에 귀를 파묻은 남고생, 싸구려 샴푸 향기 휘날리는 생머리 처녀, 깔깔대는 여고생, 지하 동굴을 괴성 지르며 질주하는 지하철. 그 속에 빼곡히 들어찬 무의식의 충동을 깊숙이 꽁꽁 움켜쥔 도시의 짐승들 착석한 내 앞에 바짝 붙어 선 교복차림의 두 여고생 확실치 않지만, 요 몇 년 사이 부쩍 짧아진 교복 스커트 그보다 확실한 것은 부쩍 날씬해진 여고생들의 다리 젓가락처럼 삐쩍 가늘다. 종아리와 허벅지의 차이가 미묘할 정도로. 두 여고생의 체형은 다르지만 다리의 굵기는 비슷하.. 2020. 2. 3. 18:56
[시] 차가운 봄바람이 잠들고 차가운 봄바람이 잠들고 차가운 봄바람이 잠들고 꽃향기가 기지개를 켜는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들, 그들의 환심을 사는 반딧불이의 윤곽을 주조하는 계절은 하지의 기상을 고대한다. 뿌연 먼지에 휩싸인 고층빌딩 옥상에 헬리콥터가 내려앉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내가 안 본 사이에 여러 번 이착륙했는지도 모르지. 내가 시도 때도 없이 그곳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아니니까. 동쪽 지평선 너머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타고 서쪽 지평선 너머로 계속 달려가서 언젠가 동쪽 지평선으로 되돌아오는 기차여행을 하면 좋겠다. 지구를 출발하는 기차 같은 우주선을 타고 (은하철도999이건 말건 상관없지) 안드로메다 성단의 지구 같은 행성에 도착해서 떡볶이와 어묵을 먹고 지구로 되돌아오는 우주기차여행을 하면 좋겠다. 2.. 2020. 2. 2. 17:44
[시] 토마토 쥬스처럼 신선한 피 토마토 쥬스처럼 신선한 피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말해야겠어 맨 정신을, 적어도 남들 보기에 정상인처럼 보이고 싶어 다 살자고 하는 짓 사는 게 다 그렇지 내가 사는 방식, 이랄 것도 없지만 껄껄껄, 그날이 오기 전까진 영원히 암흑으로 떨어질 그날 전까진 이렇게 살 테니. 너무 놀라진 마, 날 이해해 달라고 까진 안 바래 단지 이렇게 가끔 만나 너와 나누는 싸구려 술자리 시원한 부대찌개와 투명한 소주 우리가 각자 결혼하기 전에도 종종 이런 자리, 괜찮았는데 요즘은 통, 여간해선 자리 만들기 힘들어 너나 나나, 믿고 따라온 아내를 행복하게 해줘야할 의무가 있으니 옷과 화장품을 사주고, 맛집을 동행하고, 백화점을 따라가고, 휴가도 데려가고... 귀찮다니, 쉿! 큰일 날 소리 귀신같이 눈치채는 아.. 2020. 2. 1. 19:18
[SF 단편] 고층빌딩에 담배 피는 고양이 고층빌딩에 담배 피는 고양이 “고층빌딩에 담배 피는 고양이 같은 놈아!” 라는 말을 21xx년 초거대 도시 '서울'에서 절대로 말하지 말기를 바란다. ('서울일상용어대사전 21xx년 판'에서 인용) 내가 한참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하늘을 나는 공중셔틀버스가 등장한 지 얼마 안 된 시절에, 나는 자주 그걸 타고 등교하곤 했다. 원래 최단등교시간을 위해서는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웅장하고 화려한 고층빌딩과 다양한 피부색의 뭇사람들과 각양각색의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마치 진정으로 제2의 피카소라는 평가를 받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동남아시아 어떤 섬마을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며 활동 중인 화가 ‘환상손’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도시풍경을 내려다보는 재미 때문에 17분이나 더 걸리는데도.. 2020. 1. 24. 19:29
[시] 사랑에 관한 옛말을 인용해서 사랑에 관한 옛말을 인용해서 무릇 남자는 ‘여시’ 같은 여자를 만나서 무릇 여자는 ‘기생오라비’ 같은 남자를 만나서 때로는 찬연하게 때로는 혹독하게 천국과 지옥을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보다 깊고 넓게, '사랑'이란 것에 관한 통찰과 혜안의 열매가 성숙하게 익는다. 주1) ‘여시’, ‘기생오라비’, '사랑'이라는 단어는 폭넓은 현대적인 통념으로 해석되고 이해되길 바란다. 단지 외모나 행동거지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다 넓고 총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주2) 참고로 이 시를 읽는 외국인을 위해서 부연하자면, '여시', '기생오라비'는 한국의 옛말(속담, 격언)에 등장하는 단어이다. '여시'의 본래 뜻은 '여우(fox)'이고, '기생오라비'의 본래 뜻은 '기생(옛날 고급 또는 부유한 매춘부, 또는 현시.. 2019. 8. 24. 21:33
[시]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If I could ride on the time machine,)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마음껏 쏴돌아다니고 싶다. 지금은 깨끗이 환골탈태한 내 어린 시절 살았던 칙칙한 동네로 시간여행을 떠나서 골목골목 여기저기 누비고 싶다. 구멍에 골고루 넣는 재미가 쏠쏠한 전봇대 아래 피라미드처럼 쌓아놓은 다 타 버린 연탄재 위에 소변을 쏴대기도 하고. 비가 내리면 흙탕물이 여기저기 고여 부지불식간에 바지에 튕기고 저녁에 엄마한테 나 때문에 방바닥이 흙투성이라고 혼쭐나고. 집 앞 허름한 벽에는 덕지덕지 겹겹이 도배된 3류 극장 포스터 쪼가리들. 누군가 말 로고를 떼어간 포니 승용차가 주차해있고 ‘정말 그 로고를 당시 몇 천원에 산다는 업자가 실재했을까? 아니면 단지 아이들끼리 뜬소문이었을까?’ 문방구 문밖에 아이들이 쭈그리고 앉아 조.. 2019. 3. 17. 00:33